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기를.
지금 이 진공관 안에서 끝끝내 중심 잡기를.
당신, 가지도 말고 오지도 말 것이며
어디에도 속하지 말기를.
그래서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너와 내가 아니라 오직 나만
우리가 아니라 오직 나만
나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몰래 숨어산 생이라 들키지 않고 잘 살아왔길.
수많은 너가 나를 까맣게 잊기를.
또 시를 읽다 더 간절한 마음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맞는 순간, 너무 찰라(刹那)라 신(神)이 나의 삶과 죽음을 놓쳐버리길.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느 날은 영원히 사라져버리길.
시인, 시인이라 내 앞에 불러준 너.
시인이 우리라고 묶어주니 조아려 시인의 손등을 두들인다.
사랑이 끓어넘치던 수많은 날들에 함께 한 너를,
제 멋대로 돌던 공전과 자전의 시간 속에서도, 숨이 떨꺽떨꺽 넘어가는 자정에도 함께 했던 너를,
어쩌다 어쩌다
크고 작은 바람 앞에 풍화되어 허공으로 너와 함께 사라져버린 삶,
이미 죽은 삶.
신에게 내 생애가 발각되지 않길.
오롯이 삶.
오롯이 살테니,
살아서도 죽어서도 오직 신에게 발각되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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