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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김경주] 밀어- 몸에 관한 시적 몽상

by 발비(發飛) 2018. 1. 24.




머리카락은 애잔한 풍경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 인체가 하나의 풍경이라면 그 속을 드나드는 사계 역시 하나의 신체에 해당할 터, 우리의 몸을 드나드는 사계에 머무는 머리카락들의 발음을 시라고 불러보는 일에 곧잘 놀라곤 한다. 인체 속에 스며 사는 머리카락의 풍경은 애절하다. 


머리카락은 모태 회귀를 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풍경이기도 하다. 

버려진 머리카락을 데리고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듯이 버려진 머리카락이 머리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버려진 머리카락에 대해 이름을 지어주거나 

자신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향해 새로운 주거지를 제공해주는 세계 또한 드물다. 

시의 세계에서 불가분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심약하고 연연한 처신이 합리적인 사물의 근저를 형성할 수는 없어도,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어떠한 내밀성으로 향한 시원에 닿아 있다는 믿음을 포기할 수 없다. 

이 생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이별하는 머리카락의 세계에 대해 나는 독자적인 원소를 부양하기로 한다. 

그 원소를 어루만지는 일을 시 쓰기라고 불러본다. 

나는 게으르지 않을 것이다.


                             -김경주, [밀어-몸에 관한 시적 몽상] 머리카락 중에서




이사를 한 집 바닥은 폴리싱타일이라고 부르는 하얀색 유광 온돌 타일이다. 

아파트 리모델링을 하면서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 중의 하나인데, 흔히 하는 마루바닥재로 할 지, 아니면 타일로 할 지,

결론은 리모델링의 컨셉이었던 밝고 하얀 집. 그래서 반짝이는 하얀색 타일 바닥이 되었다. 


하얗게 반짝이는 타일.

눈에 걸리는 것, 여기저기 떨어진 머리카락. 

내 몸에서 언제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는 몸의 흔적, 

나도 모르는 사이, 

어쩌면 몸이 밀어내었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몸이 추방한 머리카락. 

결벽증 환자처럼 다이슨 청소기를 들고 틈만 나면 한 바퀴 두 바퀴 집을 돈다. 


먼지통으로 슥슥 사라지는 머리카락.

먼지통 안에 잔뜩 들어있는 머리카락들을 보며, 나는 거울을 봤다. 

내겐 별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다. 


떨어진 머리카락도 

여전히 내 몸에 붙어있는 머리카락도 

고집스럽다, 는 생각이 든다.


성장기이던, 노년기이던 상관없이 일정 속도를 유지하면서 자라고, 

늘 일정량의 머리카락을 몸 밖으로 밀어내며, 

변하는 것이라고는 아주 천천히 노화를 시작해, 

(대머리는 빼자;;;)

어떤 것으로도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페이스대로 하얗게 변색을 한다.  

현대의학은 머리카락을 지배하지 못한다. 

커버에 급급할 뿐 흰머리를 어쩌지 못하고 있다. 


나는 머리카락이 몸이면서 몸의 지배에서 가장 독립적이구나 생각한다. 

김경주 시인은 머리카락이 마치 몸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 


인체 속에 스며 사는 머리카락의 풍경은 애절하다. 


'인체에 스며 사는'

그렇구나 시인의 말처럼 몸이 아니라 몸에 스며사는, 몸이 아니기도 한 것 같다. 

만약 머리카락이 몸이라면, 컷트처럼 외부의 힘이 머리카락의 일부를 잘라내고, 

탈모로 하루에 수백, 수천 개가 떨어져 나간다면 몸이 견딜 리가 없다. 

몸이 아닐 수 있다.


애절하고 애처로움이 이런 머리카락에 대한 설왕설래 자체가 되고 만다. 

이렇게 규정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은 슬픈 풍경을 만들어 낸다.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볼 때의 마음처럼.


머리카락은 모태 회귀를 하지 못하는 이미지의 풍경이기도 하다. 


시인은 모태라고 언급한다. 

모태, 머리카락의 모태는 몸인가? 

품어준 적이 없는 몸. 

몸인 적이 없는 몸.

이탈하는 순간, 돌아갈 곳이 없는 몸.

누구도 찾지 않고, 회복시키고자 하지 않는 몸.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버려진 머리카락에 대해 이름을 지어주거나 

자신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향해 새로운 주거지를 제공해주는 세계 또한 드물다. 


여기에 이르면, 

나는 머리카락에서 생각이 벗어나 나를 포함한 인간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시인도 '시'를 불러들인 걸지도)

사람의 존재가 이렇기도 하니까 말이다. 


사물이 사람이 될 때, '시'다. 


이 생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과 이별하는 머리카락의 세계에 대해 나는 독자적인 원소를 부양하기로 한다. 

그 원소를 어루만지는 일을 시 쓰기라고 불러본다. 


하얀 타일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에 눈이 가고, 

눈이 머물고, 생각이 머무는데, 애매했다. 

그러다 혹시나 하고 들춘 시인의 시집이 아닌 시적 몽상집 [밀어]

나는 이를 통해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 


머리카락이 시에 이르자, 

나는 인간과 머리카락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둥근 머리에 머리카락이 심어져 있는 것처럼 동그란 지구에서 태어나 두 발을 디디고 산다. 

그리고 누군가는 짧게, 누군가는 길게 머무른다. 

영원은 없다. 

내가 없으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사람 곁, 

혹은 내가 없으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회사도 

내가 떠난 것과 상관없이 아무런 변화가 없다. 

바닥에 떨어진 그 많은 머리카락을 청소기로 쓸어내고 본 거울 속의 내 모습이 그대로이듯, 

내가 살다가 떠난 수많은 자리들은 모두 같은 모습으로 그 곳에 있다.  

어느 날 내가 아버지처럼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세상은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같은 에너지로 움직일 것이다. 


머리카락이 모태회귀가 불가능하듯,

몸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 머리카락의 새로운 주거지를 마련해 주지 않듯, 

수년을 머물던 우리가 살던 자리들, 혹은 수십년 머물던 이 지구가 우리의 모태일 수 없다. 

결국, 누구도 나의 모태일 수 없다. 


그래서 몸에 스며사는 머리카락이 애절하고, 

지구에 스며사는 인간이 애절하다. 


스스로에게 연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지금 이 생각을 하는 동안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버린, 나와 나와 같은 모든 사람들을 다독여야 한다.  

가난한 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시적 시선이다. 


...


거울처럼 하얗게 반짝이는 타일 위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대하는 마음이 좀 가지런해 질 것 같다. 

마음이 나아졌다. 




 

- 딴 소리-


머리카락.

머리카락은 한 올?을 부르는 건가? 

머리카락이 모여있는 머리카락은 똑같이 머리카락인가?

둘 다 머리카락인데... 영어로 헤어라고 하는 말이 머리카락인거라면... 

좀 다른데 싶다.

말의 뜻이 부족한 것인지, 

말이 없는 것인지, 

숲과 나무는 말이 달리 있는데,

머리카락과 

머리 전체를 덮으며 머리카락이 모여있는 머리카락들을 규정하는 단어가 없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 딴 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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