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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이영광] 가을

by 발비(發飛) 2018. 8. 17.

가을


이영광


여름을 용서하는 가을이 없고

가을을 용서하는 겨울이 없고

겨울을 용서하는 봄이 없고

봄을 용서하는 여름이 없지만


겨울을 용서하지 않는 가을이 없고

봄을 용서하지 않는 겨울이 없고

여름을 용서하지 않는 봄이 없고

가을을 용서하지 않는 여름이 없다


여름에게 자꾸 용서를 빌다가는

겨울을 용서할 길 못 찾아 허둥거리는

희끗희끗한 가을이다



어젯밤,

에어컨을 켜기 전에 환기를 시켜려고 베란다 문을 열어두고, 

이사 1주년을 기념하여 추가 리모델링을 할 궁리를 하던 중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히말라야 계곡에서 불었던 빙하의 바람처럼 서늘한 바람이었다. 


비가 내리나 하고 봤더니 바람만 불었다. 

에어컨을 켜지 않고 잤다. 


기억의 한 부분이 사라진 것처럼, 

시간을 뛰어넘은 것처럼,

출근길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가차없이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가을이 올 기미가 보인다. 


여름을 용서하는 가을이 없고


그렇다. 

시인의 말처럼 여름을 용서하고 봐줄 가을은 없다. 

곧 온 세상이 가을 차지가 될 것이다. 

간간히 덥겠지. 


가을을 용서하지 않는 여름이 없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그건 가을을 용서하는 여름의 사인 같은 것이다. 

주말에 물러나지 않는 폭염이 다시 온다면,

9월에도 부채질을 해야 하는 더위가 있다면,

용서하지 못하는 여름을 고개를 돌리 멈칫하며 볼 것이 아니라

느닷없이 다가온 가을을 용서하러 잠시 들른 여름이라 무심히 넘겨 볼 일이다. 


여름에게 자꾸 용서를 빌다가는

겨울을 용서할 길 못 찾아 허둥거리는

희끗희끗한 가을이다


착한 척하지 않기로.

멈칫 하지 않기로.

꾸물거리다가는 코 앞에 겨울이 있을 터이니 말이다.  


만약, 

이 시를 읽지 않았다면,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어젯밤, 

서늘한 바람이 불었던 오늘 아침,

불같이 뜨거워 등을 돌린 이에게 거슬러 올라가 문안 인사를 할 뻔했다. 


딱 제자리에 서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체온을 서서히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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