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소설 중 나오는 문장들이다.
흉터와 무늬
[출처] 최영미의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개정판이 나왔습니다|작성자 no party
“서럽다는 건, 서러움을 느낀다는 건 받아줄 품이 있고, 비빌 언덕이 있을 때 부리는 앙탈같은 거다.”
"한동안 나는 어디를 가든지 누런 레이스자락을 끌고 다녔다. 우리는 맛있는 것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들에 굶주려 있었다."
“나는 집을 짓지 않았다. 방을 자꾸 바꿨다. 그를 갈아치웠다. 나는 머물지 않았다. 어떤 도시에도 어떤 바다에도 길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쉽게 외울 수 있는 번호를 만들지 않았다. 언제 허물어도 되는 모래 위에 세워진 인생이었다.”
"오래된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아는가?
침묵할 힘이 없으면 잘게 부수어 발설해야 한다.”
“흉터가 무늬가 되도록 나는 사랑하고 싸웠다.
...내 위를 밟고 간 봄들이 유리문 안으로 밀려들었다 빠져나간다. 어떤 빛도 그림자도 머물지 않는다. 사랑은 나를 거꾸러뜨리지 못했다. 아이섀도우를 문지르고 립스틱을 바르고 화장대에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동안에는 어떤 죽음도 어른거리지 않는다. 화사한 분가루에 가려 주름도 손톱자욱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가벼워졌다. 더 가벼워져야겠다.
생성되고 잊혀지고 다시금 발굴된 과거도 지워지리라.
시간의 모래 위에 새겨진 낙서처럼, 해변의 발자욱처럼 이 밤이 지나면 파도에 씻겨질 것을......
스스로 할퀴었던 칼날을 세상 속에 그만 파묻고 싶다. 내겐 더 흘릴 피가 없으니까. ”
-잠시 딴 소리-
얼마전 북경 출장 중에 회사 대표와 이야기를 하던 중, 시와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대표는 오랫동안 문학출판사에서 편집을 하신 분이고,
나는 한때 시를 썼던 사람이다.
대표는 요즘도 최영미 시인이나 최승자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는 예전에는 김수영이나 이상을, 요즘은 허연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둘의 성향이 달랐다.
대표는 감성을 건드리는 시가 좋다고 했고, 나는 서사가 있는 시가 좋다고 했다.
대표는 서사가 깊은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고, 나는 재미있는 가벼운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다.
시인의 시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렵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 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르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 시를 발표할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좋지 않았다.
내게는 그들의 잔치였던 것이다.
오늘 시인의 소설 중 몇 문장을 읽으면, 시인의 소설이구나 생각했고,
출장 중에 대표랑 나누었던 대화도 함께 떠올랐다.
요즘은 나는 문장이 필요없는 소설의 서사에만 맞춰진 이야기들을 찾는 일을 하고 있다.
문장을 읽을 필요없이 줄거리가 어떤지, 인물이 사건 속에 어떻게 움직이는지 동선만 중요하다.
몇 개의 대사만 있으면 된다.
각색과정을 거치고도 살아남을 주인공과 사건에만 중점을 두고 작품을 보고 있다.
그런 읽기를 하던 중 만난, 시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모두 멈추었다.
가만히 텍스트들을 보았다.
시인의 소설. 다르다.
나는 시인의 소설 속에 나오는 문장이 좋았다.
어제 블로그에 쓴 말이다.
"그리운 것이 많은 요즘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요즘이다.
진짜 그리움이 많아질, 가을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운 것들을 충분히 그리워해야겠구나.
진짜 그리우면, 거기다 이런 그리움들을 보태면 정말 헤어날 방법이 없을 것이 뻔하다. "
오늘 이렇게 수정했다.
"생각이 많은 요즘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요즘이다.
진짜 생각이 많아질, 가을 겨울이 오기 전에 그리운 것들을 충분히 그리워해야겠구나.
진짜 생각이 많아지면, 거기다 이런 종류의 그리움들을 보태지면 정말 헤어날 방법이 없을 것이 뻔하다."
이 마음에 대한 답을 주듯, 시인의 소설에는
"오래된 고통을 다루는 법을 아는가?
침묵할 힘이 없으면 잘게 부수어 발설해야 한다.”
그리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잘게 부수어 발설해야 한다. 그립다고, 어제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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