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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최영미] 돼지들에게

by 발비(發飛) 2018. 2. 7.


시가 아니라 말부터 하기로 한다. 


어제 jtbc 뉴스에서 최영미 시인의 인터뷰를 봤다. 

나는 생각했다. 

시인이 말한 같은 곳은 아니어도 같은 조건의 현장에 나도 끼어 있었다. 


1,2년 전 유명 소설가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을 때, (아마 이 블로그에도 비슷한 글을 썼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만 해도, 무엇이 맞는지 모르겠다였다. 

몇 명의 편집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같은 혼란을 겪었다.

문제제기는 맞는데, 그게 맞는 것일까? 

우리는 그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속시원하게 하지 못하고, 그냥 꽤 길게 이야기를 나눴었다. 

분명, 지금 회자되는 말처럼 시인의 손길이, 소설가의 손길이 마치 예술성의 성은이라도 입은 듯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손길이 싫더라도, 그들의 예술작품을 위해, 그들의 영혼에 외부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혹은 그가 발표한 작품들에 온전히 최면이 걸린 채 감동하기 위해  가만히 있었다. 누구나 가만히 있었다. 내 선배 편집자도 그랬고, 어린 시인과 소설가들도 그랬다. 

그때만 해도, 그렇더라도 그렇게까지 까발리는 것은 어쩐지 과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제 최영미 시인이 문단에 팽배한 성폭력에 관한 미투 선언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난 해에 말한 것이 요즘 누군가에 의해 수면 위로 오르고 있다. 

(혹자는 삼성 이재용 회장의 이슈를 돌리기 위한 누군가의 작전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암튼)

똑 부러지게 인터뷰를 하지 못하는 시인이 마음에 안 들었다. 

대중의 언어가 아닌 시인의 언어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었다. 속으로 약올랐다. 그러니까 당신들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잖아요 하고 싶었다. 

최영미 시인의 시처럼 인터뷰를 볼 때보다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나서 머릿속에서 말과 기억들이 엉켜서 맴맴 돈다. 


내가 참석했던 자리들.

그들의 말들.

나의 행동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생각하지 못한 채 보냈던 시간들이지 않았나 생각했다. 

그때가 아니라 지금 보니 그런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게 나쁜 일이었고, 그러면 안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겠다. 

1,2년 전과 달라졌다. 그때와는 달리 선이 분명해졌다. 


비슷한 또래의 편집자와 점심을 먹으면서 같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편집자는 문학 브랜드 출신이고,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했는지 주고 받는다. 

그리고 욕을 했다. 그건 잘못된 일이었다. 피하는 것만이 최선인 시간이었어. 

우리는 세상이 바뀌자 우리도 바뀐다고 웃었다. 

1,2년 전에도 나눴던 이야기인데, 우리는 뭐가 뭔지 기준이 없지 않았다. 분명히 나쁜 놈의 새끼라고 말하고 있었다. 

정말 뒤집어져야 해.

세상이 바뀌고 있나 봐. 좋게. 좋아.

콩나물 국밥 한 그릇을 다 먹고, 일어서며 우리들이 한 말이었다. 



십 오육년 전, 당시 나로서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당시 상담을 받고 있었던, 

신경정신과 의사에게 고민 고민하다 조심스럽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남자들이 자꾸만... . "

그때 그 분의 대답은 이랬다. 

" 혼자 사는 **씨는 남자들에게 주인 없이 길가에 굴러다니는 호박 같은 존재일 거에요. 

그냥 지나가다 심심하면 쿡쿡 찔러보는. 그러니까 반응하지 말고 묵살하세요."

나는 후배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때는 그랬다며, 

나는 현명한 의사의 조언 덕에 남자들에게 상처받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이었다. 

그때 이야기를 듣던 그 여자는

 "엄청 옛날이야기기군요. 요즘 같으면 그건 턱도 없는 여성 비하 발언이네요." 그랬다.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 의사가 여성 비하적 발언을 한 거였구나.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리들은 오래 전이니까 하고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실검 순위에서 최영미 시인이 계속 올라와 있다. 

일을 하다 손을 멈추고, 최영미 시인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본다.


[돼지들에게] 2017년 발표

[괴물] 2005년 발표

 

12년 터울을 두고 태어난 자매처럼 닮았다. 


그리고 두 편의 시 중에서 무엇을 먼저 실을까 생각하다가 2005년에 발표한 '돼지들에게'를 먼저 싣기로 한다. 메인으로 삼기로 한다. 


돼지들, 문단에만 있지 않다. 

여자로 사는 동안 수많은 돼지들을 만났다. 

때로는 더럽기만한 돼지, 때로는 더러운데다 교활한 돼지, 때로는 순한데 할 짓을 다 하는 돼지, 수많은 돼지들. 

그리고 낮과 밤이 다른 온갖 짐승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만났던 것 같다. 


여자는 돼지들을 만나도, 그 돼지가 시인의 말처럼 진주를 달라고 뻔뻔스러웠다.

돼지는 먹은 것이 있어서 다들 멀쩡하다. 

돼지는 기억이 없는 것일까?

나만 기억이 있는 것일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그럼 나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쿨하게... 미친 짓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있다. 

이 일이 나에게만, 문단에만,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본에서 일어나고, 미국에서도 일어나고....

대체, 자각은 지옥일까? 


설국열차, 넘어가야 한다

세상이 뒤죽박죽 엉망인 듯, 여기저기서 뒤엉켜 아수라지만 나는 이 아수라에 동의한다. 

분명 나아지고 있다. 

나아지는 와중에 사람들의 기억이 들추어져 너도 나도 아파 잠을 설치기는 하지만, 나는 이 아수라에 동의한다. 


1,2년 전 그때와는 달리, 기준이 보인다. 


평등!


 



돼지들에게

최영미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하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

그가 가진 건 시장에 내다 팔지도 못할 못난이 진주.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감으로나 쓰이라지.
떠들기 좋아하는 돼지들의 술안주로나 씹히라지.
.

언젠가 몹시 흐리고 피곤한 오후,
비를 피하려 들어간 오두막에서
우연히 만난 돼지에게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몰래 진주를 주었다.
.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

" 진주를 줘. 내게도 진주를 줘. 진주를 내놔."
정중하게 간청하다 뻔뻔스레 요구했다.
나는 또 마지못해, 지겨워서,
그들의 고함소리에 이웃의 잠이 깰까 두려워
어느 낯선 돼지에게 진주를 주었다.
(예전보다 더 못생긴 진주였다)
.

다음날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스무 마리의 살찐 돼지들이 대문 앞에 나타났다.
늑대와 여우를 데리고 사나운 짐승의 무리들이 담을 넘어
마당의 꽃밭을 짓밟고 화분을 엎고,
내가 아끼는 봉선화의 여린 가지를 꺾었다.
.

어린 늑대들은 잔인했고,
세상사에 통달한 늙은 여우들은 교활했다…

나는 도망쳤다.
나는 멀리,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갔다.
친구에게 빌린 돈으로 기차를 타고 배에 올랐다.
그들이 보낸 편지를 찢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2005)




괴물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박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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