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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박노해] 밤이 걸어올 때

by 발비(發飛) 2018. 2. 14.

밤이 걸어올 때


박노해


너를 알기에는 낮보다 밤이 더 좋았다

네 안의 어둠이 흘러나오는 시간

어둠 속의 야수가 어슬렁거리는 시간

네 안의 상처 받은 아이가 배회하는 시간


하여 나는 인간의 낮보다 밤을 더 사랑했다. 

자정을 넘어서는 지구의 밤길에서 

너도나도 밤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무 울지도 말고 너무 웃지도 말아라


어둠 속에서 가족을 좋아하는 자는

불안의 안개꽃을 들고 귀가하고

승부를 좋아하는 자는

홀로 달빛 아래 칼춤을 추고

돈을 좋아하는 자는

피 묻은 손으로 모래시계를 사리라


마지막 어둠을 밟고 오는 새벽별처럼

나는 그저 묵묵히 떠오르는 빛을 전할 뿐이니


너를 알기에는 낮보다 밤이 더 좋았다.

하여 나는 인간의 낮보다 밤을 더 사랑했다

마지막 남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울며 걷는 자의 눈동자에 마침내 그가 오는구나



여섯시 어둠이 짙다. 

어둠이 더 짙어지고 있다. 


겨울은 어둠에 가깝다. 

그래서 겨울밤은 더 어둡다. 


돈 있는 어떤 이는 겨울이 끝나지 않을 것을 아는 듯

아니면, 봄이라도 온 듯

잠시 웅크렸던 몸을 느닷없이 펴고

이 일 저 일을 마구 벌인다. 

나는 아직도 추워 펴지지 않는 몸을 끌고 그의 뒤를 따른다.


춥다고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 친구는 

동해 바다를 보러 가자는 나의 제안에 

겨울이 너무 길다는 말만 거듭했고, 

나는 러시아 사람들의 굳은 표정이 이해가 간다고 대답했다. 


겨울이 길어지자, 

나는 더는 힘을 내지 못하고, 


오래 전 혹은 얼마 전 한 두 번 만났던 이들조차 그리워,

그들의 연락처에 손가락을 까딱이거나 

레비전에 나오는 남쪽 나라로 떠나고 싶다는 대책없는 생각을 하거나, 


그저, 

을 기다린다.


그러나,

...

어쩌면, 

...


너를 알기에는 낮보다 밤이 더 좋았다.는 시인의 말에


아니, 너를 알기보다, 

나를 알기에는 봄보다 겨울이 더 좋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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