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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허연] 지독한 슬픔

by 발비(發飛) 2018. 9. 3.


지독한 슬픔


허연


초코바를 빨며 지나가는 비만의 세월을 나는 안다. 

그 지독한 슬픔을


버섯구름의 완벽한 구도를. 기울어진 채 녹이 슬어가는 버려진 철선의 고혹적인 빛깔을. 죽어가는 쿠르드 전사들이 불렀던 사랑 노래를. 전소된 집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변기를. 신장개업 할인 마트 앞 미친 풍선 인형을. 전나무 숲에 널려 있는 치골이 튀어나온 흰 시신들에서 느껴지는 성욕을.


오!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 

지독해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토요일 아침, 묵혀두었던 일을 해냈다. 


지난 해 11월 이사를 할 때. 베란다에 붙박이장을 짜넣었다. 

겨울이 되었을 때, 붙박이장 안에 습기가 가득찼다. 

겨울내내 붙박이장 문을 열어두고, 이틀에 한 번 꼴로 제습기를 돌렸다. 


혹시. 곰팡이가 생길까봐. 

눈에 보이는 곳이 문제가 아니었다.


붙박이장과 원래의 벽 사이의 보이지 않는 공간은

습기가 빠졌는지, 

습기가 고여 물이 되었는지, 

아니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붙박이장 시공을 한 사장님을 불러 전문가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 분은 붙박이장 한 귀퉁이를 잘라보더니, 멀쩡하다 했다. 

손을 뻗어 만져보니, 멀쩡하기는 했다. 

철거를 할지 말지는 나의 결정이라고 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지나고, 엄청난 더위가 있었던 여름이 지나고 있다.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늘 눈이 갔다. 


스쳐갔던 사람들이 준 선물들과 

그들에게 전하지 못하고 보관 중인 선물들과 

엄마에게 물려받은 니트 스커트와 

재작년 무리해서 산 긴 무스탕 코드와 

그때마다 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으로 산 옷들과

오래된 일기장들과 누군가에게서 받은 편지와 여행기념품 박스와 

그 물건들 사이사이에 낀 구차한 이야기들이

아직은 새 것이라 반짝이고 있는 붙박이장 안에 가득하다.


마치, 이런거지.

.

.

버섯구름의 완벽한 구도를. 기울어진 채 녹이 슬어가는 버려진 철선의 고혹적인 빛깔을. 죽어가는 쿠르드 전사들이 불렀던 사랑 노래를. 전소된 집터에서 발견된 깨어진 변기를. 신장개업 할인 마트 앞 미친 풍선 인형을. 전나무 숲에 널려 있는 치골이 튀어나온 흰 시신들에서 느껴지는 성욕을.

.

.

그렇게 치부하고 흩어버리기로 한다. 

네모난 붙박이장 안에 똘똘 뭉쳐 한 덩어리로 있던, 

그 형체는 사라질 것이다. 

형제가 사라지는 순간, 의미도 사라질 것이다. 


나는 붙박이장을 철거하기로 결정했고, 

업체를 소개받아 지난 토요일 이른 아침에 철거를 시작했다. 


문을 떼고, 문틀을 떼고, 선반을 떼고, 벽을 떼어냈다. 

눈에 보이지 않던 곳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양쪽 벽은 이상이 없었다. 

과민일까. 

마지막으로 뒷쪽 벽까지 뜯어내자, 

모서리에 가로 세로 3센티 정도의 거뭇함이 드러났다. 

곰팡이다.


초코바를 빨며 지나가는 비만의 세월을 나는 안다. 

그 지독한 슬픔을


형체 뒤에 갇혀서 피어난 검은 꽃을 보며, 


철거하시던 분도 

나도 안도한다. 


곰팡이가 나와서 안도했다. 


만약 곰팡이가 나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둘 다 무색했을 것이다. 


"정말 잘 결정하셨네요." 

새것이라 아까워서 떼어내지 않았더라면, 올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온통 곰팡이였을거라고 으슥해진 나를 부추겨 주었다

"그렇죠. 어쩔뻔 했어요." 


나는 원래 견적보다 만원을 더 보내서 드렸다. 

붙박이장 철거 비용에, 뭔가 보태고 싶었다. 


텅 빈 공간과 그 모서리에 거뭇함을 본다. 

걸레질을 하고,  그 곳에 앉아보았다. 

바닥과 벽에서 느껴지는 축축함.  

갇혀있던 공간은 달랐다. 


상처난 손에 발라둔 밴드를 떼어냈을 때 같았다. 


토요일 내내, 일요일 내내 그 공간을 들락거리며, 

공기를 잰다. 

갇혀있던 공간과 열려있던 공간의 공기가 같아질 때를 기다린다. 

아직 아니다. 

아직도 아니네 하며, 출근을 했다. 


오! 이미 아무것도 아니어서 쪼갤 수 없는 것들. 

지독해서 측정할 수 없는 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분명하다. 

덩어리진 것을 뿌리채 뽑아 사라지게 하는 일은 슬픔에 가깝다. 

흩어진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고, 

존재하지 않아서 언급을 하는 것조차 허공과 같다. 

생각 속에 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하며 만들어진 물건들 중 일부는 집안 곳곳으로 흩어져 보관하였고, 

지금은 내게 무관한 일에 이어진 물건이나 무관한 물건들은 버렸다. 

무엇을 담았던 그 공간은 담을 것이 없어졌다.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일년을 벼르고 별러 피웠던 검은 꽃조차 

치열하고 지독한 모든 일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 뒤, 집은

지독한 슬픔이 아니라 

.

.

.


지독한 고요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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