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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주절거림] 11층에서 본 거리

by 발비(發飛) 2021. 10. 27.

-잠시 딴 소리부터-

 

제목, '11층에서 본 거리' '거리' 가 아니라 뭔가 다른 적당한 단어로 바꾸고 싶은데 단어가 없다.

아파트의 동과 동사이의 공간은 마당도 아니고 광장도 아니다.

네모 라인에 딱 맞게 주차된 차들이 빈틈없이 채워진 주차장,

주차된 사이로 선이 없는 투명하고 좁은 길, 길이 아닌 곳으로 사람들이 다닌다. 

차들 사이로 사람들이 다니며

그 공간은 하늘과 연결된 직육면체의 투명 상자다. 

 

이곳을 부를 이름이 없다.  

오래된 노래, '이층에서 본 거리' 

그 '거리'라는 말이 이뻐서 그냥 '거리'라고 해 본다.

 

-잠시 딴 소리 끝-

 

11층에서 본 거리의 사람들은 5센티미터이다. 

701동에서 막 나온 사람과 703동 앞에서 차를 타려고 하는 사람이 다정한 이웃으로 하나의 유기체로 보인다. 

물론, 그 사이에 택배트럭에서 막 내린 기사아저씨도 하나의 다정한 움직임으로 연결되어 있다. 

 

큰 키 작은 키에 상관없이 5센티로 보이는 사람들처럼 큰 차 작은 차 모두 그저 10센티로 보이는 차들도 

복도에 나란히 놓여있던 초등학교 신발장의 신발들처럼 다정하다. 

채송화만한 나무들이 바람에 날린다. 

 

이사를 들어올 때 확장공사를 한 베란다 덕분에 책상에 앉으면 모두들 다정한 701동 702동 703동, 801동 802동 803동 사이의 거리를 한 눈에 본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려 마시고

어제 미뤄둔 설거지를 하고

불을 켜기 싫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빙빙 돌다 여섯시에 다시 잠이 들었다. 

 

그저께 밤에 잠깐 다녀간 친구는 거의 2년만에 본건데, 나가면서 '살 좀 쪄' 했었다. 

 

살도 좀 쪄야지. 

먹어야 힘을 내지. 

 

그제 본 넷플릭스의 '나디야의 초간단 레시피'에서 본 '계란버섯또띠아'를 만들고,

 

사과를 씻어 껍질을 벗기지 않고 씨만 파내 잘랐다.

껍질을 씹을 때 따딱하고 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11층의 유일안 경쾌함이다. 

 

새벽에 마시다 남은 커피도 챙겼다. 

 

-잠시 또 딴 소리-

 

에디오피아 모모라, 아리차보다 더 화사한 맛인데, 

황금 프로파일을 가지고 있는 아리차와 같이 로스팅을 했음에도

배출할 시간이 되어 꺼내야 해, 꺼내야 해 하면서도 20초를 꾹꾹 참은 뒤 로스팅기에서 꺼냈다.

꺼내고나서도 빠르게 냉각하지 않고, 천천히 좀 더 익으라고 시간을 끌었다.

아그트론이 4정도 낮아졌다.

왜 시간을 더 보낸 것이지? 뭘 기대한 것일까?

아리차보다 더 화사하다는 모모라, 화사한 맛은 아득하고 스타벅스의 잠을 깨우는 커피맛이 되어버렸다. 

1킬로그램을 로스팅했는데, 진짜 모모라는 어떤 맛일까? 

 

-잠시 또 딴 소리 끝-

 

영양이 골고루인 또띠아와 껍질이 아삭하게 씹히는 사과와 각성효과가 제대로일 것 같은 커피를 마신다.

그리고, 지지난 주 출간되지마자 사 둔 한강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몇 페이지 읽는다. 

5센티의 사람들과 10센티의 차들과 채송화 같은 나무들을 내려다본다.

 

땅의 높이에서 살고 싶다. 

 

나는 대지가 내 허리를 받쳐 주고 나를 지탱하여 주고 나를 들어 올려 주고, 나를 밤의 공간 속으로 운반하연 주는 것을 느꼈다. 나는 커브를 돌 적에 수레에 우리를 착 달라붙게 하는 그 중력과 같은 중력으로 내가 지구에 착 달라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 기묘한 엄체와 그 견고함과 그 안전함을 맛보었고 내 육체 밑에 내가 탄 배의 그 굽은 갑판을 느꼈다.  -생텍쥐페리, <인간의 대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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