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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일기] 똑같아-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by 발비(發飛) 2020. 10. 16.

일하다 자료를 보던 중에 어느 신부님 이야기가 있었다. 

...

신부님이 보고 싶었다.

대학을 졸업하고서도 그곳에 갇혀지내던 날들이었다. 

내가 그 답답함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하루에 한 번씩 들른 오락실에서 멍하게 앉아 벽돌을 깨는 것이었다. 

그 멍한 힘으로 하루를 살았다. 

탈출, 그  꿈을, 그 생각을, 떨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때도 오락실 벽돌을 아무도 깨지 않을 때라 그 오락실에 있던 두 대의 고물 벽돌깨기 오락기는 늘 내 차지였다. 

빈 옆자리까지. 

 

어느 날,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 

늘 비어있던 자리에 사람이 있으니 멍~이 안되었다. 

한 레벨씩 올라갈 때마다 잠시 쉬는 동안 멍한 눈으로 옆에서 벽돌을 깨고 있는 사람이 마치 그림인 듯 보았다. 

몇 레벨이 올라갔고, 그때마다 옆자리 그 사람을 쳐다봤고, 그 때마다 그 사람은 나만큼 벽돌을 열심히 깨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레벨에서 그와 내가 비슷한 시간에 단계를 넘어가느라 눈을 마주쳤다. 

정면으로 보니 아는 사람이었다. 

 

보좌신부님!

 

신방을 오셨다가 한번 해보는 중이라고 했다. 

인사를 하고, 나는 힘들어졌다. 

더는 혼자가 아니고, 오락실도 갇힌 공간이 되어버려 더는 그곳을 가지 않았고,

길을 걸었다. 

 

한달쯤..., 마음에도 없는 주말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내려오는데

발비나!

보좌신부님이 부르신다. 

오락실에 벽돌이 없어졌지? 내 사무실에 있어. 

보좌신부님은 벽돌이 깨고 싶으면 돈 안 받을테니 벽돌 깨러 오라고 하셨다. 

두 번 정도 갔었지만, 신부님의 벽돌깨기로는 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신부님, 저는 서울로 갈거에요. 몰래.

언제?

내일.

발비나, 날개가 있어 날 수 있는 거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의기양양하게,  

날지 못하는 신부님은 어쩌나, 약간의 동정을 하면서 신부님 방을 나왔다. 

 

발비나..., 비나이다. 날아오른다는 이때 생긴거다. 

 

그 뒤, 오빠가 먼 하늘나라로 갔을 때 신부님께 화가 가득찬 편지를 썼었다. 

이상했던 결혼을 할 때도, 무지막지한 이혼을 할 때도

날지 못해서 늘 그 자리에 계신 신부님께 화가 가득찬 편지를 썼었다.

십년에 한 번쯤은 되었다. 

 

나는 요즘 벽돌을 깨지는 않고,

하루에 두시간씩 컴에 기본으로 장착되어있는 프리셀을 하고 있다. 

32단계인가 34단계인가, 어쩌면 36단계일수도 있다.

 

구글에서 신부님을 검색해 계신 본당과 메일 주소를 알아내 편지를 썼다.

 

잘 지내시냐고, 

나도 잘 있다고,

갑자기 생각이 났다고,

 

퇴근길에 신부님께 전화가 왔다. 

발비나!

신부님!

거의 20년만이다. 

몇 마디 말을 주고 받자

똑같네.

하신다. 

 

속으로 그랬다.

똑같아요. 나는 매일 프리셀을 하고 있고,

퇴근을 해서 프리셀을 하고 나면, 멍함 끝에 하루가 진정이 된다고.  

 

그림 좋아하시는 신부님께,

우리 팀에서 만든 <모네>와 <클림트> 책을 보내면서

한동안 손글씨를 쓰지 않아서 삐뚤한 글씨로 편지를 썼다.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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