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집 남학생 도서관 자료실을 나오려는 참이었다.검은색 점퍼를 입고 휴대폰을 보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어, 너네. 내가 부른 건 '너'가 아니라 그의 이름이었다. 그 남자도 어, 너네. 인사를 했다. 그 남자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우리 집이 아파트로 이사 갈 때까지 살았던 집, 그 앞집에 살던 애다. 우리는 같은 학년이었다. 나는 그가 학생이었을 때의 기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그는 남학생이었고, 나는 여학생이었다. 그때 남학생과 여학생은 서로 존댓말을 쓰며 눈인사만 겨우 했다. 그 남학생을 만난 거다.언제 존댓말을 했는지 까맣게 잊고, 친구처럼 반말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오빠랑 친했던 그의 형의 안부를 물었고, 그는 내 동생과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10년의 업데이트가 필요한 이.. 2026.10.13
-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반년 만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반갑지도, 떨리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전화가 왔네, 싶었다. 전화를 받았고, 잘 지내요? 하고 묻는다.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하면 잘 지내냐고 다시 물었다. 그냥 일상을 산다고 대답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내세요? 하고 그가 물었다. 아침에 되도록이면 늦게 일어나 물 한 잔 마시고, 점심 먹고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밥 먹고 강아지 산책시키고 잔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안동에 이사 온지 두세달쯤 되었다고 했다. 어제는 친구랑 구미 산에 다녀왔고, 매일 저녁 친구랑 술을 마신다고 했다. 잘 지내고 계시네요.진심으로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제 저녁에도 감자와 산책하며,요즘은 음식점들이 즐비하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저녁산책을 가는데,.. 2026.10.12
- 내가 아프다 한들 그보다 더 아플까 잘 있었다. 지난 봄 봉정사 만세루에 오빠 등을 달았었다.절에 등을 단 건 처음이었다. 새들이 울고 가을꽃이 피었다.바람이 불어 조금씩 흔들린다.저 멀리부터 가까이까지 산들이 첩첩이 다가오고 있다.좋은 곳이다.그럼 됐다.영산암에서 21배를 했다.무엇을 빌어야 할지 몰라 어수선하게 절을 했다.절을 하면서 부처님과 눈을 마주칠 때,이젠 당신에게 절을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당신에게 기도를 하는 것이 괜찮습니다.그렇게 소원이 아닌 말을 건넸다.거리낌이 없었다.봉정사는 좋은 절이지만이제는 오빠가 있는 곳이다.오빠는 대웅전이 아니라 만세루에 있다.그곳이 오빠에게 어울린다.스물여섯살 오빠에게는 바람이 바로 마주치고, 새가 옆에서 우는, 산들이 바로 코 앞에 있는 만세루가 더 어울린다.바람이 또 분다.오빠 연등이.. 2026.10.11
- 청량산 하늘다리를 건넜다 이사를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가계약을 하고, 몇 주 지나 그 계약을 내가 파기했다.가계약금 500만원은 포기했다. 설명하자면,그 집에 하자들이 있었는데, 건설사에 그것들을 신청해서 보수를 해나가면 된다고 했지만,아무리 생각해도 꽤 많은 하자들을 해결해나가고 싶지 않았다.하면 할 수야 있겠지만 그걸 감수하면서 그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내게 맞지 않은 집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제는 내게 맞지 않은 것들을 견뎌낼 자신이 없어진 것 같다. 난 겁이 없는 편이고,시작을 하면 끝은 나는 거지, 라고 늘 생각하는 편이었는데 말이지. 난 이제 겁이 많아졌다. 부동산에 계약을 포기한다는 전화하니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500만원은 쓰렸지만, 뒷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한 일들이 자연스레 생.. 2026.10.10
- 오늘 아침, 우우탄탄(吁吁歎歎)하다 아침부터 내 머릿속에 등장한 단어가 탄식이라니, 그 자체로도 탄식이다. 이 단어가 마음에 안 들어, 탄식을 부정하고, 내 마음을 드러내는 더 정확한 단어가 있을 거라며 단어들을 탐색했다. 내 안에 있는 단어가 부족한가 싶어 사전을 들춰보았다. 탄식歎息: 한탄하여 한숨을 쉼. 또는 그 한숨. 역시 별로다. 나는 내가 한탄하여 한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부정적이고 청승맞다. 유의어들을 찾아보았지만 '탄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어로는 groan 고통으로 신음소리를 내다.sigh out 탄식하며 말하다. 갈수록 태산이다. 난 그 정도가 아니다. 그저 눈도 뜨기 전에 탄식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에 두둥하고 떠서 사라지지 않은 것 뿐이다. 아침부터 나를 이런 단어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단어.. 2026.10.08
- 가을 텃밭의 안부 어느새 풀들이 기운을 잃었다. 지난 달 9월초에 봄에 심어 여름까지 키우고 거두었던 토마토와 오이를 걷어낸 자리에 배추모종과 무씨를 심었더랬다.하얀 한랭사를 덮은 배추는 무사히 잘 자라고 있고,한냉사 없이 그냥 심고 뿌린 배추모종과 무싹들은 무사한 것도 있고 , 간간이 벌레들의 공격을 받은 것도 있다. 벌레받이.벌레가 먹을 것이 충분하도록 그 배추, 그 무는 그냥 그대로 둔다. 사실 김장배추가 많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처음부터 쌈배추와 무잎을 요량으로 넉넉히 심었었다. 무잎은 완전 싹이 아니고, 완전 자란 것도 아닌 상추만큼 자란 무잎을 뿌리째 뽑아 쌈 싸먹기도 하고, 겉절이도 한다. 사람들은 무잎을 어떻게 먹냐고 하지만 무잎의 특유의 냄새를 좋아한다. 이번 추석에는 고기를 구우면서 그 옆에 버터를 .. 2026.10.05
- [체호프] 인간이라서, 인간인 걸. 9월에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의 단편들을 읽었다.체호프의 단편이 현대단편의 시작이라고 한다.나는 이번에 처음 읽었다.그 사실을 요즘 알았다. 체홉의 희곡과 희곡집을 좋아한 내게 체홉은 극작가의 이미지가 컸다. 다를 것이 없겠지만, 희곡에서 보이는 번뜩이는 유머와 위트가 단편들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써내려간 것이 느껴진다. 체호프가 만들어낸 꽤 많은 인물들을 만났다. 이번에 읽은 단편선을 기준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들을 꼽자면, 퍼뜩 세 인물이 생각난다. 에 나오는 의사남편 오시프 그리고 그의 아내인 올가.올가, 그럴 수가 있어. 그런 올가를 두고 보는 남편도 그럴 수 있지. 화가, 좀 그렇지만 그럴 수 있지. 표트르 주교님.어릴 적 만났던 보좌신부님이 .. 2026.10.01
- 강아지 양치를 시키다 신뢰를 생각했다 요즘 하루에 두번 이상 감자양을 앉혀놓고 양치를 시킨다. 오늘 아침 양치를 시키다가 '신뢰'라는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나를 신뢰하고 있구나. 나는 너늘 신뢰하고 있구나. 감자양은 11월 20일이면 네살이 되는 강아지다.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있게 되면서 키우기 시작했는데, 아들이 내게 선물을 한 강아지다. 내가 키우지 못한 아들은 왜 내게 감자양을 데려다 놓았는지,감자양을 가끔 물끄러미 보면서 아마 너가 없었다면 먼 곳으로 떠나 긴 여행을 하고 있을런지도 몰랐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감자양은 뿌리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내게 한 곳에 머무르게 하는 존재 말이다. 어느 날, 저녁 아마 술 한잔을 한 듯한 목소리로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일년에 한 두번 올까말까한 아들이 다녀간 바로 다음주였다. '감자.. 2026.09.24
- 새벽에 깬 날 캄캄한데 잠이 깼다. 꿈에서도 도배장판과 냉장고와 세탁기를 고민한 것 같다. 꿈이 기억이 난다. 생각을 그만하자고 꿈 속에서도 생각했다. 괜히 화장실을 가 불까지 켜고 입을 헹궜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방으로 돌아와 보니, 캄캄한 것은 암막커튼때문이긴 하다.암막커튼 틈사이로 제법 환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아직 자고 있는 감자때문에 커튼을 열지는 않고, 침대 끝에 앉았다. 불면때문에 일년이 넘게 커피를 끊었지만,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새벽이니까 괜찮을거야, 커피가 있을리가 없다. 뒤적거렸더니 베트남 G7가 있었다. 탈모예방으로 두피에 커피마사지를 할까 싶어 사둔 커피인데, 뜨거운 정수기 물을 받아 베트남 G7을 타서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감자는 이게 무슨 일이야 싶은 눈으로 나를 본다. .. 2026.09.23
-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도서관 자료실, 누군가의 책상 옆 자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누구인지를 보기 위해서다.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누군가의 책상 위에는 뒤집어놓은 책의 표4,'연금투자야말로 평범한 사람들이 부자가 되는 확실한 방법'처음 눈이 간 곳은 여기다.연금.요즘 내가 꽤 많이 생각하고 있는 말이다.그 옆에 읽은 곳을 가리마 삼아 거꾸로 뒤집혀 있다. 그래서 제목이 있는 표1이 내쪽에서 잘 보인다.이런 책이 있나보다. 안동 어디에서 근무하는 지방직 공무원인 모양이다. 88년생은 몇 살이지?2026-1988=?아니, 나보다 스물한 살 어리면?서른여덟, 아홉 즈음이겠네.그런데 벌써 연금투자로 부자가 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거네. 대체 나는 그 나이에 뭘 한거지? 아니, 난 그때 인생의 가장 큰 산을 만신창이로 넘고.. 2026.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