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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단순함] 세상에 없는 갓전

by 발비(發飛) 2021. 11. 9.

 

때로 맛도 귀찮다. 

 

매운, 신, 단, 짠, 쓴.... 이런 맛들을 느끼는 것에도 에너지가 쓰인다.

 

담백함을 넘어 바람 맛이라고 할까?

햇빛의 맛이라고 할까?

햇빛을 머금은 모래의 맛이라고 할까?

 

아파트 앞 야채할머니에게서 자색갓을 한 단 샀다. 

싱싱함에 반해 사두고

김치를 담을 것도 아니고, 겉절이를 할 것도 아니고

일단 씻어서 채반에 담아놓고

가진 색이 부럽다. 생각했다.

 

전을 만들어 색을 지켜주자.

검색을 해 봤더니 갓으로 만든 전은 어디에도 없었다.

구글에도, 유튜브에도 세상에 없었다. 

그래서 '세상에 없는 갓전'이다. 

 

나만의 레시피: 목표는 갓을 지켜라

 

메밀가루 크게 한 숟가락에 물을 반컵쯤 넣어 거품기로 잘 섞고

갓을 길게 잘라 풀이 될만큼만 묻혀 전을 붙였다. 

 

양념간장은 옛날식으로

집간장, 집간장과 같은 양의 물, 식초 조금, 마늘은 가늘게 채치고, 실고추 두어 줄 

참기름은 넣지 않았다. 

 

-갓향은 짙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쉽게 사라질 것 같았다. 

-밀가루를 넣으면 그 향에 묻힐 것 같았고, 

-메밀이라도 그 양이 많으면 무게에 눌릴 것 같았고, 

-양념장에 마늘을 으깨넣으면 마늘향에 덮힐 것 같았다. 

 

성공이다. 

매운맛, 쓴맛, 단맛, 짠맛, 신맛이 아주 골고루 다 느낄 수 있었다. 

갓 잎의 그 오묘한 색이 담은 맛이다. 

아주 여린 향들이다. 

 

혹 많이 지친 사람이 있다면 나의 레시피를 권한다. 

지칠 땐 맛도 에너지를 앗아간다.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 맛을 먹는 것처럼

그저 온 힘이 빠져 깃털조차 들 힘이 없다면, 

아무 맛을 내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하길 바란다. 

 

나처럼, 

나의 레시피처럼, 

 

갓전은 그제 먹었고,

어제는 찌개를 끓여 밥을 먹었고

오늘은 성공하진 못했지만 순대국에 도전했다. 

 

많이 지친다면, 세상에 없는 갓전을 드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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