본문 바로가기

발비(發飛) 전체보기2197

[로버트 프로스트] 불과 얼음 불과 얼음 로버트 프로스트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불로 끝날 거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얼음으로 끝난다고 말한다. 내가 맛 본 욕망에 비춰보면 나는 불로 끝난다는 사람들 편을 들고 싶다. 그러나 세상이 두 번 멸망한다면 파괴하는 데는 얼음도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할 만큼 나는 증오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걸로 충분하다. (정현종 번역, 1973년 민음사 발행) 얼음으로 소환되는 시간과 사람 -잠시 딴소리부터- 이틀에 한 번 얼음을 깬다. 오롯이 집에서 여름을 보낸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놀라운 것 중에 하나는 얼음을 많이 먹는다는 거다. 그동안은 마트에서 얼음 3킬로그램을 배달시켜서 먹었는데, 일주일도 되지 않아 얼음이 바닥이 나, 얼음을 얼려서 먹기로 했.. 2022. 8. 2.
[손가락] 이 아프다. 일을 하면 내게 쥐약은 키보드이다. 키보드가 일이고, 놀이터였던 사람이 키보드 문제라면 너무나 치명적이다. 키보드를 치면 손가락이 너무 아프다. 퇴행성 관절염 초기라나... 뭐 그렇다. 마지막 출판사를 퇴사한 이유 중 남들이 모르는 이유가 바로 손가락 통증이었다. 저자에게 메일을 보낼 수 없는 상황까지 갔었다. 퇴사를 하고 일년이 넘고, 일년 반이 될 때까지 키보드를 칠 수 없고, 마우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컴과 멀리했다. 키보드와 마우스 외의 일과 놀이를 알지 못하기에 흔히 말하는 멘붕의 시간이었다. 순식간에 무능력자가 되었다. 슬프고 슬퍼 땅 속에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귀촌이었을지도. 모든 결정, 판단, 마음은 하나의 점이 아니라 여러 개의 점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어떤 덩어리인 거니까. 귀촌을 접고.. 2022. 7. 21.
[만족] 오전 9시의 여유 만족 (滿足) 1. 마음에 흡족함. 2.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 - 네이버 사전 빅토와 이틀을 함께 지냈다. 예비군 훈련 기간인데, 같이 지내고 싶다고 했다. 어제 저녁은 빅토가 샤브샤브를 사줘서 맛있게 먹었고, 밤에는 빅토가 해결하지 못한 노트북과 듀얼모니터를 C타입으로 연결해줬다. 살짝 놀라는 듯 했다. 굿나잇 인사를 두 번하고 잤다. 오늘이 훈련 마지막 날이라 세탁한 옷들이며, 챙겨가야 하는 소소한 물건들을 챙겨서 이른 아침에 나가며 편안한 얼굴로 "갈게요." 하고 인사를 했다. 빅토가 여기저기 남겨놓은 흔적들을 치우고 나만의 모드로 정리했다. 오전 9시면 덜 깬 잠을 깨우고, 씻고, 화장하고, 옷 갖춰 입고, 집을 나서고, 회사에 도착해서, 출근확인을 하고 커피 한 잔을 마주할 시간이다... 2022. 7. 20.
[진심] 싱겁고도 강한 맛 토마토퓨레를 잔뜩 넣은 새우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 이 음식도 레시피가 없는 그냥 토마토맛이 잔뜩 나는 가난한 혹은 초라한 스파게티가 먹고 싶었다. 아점으로 별 느낌없이 먹고, 또 자고, 일어나 식어서 불은 스파게티에 소금도 넣지 않은 감자를 한 켠에 넣어 전자렌지에 데웠다. 이건 나의 개취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 저녁에 해 둔 스파게티를 다음날 아침 출발 전에 먹으면 좋았다. 불었지만 양념이 푹 베인 스파게티) 별 생각없이 괜찮네 하는 마음으로 역시 나는 이런 게 좀 좋아. 하면서 한 입 먹고, 감자를 한 조각 먹었는데, 강한 향이 나는 토마토 소스와는 정반대 맛, 아린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딱 감자맛. 감자의 순수한 맛이다. 그때 드는 단어, 진심 진심: 참되고 변하지 않는 마음의 본체(.. 2022. 7. 16.
[음주] 힘들면 자제해야지 술을 마시면 2박 3일 죽어야 살아난다. 각오해야지. 알지. 근데 마셨다. 아예 술을 안 마신지는 2년 넘었고, 그 전 몇년은 점심 혹은 오후에 맥주 딱 한잔, -한 잔은 너무 좋지, 와인 한 잔, 맥주 한 잔 사랑한다. 그리고 시간을 거꾸로 놓고, 그 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10년 이상 전부터 처음 술을 마실 때까지 거슬러올라가 그때쯤은 술을 잘 마셨다. 아버지, 오빠, 동생 모두 술을 좋아하고, 그것도 집에서 마시는 술을, 늘 함께 마시고, 술을 잘 먹는 방법도 전수받고, 술 안 취하는 법도 전주받고, 그래서 나는 꽤 잘 마셨는데, 세월에 장사가 없는지 몸이 약해진건지 이제는 음주불능자가 되고 말았다.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 사람구경하기가 힘들다. 대화하는 방법을 잃어버렸을지도, 이래서 안되겠다 싶어 .. 2022. 7. 16.
[요리]하고 해야 하나. 음식이라고 해야 하나 토요일마다 지연이가 오면 요리를 한다. 벌써 세번째 계절이다. 겨울인 2월에 시작해서 봄이 가고, 여름이 될 동안 2번 아니면 3번을 빼고 매주 토요일마다 뭔가를 만들었다. -잠시 딴 이야기 시작- 지연이와 나의 프로젝트, 매주 토요일에 만나 우리가 각자 잘 하는 역할을 한다. 지연이는 그림, 나는 기획 혹은 서포트. 이모티콘부터 그렸다. 땡땡이 무늬 옷을 입은 땡양, 줄무늬 스트라이프 옷을 입은 줄군, 그들의 반려견 밀크, 이렇게 3종의 이모티콘이 거의 완성되어간다. 그리고 전에 다니던 출판사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너구리베이글의 일러스트를 3주에 걸쳐서 그렸다. 오늘 최종 컨펌을 받았다. 프로젝트그룹을 만든 이후 첫 성과다. 욕심을 내지 말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자는 생각으로 잘 해낸 것 같다. 사실 나는.. 2022. 7. 12.
[불면] 자려다 말고 일어나, 홍가슴개미 더는 '나'라고 말할 수 없는 때, 썼던 15년도 더 된 시를 소환한다.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신뢰 내가 신뢰하여 함께 했던 홍가슴개미는 모든 교회가 쉬는 월요일에 사라졌다. 노을이 빨갛게 북향 주방창으로 비껴 들어온 일요일 저녁, 노릇하게 투명한 꿀 항아리 속에 자지러지듯 웃는 꼴로 몸을 돌돌 만 채, 홍가슴개미는 티끌만한 빨간 점이 되어있었다. 나는 방문 틀 나무결 사이, 틈이라고도 할 수 없는 틈을 오가며 먹이를 나르던 홍가슴개미를 처음 본 날 부터 살아 움직이는 것들을 신뢰하기로 했다. 기도를 미처 끝내지 못한 거룩한 일요일 저녁, 나는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한 신뢰에서, 한 점 남김없이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신뢰를 생각한다. 혹, 모든 교회가 쉬는 월요일, 홍가슴개미 따라 내 몸을 돌.. 2022. 7. 12.
[사고] 차 안에 물이 가득 고였다 차 안에 물이 가득 고였다 차를 탈 일이 없다. 안동을 갈 때가 아니면, 차는 아파트 주차장에 몇 달이고, 그냥 서 있다. 좀 전 같으면 어찌저찌 가까운 곳이라도 다녔기에 좀 타고 다녔는데, 그렇게 다니기에는 기름값이 너무 비싸다. 아껴서 살아야 하니까. 지하주차장이 없는 아파트라 그냥 지상주차인데, 하루 이틀이면 차가 너무 더려워진다. 먼지에, 눌러다니는 낙엽에, 비둘기 똥에, 못 봐줄 꼴이 된다. 폐허. 햇빛도 가리고, 먼지도 막고, 적어도 앞 유리창이라도 가리기 위해 반커버를 사서 덮어두었다. 그런데...., 반커버 고정끈 여섯개 중 두 개를 차 뒷문 사이로 끈을 넣어 차 안에서 서로 고정하는 방법이었는데, 지난 2주 내린 폭우, 장마비, 보슬비... 각종 비에 끈을 타고 차 안으로 비가 들어간거다.. 2022. 7. 11.
[갑자기]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이곳에서 살고 이곳에 살고 있으니 이곳에서 살고 그저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태생적으로 역마살이 있어서일까? 일정 시간이 되면 나는 늘 내가 있는 현재를 의심한다. 지금 막 이탈리아 영상을 보다가(사실은 언젠가부터 이탈리아 시골풍경이 그립다. 가보지 않은 곳인데도 그리울 수 있다) 이탈리아가 가고 싶다. 생각하다가 가는 길, 나눠야 하는 대화 등이 부담스럽다. 이젠 귀찮다. 젊지 않으니 이젠 그게 힘들다. 힘들어서 가만히 있는데, 답답하다.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산다고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 지금과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모르는 척 한다. 낮에 지난 주에 이어 성당에 갔었다. 편안했다. 오랫동안 불교신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책에서는 괜찮은데, 절에 가면 종교로 .. 2022.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