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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오현] 아득한 성자

by 발비(發飛) 2018. 5. 28.

아득한 성자


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얼마나 오래전일까?

만해시를 연구하시는 교수님께서 소개시켜 줄 스님이 있다며 함께 가자 했었다. 

그 스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신사동 어느 법당에 들어갔을 때, 

몸을 돌돌 만 듯이 앉아 계시는 분. 

온 몸이 눈인 듯 눈 밖에 보이지 않는 분.

나는 겨우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교수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야기 중에 절로 그 분이 설악산 회주스님이신 오현스님이라는 것도 알았다. 

두 분은 선문답인듯 족히 세 시간 정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내게 눈길을 주셨다. 아득하게 나를 보셨다. 

나는 그 눈을 피했던 것 같다. 

"너는 뭐하냐" 그러셨다. 

교수님이 시를 쓰는 친구라고 했더니. 

스님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자신의 시집에 사인을 해서 내게 주면서 시 몇 편 보내라 하셨다. 

나는 네라고 건성으로 대답했고, 집으로 가서도 스님의 시집을 다 읽지 않았고, 시도 보내지 않았다. 


뭐랄까 처음 만나 스님이었는데, 

그래서 스님에 대한 환상이 강했을까? 

이상했더랬다. 어쩌면 어려서 였을수도 있다. 


두 분의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고, 

밤이 늦어 교수님과 내가 일어나려 할 때,

그 분은 벽장을 가리키며 그 곳에서 쇼핑백을 꺼내오라고 내게 시켰다. 


벽장속 쇼핑백에는 돈이 들어있었다. 

그 돈 중 한 묶음을 교수님께 주면서 스님은, 

너는 딴 생각말고, 공부만 해. 나는 니가 진짜 공부만 했으면 좋겠어 하셨다.

교수님은 손사래를 치다가 결국 그 돈을 받으셨다. 


그리고 잡히는 대로 한 뭉치의 지폐를 내게 내미셨다. 

생각지도 않은 일이라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왜요? 했다. 

"왜요는, 너는 이거 들고 놀러나 가라"고 하셨다. 

나는 그 돈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와 세어보니 이십몇만원...,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이걸 어쩌나 하고 며칠 그 돈을 보았다. 

(오늘 기사를 보니, 문재인대통령도 용돈을 받았다 하셨다. 그분은 그런 분이었나보다. 하고 어떤 마음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어느날, 스님이 주신 그 돈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나는 그때 가난했었다. 

여권을 만드는 것은 당시 내게는 큰 돈이 드는 일이었으며, 그걸 만들어도 쓸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몇 년 후 나는 그 여권으로 인도여행을 가고, 

남미여행을 가고, 

중국을 가고, 

일본을 갔고, 

스페인을 갔다. 


오늘 아침 실검에 오현스님이 떴다. 

입적하셨다 했다. 


오현스님과 그 교수님의 대화, 

주로 스님이 많이 말씀하셨는데, 대부분 죽음에 관해서 여러말씀을 했었다. 

작고 마른 몸을 돌돌 말아 의자 위에 달랑 올라 앉아. 

잘 생긴 이목구비의 가진 얼굴을 위로 하고, 그 중에서 가장 빛났던 눈으로 천정의 한 귀퉁이를 응시하며 죽음을 이야기했었다. 


'죽을 때가 지났다' 하셨다. 

'죽음을 원한다'하셨다


아득한 성자에서 말하신 것처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딱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성철 스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안되던 때라 그런지,

"나도 성철처럼 가고 싶어 따라 해 봤는데 난 늘 죽지 않았어." 

"나는 도 닦는 중이 될 수 없지. 주위에서 돈만 끓지."


누군가로부터 죽음에 관해 들은 이야기 혹은 이미지 중 가장 강력한 시간이다. 

그래서 가끔 죽음을 생각할 때, 누군가의 죽음을 볼 때 오현스님이 아득한 눈으로 말씀하시던 죽음이 생각났다.  

뉴스 기사가 나지 않는 걸 보면 막연히 '아직' 살아계시는구나 생각했었다.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더 이상 더 볼 것이 없었던 큰 스님이 하루살이같은 죽음을 원했다. 

큰 스님에게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죽음 혹은 삶을 아는 자의 죽음, 기다리던 죽음이라면 이상한 말인가?

나는 스님의 죽음이 아버지의 죽음처럼 안도가 된다. 


'죽음'에 관한 시그니처였던 분이 진짜 돌아가셨다. 

오현스님이 입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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