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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일기] 적당한 밥

by 발비(發飛) 2021. 10. 29.

눈을 뜨자마자 홀린듯 밥을 했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밥이 떨어진 것을 어제 알았고, 

십년 넘게 이십년 가까이 냉동실에 늘 얼려둔 밥이 있었던 탓인지 모른다. 

늘 있었던 것은 있어야 했나보다. 

 

2주전 안동에 다녀오면서 엄마가 주신 햇쌀과 친구가 준 완두콩을 섞어 밥을 했다. 

아주 오랫동안 언제 만들어졌는지, 

땅에서 나온 건지 공장에서 나온 건지 느낌조차 없었던 잡곡밥이 아니라 낯설었다. 

 

설레기도 했다. 

올 가을까지 땅에 뿌리를 내고, 햇살을 잎으로 받으며 여물었을 생명.

 

냉동실에 얼려둔 시래기(이것도 친구가 준 거)로는 쌀뜨물을 뽀얗게 받아 심심하게 된장국을 끓이고,

지난 여름 끝 정선 여행 중 시장에서 산 참나물은 참기름을 듬뿍 넣고 볶았다. 

완두콩밥은 4인분을 해서 여섯개의 그릇에 나눠 냉동실에 넣고, 한 그릇쯤은 따로 덜어 밥공기에 담았다. 

식사 준비가 끝났다.

싱크대 위에 된장국과 참나물볶음과 밥을 나란히 놓았다. 

 

......

......

 

그저께 로스팅 자격시험때 로스팅한 에디오피아 아리차 내추럴을 늘 하던 것처럼 20그램 그라인더에 넣어 갈고, 

물을 끓여 드리퍼 린싱을 하고, 

잔을 데우고, 

다시 물을 끓여 갈아놓은 원두를 아주 천천히 내려 잔에 담아 책상으로 왔다. 

 

드라마 인간실격 OST는 어느새 쇼팽의 피아노곡으로 넘어가 있었다. 

 

끼니 준비를 하고는,

그것들을 싱크대에 나란히 두고는, 

시험때 볶은 아리차가 전에 볶은 것보다 화사한 꽃향이 그다지 나지 않은 것이 속이 상했다. 

며칠 더 지나 가스가 좀 더 빠지면 괜찮아지려나 떫떠름만 마음만 가득이다. 

 

며칠째 맛나게 먹었던 사과조림 고르곤졸라 또띠아피자. 계란 또띠아가 과했는지, 

어제는 속이 좀 니글거려  굴러다니는 우동사리를 꺼내, 

떡볶이를 만들어 두 끼 나눠먹었다. 

 

등 뒤에서 싱겁게 제법 잘 끓인 된장국은 점점 식어가는데

커피를 한 잔 더 내리고 토띠아에 치즈 듬뿍 올려 굽고 싶은 마음은 뭔데.........., 

 

서양인도 아니면서

서울사람도 아니면서

안동사람도 아니면서

 

매일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 적당한 밥이 없다. 

그렇더라도 '절망'을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절망이 벤치 위에 앉아 있다

 

자크 프레베르

 

 

광장의 벤치 위에 

어떤 사람이 앉아

사람이 지나가면 부른다

그는 외안경에 낡은 회색옷

엽궐련을 피우며 앉아 있다

그를 보면 안된다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

그가 보이지 않는 양

그냥 지나쳐야 한다

그가 보이거든

그의 말이 들리거든

걸음을 재촉하여 지나쳐야 한다

혹 그가 신호라도 한다면

당신은 그의 곁에 가 앉을 수밖에

그러면 그는 당신을 보고 미소 짓고

당신은 참혹한 고통을 받고 

그 사람은 계속 웃기만 하고

당신도 똑같이 웃게 되고

웃을수록 당신의 고통은 더욱 참혹하고

고통이 더할수록 더욱 어쩔 수 없이 웃게 되고

당신은 거기 벤치 위에

미소 지으며 꼼짝 못하고 앉는다

곁에는 아이들이 놀고

행인들 조용히 지나가고

새들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가고

당신은 벤치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당신은 안다 당신은 안다

이제는 다시는 이 아이들처럼 

놀 수 없음을

이제 다시는 조용히 

이 행인들처럼 지나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이 새들처럼 

이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나아갈 수 없음을 

당신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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