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맛도 귀찮다.
매운, 신, 단, 짠, 쓴.... 이런 맛들을 느끼는 것에도 에너지가 쓰인다.
담백함을 넘어 바람 맛이라고 할까?
햇빛의 맛이라고 할까?
햇빛을 머금은 모래의 맛이라고 할까?
아파트 앞 야채할머니에게서 자색갓을 한 단 샀다.
싱싱함에 반해 사두고
김치를 담을 것도 아니고, 겉절이를 할 것도 아니고
일단 씻어서 채반에 담아놓고
가진 색이 부럽다. 생각했다.
전을 만들어 색을 지켜주자.
검색을 해 봤더니 갓으로 만든 전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글에도, 유튜브에도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갓전'이다.
나만의 레시피: 목표는 갓을 지켜라
메밀가루 크게 한 숟가락에 물을 반컵쯤 넣어 거품기로 잘 섞고
갓을 길게 잘라 풀이 될만큼만 묻혀 전을 붙였다.
양념간장은 옛날식으로
집간장, 집간장과 같은 양의 물, 식초 조금, 마늘은 가늘게 채치고, 실고추 두어 줄
참기름은 넣지 않았다.
-갓향은 짙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쉽게 사라질 것 같았다.
-밀가루를 넣으면 그 향에 묻힐 것 같았고,
-메밀이라도 그 양이 많으면 무게에 눌릴 것 같았고,
-양념장에 마늘을 으깨넣으면 마늘향에 덮힐 것 같았다.
성공이다.
매운맛, 쓴맛, 단맛, 짠맛, 신맛이 아주 골고루 다 느낄 수 있었다.
갓 잎의 그 오묘한 색이 담은 맛이다.
아주 여린 향들이다.
혹 많이 지친 사람이 있다면 나의 레시피를 권한다.
지칠 땐 맛도 에너지를 앗아간다.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 맛을 먹는 것처럼
그저 온 힘이 빠져 깃털조차 들 힘이 없다면,
아무 맛을 내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길 바란다.
나처럼,
나의 레시피처럼,
갓전은 그제 먹었고,
어제는 찌개를 끓여 밥을 먹었고
오늘은 성공하진 못했지만 순대국에 도전했다.
많이 지친다면, 세상에 없는 갓전을 드시길.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기] 나비를 꿈꾸는 것은 (0) | 2021.11.30 |
---|---|
[일기] 백수의 하루 (0) | 2021.11.10 |
[일기] 적당한 밥 (0) | 2021.10.29 |
[주절거림] 11층에서 본 거리 (0) | 2021.10.27 |
[단순함] 포만 (0) | 2021.10.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