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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조희창] 중남미

by 발비(發飛) 2006. 5. 4.

1. 문명의 실종(칸쿤,치첸이챠)

 


기근인지 전쟁인지 질병인지 원인을 알수 없는 이유로 8 세기 말에서 시작된 마야 문명의 쇠락은 10 세기 초에 이르러 회복불능에 빠지게 된다. 몇몇 명맥을 유지하던 나머지도 차츰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는 밀림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드디어 16 세기에 이르러 스페인이 들이닥침으로 그나마 남아있던 마야인들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아무도 큰 마을과 도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옛 왕들의 이름이라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마야의 시인이 칠람-발람이라는 책에다 이렇게 썼다.
" 누가 예언자인가. 누가 신의 대리인인가. 누가 저 알수 없는 상형문자를 해독해 줄것인가."


달라스를 출발한 비행기가 카리브해 연안의 최고 리조트라고 하는 칸쿤에 도착하자 11 월 인데도 화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북회귀선이 바로 머리 위에 있어서 그런 모양이다. 칸쿤이 유명한 이유는 그 도시 자체에 있지 않고 Zona Hotelera라고 하는 리조트 지역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과히 천혜의 리조트 지역이라 할 만큼 그 조건이 좋다. 약 30 Km 가량의 길죽한 섬 형태의 땅한쪽에는 카리브해가 있고 그 앞에 호텔, 그 호텔앞에 길, 길 건너편에 다시 호텔, 그 뒤로 라군이다. 카리브해 쪽의 호텔들은 대부분 1000 실이 넘는 대형 호텔들이고 라군 쪽의 호텔 들은 100 실 미만의 규모가 작은 호텔들이다.

우리는 물론 카리브해 쪽의 하루에 150불 하는 인터콘티넨탈 호텔 건너편에 있는 라군쪽의 40불 짜리에 방을 잡았다. 그래도 라군이 바로 앞에 남실대는 수영장도 있고 야자수 그늘 밑에 테이블이 있는 레스토랑도 있다. 밤이 되면 건너편 대형 호텔들의 네온 불빛이 정말 장관이다. 그쪽에서야 밤중에 카리브해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이곳 라군쪽의 불빛이야 희미할터이니 전망이 별로일 것이다. 그뿐인가. 호텔 바로 옆에는 골프장까지 있다.

그런데 이 골프장이 생긴게 좀 별나다. 홀들이 지그재그로 있는것이 아니라 그냥 일렬로 1 번부터 9 번까지 그다음에는 길 건너서 일렬로 10 번부터 18 번까지 반대로 이어져 있다. 땅이 그렇게 생겼으니 할수 없겠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드나들 때 전망이 그만이다.


이틑날 리셉션에 가서 이것 저것 알아보는 중에 치첸이챠를 가고 싶다고 했더니 지금이라도 가능한가 보자며 여기 저기 전화 하더니 됐다고 한다. 이미 출발해서 가고 있는 투어 버스를 중간에서 돌려오는 중이라고 한다. 싼값에 비해 버스도 고급이고 조금 험하게 생기기는 했어도 가이드도 있다.

가이드는 치첸이차란 이챠의 우물가라는 뜻이라고 하며 미국인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치킨핏쨔라고 한다면서 농담을 한다. 다행히 미국인이 일행중에 없는 모양이다. 가이드의 잠이나 자두라는 말처럼 잘닦인 길가에는 가도 가도 끝 없이 밀림의 잡목만 우거져 있으니 금방 졸음이 온다. 가다가 민속품 가게에 들러 억지 구경을 하고 유적 입구에 도착하자 호텔에 붙어있는 레스토랑에 데려가 점심부터 먹인다. 각 관광회사에서 데리고 온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하다.


치첸이챠가 유네스코에서 World Heritage Site로 지정 받은 후에는 하루에 많게는 5천명의 관광객이 모인다고 한다. 옛날 건물들이라 그 많은 사람을 오래 지탱해낼까 싶은 생각이 든다.
유적을 보존하자며 지정을 하고 나면 제일 먼저 호텔이 생기고 공항이 생기고 관광버스가 닥친다.

신혼부부인가 싶은 한국사람을 만났는데 여자가 음식이 느끼해서 못먹겠다고 좋은 방법이 없느냐고 묻는다. 언제 왔느냐니까 그저께 서울에서 왔다고 한다. 여행 오래도 하겠다. 리이가 매운 고추를 간장같은 소스에 섞어서 먹으라고 말해 줬다. 부페 점심을 먹는 동안 민속 무용단이 들어와 호이 호이 하면서 물이 가득한 글라스를 머리에 얹고 춤을 잘도 춘다.


치첸이챠는 7 세기에 융성한 구치첸이챠와 10 세기에 전투부족 톨테카와 융화된 제 2 기의 마야 톨테카 문명으로 나누어 진다. 비의 신 챠크 몰과 날개 달린 뱀의 신 쿠쿨칸이 서로 뒤섞인 것이다. 이 호전적인 군사국가도 한동안 영화를 누리다가 13 세기 초에 다른 마야족에 의해 멸망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치첸이챠는 다른 이챠의 왕조들과 함께 연합형태를 취하면서 그 중심 역활을 하였으나, 결국은 서로간의 불협화로 그 끝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연합국의 하나인 이즈말의 두목이 치첸이챠 임금의 부인을 납치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두 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서로의 안면, 이해관계에 따라 나머지들도 적당한 쪽에 붙었다. 마야의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셈이다.

이즈말 쪽의 마야팡 왕이 아가멤논이 되고 아킬리스 같은 멕시칸 용병들을 고용해서 치첸이챠를 깡그리 휩쓸고 말았다. 이것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후세의 로멘티스트들이 만들어 낸 이야길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시점이 마야팡이 새로이 그 지역의 중심역활을 하기 시작한 시기와 같다는 점이다.


유적 안으로 들어가면 한눈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거대한 건축물이 나온다. 마야를 소개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피라미드형 신전으로 스페인어로 그 이름을 엘 까스티요라고 해서 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1 년을 표현하는 사방의 계단이 너무 가팔라서 올라갔다 내려올 때는 중간에 길게 드리워 놓은 동아줄을 잡고 엉금 엉금 기어 내려오는 사람들도 많다. 줄을 잡지 않더라도 지그 재그로 조심 조심 내려오는 것이 만수무강에 지장없다.

여긴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독일인이 피라미드를 풀쩍거리며 내려오다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겠다. 무슨 사고나 위난당한 이야기만 있으면 꼭 독일인이 빠지지 않으니 독일사람들이 여행을 많이들 다니는 모양이다. 떨어져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시내버스에서 몽땅 털린 사람도 독일인, 웅덩이에 미끄러진 사람도 독일인, 신발 닦고 100 불 뺏긴 사람도 독일인 이런 식이다. 누가 독일인을 좋아하든 지 싫어 하든 지 하는 이유로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성위로 올라가 전망 좋은 곳을 차지하고 포즈를 잡으니까 리이 아줌마가 위험 하다며 꽥하고 소리를 지른다. 나보다 더 뒤에 있던 사람들이 막 웃으면서 뭐래는데 독일어이다. 독일사람들 니들 조심하는게 신상에 좋을껄, 아줌마를 어이 보고. 성위는 높아서 주위의 웬만한 유적은 다 보인다. 동쪽에는 전사의 신전이 천개의 석주가 있는 뜰에 둘러싸여 있다. 그 반대편으로는 재규어의 신전, 구기장, 신전에 바쳐진 제물의 해골을 모아두는 곳등이 있다. 남에는 수녀원과 천문 관측대가 있고 북으로는 밀림의 한 가운데 성스러운 샘이 있다. 그리고 그 뒤들은 끝없이 펼쳐진 밀림의 바다가 있을 뿐이다.


재규어 신전옆으로 길게 뻗어 운동장이 하나 있다. 여기가 바로 마야인들이 공을 가지고 경기를 하든 구기장이다. 길이는 150 미터쯤 되고 넓이는 50 미터쯤 된다. 양쪽 끝이 아니라 중간의 벽에 농구 골대 링 만한 크기의 석제 링이 옆으로 매달려 있다. 생고무로 만든 공을 손을 쓰지않고 먼저 그곳에 많이 넣는 팀이 이기게 되어 있는 게임이라고 한다. 운동장은 어디에서 소리를 질러도 둘러 싸고 있는 벽의 공명에 의하여 다 전달된다고 한다.

공놀이를 해서 지는 쪽의 주장은 목은 잘려서 해골전당으로 보내고 심장은 신전의 제물로 바쳐진다고 한다. 남미인들이 축구를 할 때 죽자 살자 하는 연유가 그런 역사와 연관이 있나 싶으다. 또다른 설에 의하면 이기는 팀 주장이 신전에 보내진다고 하는데 믿기 어렵다. 그래서야 시합이 제대로 될리가 없을것 같다.


1502 년 어느날 스무명이 넘어 보이는 인디언들이 탄 카누가 온두라스 만에 있는 동쪽 섬을 향하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배 한쪽에는 차양아래 추장이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물건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밝은 색의 무명 옷감, 돌로 만든 칼, 날카로운 날을 붙인 목검, 카카오 열매, 작은 도끼, 작은 구리종들이 그 물건들이었다. 목을 밧줄로 묶인 채로 노를 젔고 있는 사람들은 노예들이었다. 섬에 도착하면 그쪽 사람들에게 노예들은 물건과 함께 팔려 갈 것이었다.

앞을 보고 가던 인디언 하나가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그는 여러번 이곳으로 와 보았으나 그렇게 큰 암초를 셋씩이나 본적이 없었던 것이었다. 조금 지나서 그의 동료 하나가 더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는 그 암초들이 움직였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추장은 말없이 손짓으로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추고 있는 노예들에게 노를 저어갈 것을 명령 하였다. 가까이 가자 그 섬들은 거대한 주발이 반쯤 물에 잠긴 모양을 하고 꼭대기에는 높직한 나무 등걸들에 줄들이 걸려 있었다. 사람의 모양을 한 것들이 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저들은 사람인가, 신인가?

위에서 줄사다리가 내려오자 용감한 추장이 오르고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움직이는 섬 안의 사람들이 무어라고 말을 하였으나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로 놀란 표정을 짓고 쳐다보며 옷도 만져보고 장신구를 자세히 들여다 보기도 했다. 추장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배안의 물건을 가져오게 하여 이를 내어놓자 저쪽에서도 진기한 예물을 추장에게 전달 하였다. 저쪽의 추장인 듯한 사람이 손짓 발짓을 하며 추장에게 물었다.

"나는 콜롬부스라고 하오. 댁은 뉘시요?"
"마이얌"
대답을 한 추장이 부하들을 돌아보고 웃으며 말했다.
" 저 냥반이 콜롬부야에서 왔다고 해서 나는 마야에서 왔다고 했다."


이 우연한 마야와 서양의 조우가 있은 지 9 년이 지나 일단의 스페인 사람들이 마야의 해안에 발을 디디게 되었다. 그들은 아직 정복자가 아니라 난파한 선박의 조난 선원들이었다. 몇주 동안의 갈증과 굶주림에 허덕이던 그들에게 인디언들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따뜻한 물로 몸을 씻게 해주었다. 그리고 인디언들은 신께 감사의 제사를 올리며 상태가 괜찮은 조난 선원 하나를 초청하였다. 제전이 절정에 이르자 선원은 눕혀지고 가슴이 쪼개진 채 심장이 꺼내어져 제단에 바쳐졌다.

나머지는 감금된 채로 잘 먹여지고 축제가 있을 때마다 하나씩 불려 나갔다. 그들 중의 한명만 이웃부족으로 팔려가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그는 그곳의 전투대장이 되어 가정도 이루게 되고 완전히 마야문화에 동화 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스페인 부대에 의해 구조 되었을 때 처음에는 스페인어를 한마디도 못하였다. 그리고 그의 동료들에 대한 기억도 전혀 살려 내지 못하였다.


스페인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현지인들에 대한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들의 인간 이하 취급에 가장 분노한 사람들은 마야인 본인들도, 인권주의자들도 아니고 선교사들을 위시한 성직자들이었다. 그들은 고국의 본원에 이를 알리고 국왕에게 탄원서도 올리며 이들의 참상을 막아 보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그들조차도 이 심장 꺼내기에는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

정치에 영향력을 미칠 수있는 고위 성직자들의 명령으로 이 악마에 속속들이 물든 가엾은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사제들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악의 상징인 우상들은 다 파괴되었고 신전은 불태워졌다. 이상한 문자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모든 책들과 기록들은 불태워 지거나 없애 버렸다. 그나마 귀족 계급에서 상형 문자를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소수가 있었으나 이의 사용을 철저히 금하였다. 스페인어를 배우고 기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에게는 후한 상이 주어졌고 마야어를 쓰는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처벌이 내렸다.

불과 몇년이 지나지 않아 마야는 사람들에게 깡그리 잊혀지고 있었다. 그나마 발견 되지 아니한 역사의 흔적들은 대자연이 이를 덮고 사람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게 밀림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마야의 운동장 한 복판에 서서 손벽을 쳐본다. 지나가든 멕시코인이 웃으며 제단에 올라가 가슴이 열리고 싶냐 한다. 저 자에게 영광을 베풀라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영광을 사양하고 한쪽 귀퉁이로 물러섰다. 공놀이 할때야 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데 시합뒤에 그 뒤풀이를 너무 심하게 하면 문명이 소멸될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을 해본다.

축구 경기끝에 전쟁을 한다더니만 아마 이곳 사람들의 핏속에는 아무리 없앨려고 해도 유구한 전통이 흐르고 있는 모양이다. 하늘에는 콘도르 몇 마리가 빙 빙 날아 다니는 것이 보인다. 설마 내가 제전에 오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야 아닐테지. 너무 높이 떠 있어 그런지 참새만 하게 보인다.

" I'd rather be a sparrow than a snail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I'd rather be a hammer than a nail
Yes I would, If I only could I surely would" ( Simon & Garfunkle의 El condor pasa중에서 )

 

중남미 2. 잃어버린 세상(티칼)

 

칸쿤을 아침 여섯시에 출발하였는데 티칼을 가는 입구의 플로레스에 도착하니 밤 열시이다. 하루만에 삼개국을 거쳐온 셈이 됐다. 벨리즈의 입출국은 짧은 시간에 많은 비자fee를 내는 것이 억울 하였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과테말라 국경에서 한국여권을 가지고 있는 나는 입국 스탬프를 주지 않는다. 여기까지 고생 고생하며 우여곡절 끝에 왔는데 비자가 없다고 입국을 안 시킨다니 무슨 날벼락인가. 이민국의 책임자에게 찿아가 불법체류같은 짓 않을 사람임을 땀 흘리며 설명하니 후덕하게 생긴 아줌마가 스탬프를 쾅 찍으며 관광 잘 하란다. 난 언제나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다고 리이한테 자랑를 해 주었다.


플로레스에 도착하니 늦은 시간인데도 마중나온 사람들이 꽤 있다. 숙소 안내인, 환전상, 투어 소개사 등등. 티칼행 투어가 아침 다섯시에 출발 하니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모닝 콜을 신신당부한 후 자정쯤 잠자리에 들었다. 자는 도중 너무 시끄러워 눈을 뜨니 새벽 세시밖에 되지 않았다. 소음의 원인은 에어컨인데 우리 방에 있는 것만 끄도 해결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지은 건물이 중간에 둥그렇게 공간을 두고 안쪽으로 구식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어 거기서 나는 공명의 소음이 독일 전차부대가 폴란드에 기습작전 하러 가는 것만 같다.

샤워도 오래 오래 하고 화장실도 걸핏하면 들르고 컵라면도 끓여 먹고 온갖 짓을 해도 시간이 남는다. 시간이 다 되도록 연락이 없어 나가 보니 리셉션 총각은 바닥에 자리를 깔아놓고 한밤중이다. 어제 저녁 몰래 포로노 비디오를 보는 눈치드니 피곤하신 모양이다. 깨워주니 허둥지둥 방방이 다니면서 사람들을 깨운다. 모닝 콜이 아니고 모닝 노크다.


플로레스에서 티칼은 40 킬로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유적에서 일출을 보리라 했는데 적도 부근이라 그런지 가는 도중 해가 일찍 뜬다. 잠깐이지만 밀림의 수풀 너머로 붉고 찬란한 빛의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티칼은 마야 유적 중에 가장 규모가 크고 마야문명의 영광을 가장 감명깊게 석탑들이 표현해 주는 곳이다. 10 세기 이후로 쇠퇴의 길을 걸어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있든 곳을 19 세기 중반 멘데스 대령이라는 사람이 마야사람 엠부로시오 툿의 도움으로 발견해 내었다. 유적이 있는 곳은 16 평방킬로 정도인데 주민들이 살든 작은 집에서 부터 거대한 신전, 궁전에 이르기 까지 3000 여개의 건물이 있다 한다.

표지판을 따라 올라가면 제일 먼저 대광장이 나오고 그곳에 사원 1호와 사원 2호가 마주 보고 있다. 대광장의 한쪽은 귀족 계급이 살고 있든 곳이기도 한데 안은 비좁고 습기가 차서 들어 가기가 싫다. 왕년의 영화는 어디로 가고, 박쥐나 동물들이 사는지 벽에 분비물 같은 것이 희끗거린다. 사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아주 높은 편으로 다리가 긴 사람이라도 한참 들어 올려야 되겠다. 마야인의 평균 신장이 150 정도였다는 데 신전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키 큰 사람들만 뽑았던 모양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무덤인 것에 비하여 마야의 피라미드는 신전의 제단이다. 이곳에 있는 신전은 귀족내지 지배계급이 제사 지내는 곳으로 제단에 바치는 피도 아무거나 하면 안된다. 반드시 왕족의 것이어야 하는데 다른 곳처럼 심장을 통채로 바치다가는 몇 안 되는 왕족이 쉽사리 씨가 마를 일이라 다른 편법을 생각해 내었다. 왕의 피는 가오리의 등뼈로 페니스를 찌르고 왕비는 용설란 가시로 혀를 찔러서 거기서 나오는 피를 제례종이에 받아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종이를 태워 신에게 바쳤다. 심장을 꺼내는 것 보다야 훨씬 낫지만 신경이 밀집한 곳들이라 왕족 하기도 쉽지 않았겠다.

중요한 곳에서 핏방울 뽑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왕들의 이름에는 잎사귀 같은 재규어, 새의 발톱, 티칼의 숙녀, 동물의 해골, 두 빗살의 달, 어두운 태양, 삐뚜러진 코, 폭풍의 하늘 등이 있었다. 음운 둏고 풍류 하나니.


대광장을 나와 사원 4 호쪽으로 가니 밀림 속에서 거대한 피라미드가 우뚝 솟아 있다. 사원 4호는 근 70 m 의 높이로 고대 중앙 아메리카에서 가장 크고 높은 건물이다. 돌계단으로 오르내리다가 사람들이 많이 떨어져서(특히 독일사람들이) 옆으로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래도 가파르기 짝이 없다. 꼭대기에 올라보니 사방으로 밀림이 지평선의 끝까지 펼쳐저 있다. 그러니까 여기가 마야의 가장 중심 부분이 되는 셈이다.

마야인들은 신이 세상을 만들 때 십자가 형으로 펼쳐 놓고 그 끝부분에 나무를 심었다고 생각 하였다. 그리고 그 사방의 나무를 각 홍동, 흑서, 남황, 북백으로 표시 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도 나무를 심었는데 그것을 신의 눈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신의 눈동자에 앉아 있는 셈이 된다. 마야의 신은 인간의 생피로서 강건해진다. 신이 강건하여야만 인간을 도울 수 있으므로 마야인들은 부단히 제물을 신에게 바쳐야만 하였다. 특히 이곳 세상의 중심에 있는 신은 가장 중요하므로 그 행사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제단에 바칠 산 제물은 주로 전쟁 포로나 고아가 된 아이 또는 선택의 영광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 피라미드를 오르내리다가 자빠지는 사람들은 주로 영광을 입은 부류라고 생각하면 틀림 없을 것 같다.

이 사원 4 호는 신전의 제단 기능 이외에도 천문대 역활도 하였다. 밤마다 천문학자들이 올라와 아무런 발달된 관측기구도 없이 육안으로 별을 보고 연구 검토하였다니 놀랍기 그지 없다. 우주의 본질에 대한 지식을 어느 정도나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별하나 나하나 수준은 훨씬 뛰어 넘은듯 하다. 중국인이 만든 음력으로는 4 년에 한달이라는 시간의 오차가 있고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그레고리 일력도 4 년에 하루라는 오차가 있다. 그런데 마야인이 사용한 금성 월력으로는 6 천년에 하루의 오차가 생긴다고 한다. 너무 길어서 잊어버리고 시간을 바꾸지 않아도 문제가 없겠다. 만 이천년 될 때 이틀을 바꾸면 되니까.

도대체 그 사람들은 어디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었을까. 학자들은 아주 오래전 베링해협이 육지였을 때 사람들이 걸어서 그곳을 건너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그런 우수한 사람들이 올데 라고는 한군데 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언제 조용한 아침의 반도에 살든 사람들이 농기구를 팽개치고 유목민이 되어 여기로 내려 왔을꼬. 그때 어째 우수한 종자들이 너무 많이 와 버린거나 아닌지....


마야 최대의 사원에서 엄숙한 시간을 보내고 근근히 내려와 또 다른곳으로 나아 가는데 표지판을 누가 돌려 놓았는지 가는 길이 이상하다. 분명히 닦아 놓은 길임에는 틀림 없는데 어찌 인간이 밟아 놓은 흔적이 희미 하기만 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풀벌레의 소리는 커지기만 하고 숲속에서 부는 바람조차도 싸늘해 지기 시작한다. 유타칸 반도 한복판의 밀림에서 길을 잃은 모양이다. 아침에 들어올 때 보니까 안내 표지판에 길 조심 하라는 당부가 여러번 있든데 딱 우리가 걸리고 말았다.

밀림 속에는 재규어를 위시하여 맥, 멧돼지, 원숭이, 나무늘보, 온갖 뱀, 사슴 같은 맹수가 있다든데 야단났다. 사슴도 맹수? 사슴도 뿔을 들이대고 공격하면 맹수 못지 않을까 싶다. 원숭이도 우습게 보이지만 나무를 타고 휙 휙 나르는 품이 보통이 아니다. 더구나 멀리서 울부짖는 소리가 황소 울음소리보다 더 우렁차다. 아마 자기들 끼리 영역을 표시하기 위하여 내 지르는 소리 같은데 이상한 원숭이 둘이 땅으로 침입을 하니 더 화가 나는지 씨근거리는 소리가 천식을 오래 앓은 환자 같으다.

마야에 있어서 원숭이는 원래 신과 같이 사는 신의 심부름꾼이었다. 신의 명령을 인간들에게 전달 하고는 하였는데 인간들이 신의 말씀을 가벼이 알고 실천을 않으니 점점 목소리를 높여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가 보다. 원숭이가 어디에 있나 살피는데 나무 가지위에 낫같이 생긴 부리를 가지고 검정색과 오렌지색이 뒤섞인 새가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다. 저것이 바로 투칸새인 모양이다. 사슴과 원숭이도 벅찬데 투칸까지.


그런데 짐승을 보고 놀라기는 하지만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과테말라는 반군도 많다든데 잘못 잡히면 랜섬(몸값)도 없는 주제에 꼭 산 제물이 되기가 십상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체 게바라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를 하고 올껄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도 반군을 만나면 체가 어쩌고 피델이 저쩌고 하며 너스레라도 떨겠는데 정작 정부의 진압군을 만나게 되면 할말이 한국의 어느 Has been 유명인사 며느리 이야기 밖에 없으니 그것이 문제이다.

반군 진압의 대장을 맡았든 대령은 겨우 몇십의 반군을 잡아 내기 위하여 몇천의 농부들을 죽이고 이렇게 말 하였다. "나는 조국을 위해서 이 일대 전체를 묘지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면 스스름없이 이를 행하겠노라". 어디서 비슷한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강철같은 의지를 가진 대령은 그의 신념을 밀고 나갔고 결국은 그는 대통령까지 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Butcher"라 부르고 있다.

잃었던 길을 되짚어 허겁지겁 나오니 인기척이 들린다. 다행히 반군도 아니고 진압군도 아니다. 그냥 왔다 갔다하며 소란을 떠는 관광꾼들이다. 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서 내려 가니 허물어진 피라미드를 잘 재건한 유적이 나오는데 표지에 El Mundo de Perdido라고 적혀 있다. 잃어 버린 세상. 까딱 잘못 했으면 잃어버린 세상 근처에서 세상을 잃어 버릴 뻔 하였다.


거대한 피라미드도 보고 세상도 다시 찿고 나니 나머지는 그저 그만 저만한 돌더미가 여기 저기 쓰러져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이렇게 머리에 뭘 많이 들여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유구한 역사도 반나절이면 거의 다 파악이 되고 시큰둥해 지는 가 보다. 내려 오는 길은 여유가 있어 그런 지 주위의 수목을 살펴 보는데 도무지 알만한 나무가 없다. 키카 큰 나무에는 이상한 털복숭이 풀들이 달라 붙어 있기도 하다.

눈에 익은 나무가 있어 자세히 보니 아마폴라 나무다. 호주에서도 저런 종류의 나무가 있는데 여름인 12 월이 되면 열매고 잎이고 모두 붉은 색갈을 띄고 있어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트리라 부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아마 5, 6 월이면 그런 색깔을 낼 법하다. 수액이 몹씨 독한 성분의 알코홀 맛이 난다고 하든데 그래서 그런지 나무 밑을 지나니 황홀한 기분이 든다.

" Amapola
My pretty little poppy
You're like that lovely flower, so sweet and heavenly
Since I found you
My heart is wrapped around you
And loving you it seems to beat a rhapsody

Amapola
The pretty little poppy
Must copy its endearing charm from you
Amapola
Amapola
How I long to hear you say ' I love you' " ( Jimmy Dorsey의 색소폰 연주 Amapola에 붙인 노래말 중에서)


 

 

3. 마귀와 천사(벨리즈,체투말)

 

 

멕시코의 국경 도시 체투말에 도착하니 네시가 넘어 있었다. 티칼을 출발한 것이 일곱시였으니 아홉시간이 걸린셈이다. 돌아오는 길에도 벨리즈에서는 꼬박 비자fee를 챙긴다. 불과 몇 시간 지나 가는데 또 거금을 내려니 가슴이 쓰리다. 그래도 미리 비자를 받아온 일본 사람은 10 불이나 더 냈다니,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 까지는 아니라 해도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듯 하다.
꿍얼거리는 것이 찍혔는 지 세관에서도 짐검사를 유독 나한테만 한다. 어렵게 관문을 통과하고 나오니 이번에는 운전기사가 오지 않는다. 과테말라 쪽 매점에서 아가씨랑 시시덕 거리더니 밥이라도 먹고 오는 건지. 땡볕에서 기다리는데 모두들 참을성이 많다. 궁시렁거리는 거는 우리 둘뿐인 것 같다. 일본 여자아이랑 홀랜드 아가씨는 벌써 죽이 맞아 벨리즈 시티에서 스노클링할 모의에 정신이 없다. 밥먹고 잠까지 자고 왔는 지 얼굴이 불콰해서 나타난 기사가 빨리 가잔다. 듣기에 우리가 늦장을 부린 것 같아 죄송하다.

벨리즈 시티에 도착하니 같이 온 사람들이 다 떠나고 승객은 우리 둘만 남는다. 잘한다는 중국 음식점을 물어 물어 찿아가니 볶음밥을 푸짐하게 주는데 맛이 기 막히다. 벨리즈가 영령 온두라스 시절인 1970 년대에 타이완 사람들이 대거 이민 왔는데 이제 완전히들 자리 잡은 모양이다. 곳곳이 한자 간판이 눈에 뜨인다. 거나한 점심을 먹고 미니버스의 보조의자를 내리고 침대를 만들어 누워서 오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아까 기사에게 불평을 품었든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체투말의 버스 정류장에서 툴룸 가는 버스편을 보니 두어 시간이 남았다. 근처의 대형 수퍼에 가서 구경도 하고 간식거리도 샀다. 멕시코 돈이 더 있어야 할 것 같아 현금 인출기에 가서 돈을 꺼내려니 쪽지에 알 수없는 스페인어만 찍혀 나오고 돈이 나오지 않는다. 다른 곳에 가도 마찬가지다. 당황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 보니 우리 구좌에 잔고가 한푼도 없다는 이야기다. 잔고가 없다니? 현금이나 트래블라스 체크가 위험할 것 같아 필요할 때 조금씩 꺼내 쓸려고 충분히 입금해 두고 카드만 가져 왔는 데 잔고가 없다니.

어마어마 하달 수는 없으나 일일 예산을 100 불 정도로 잡고 예비비 까지 계산 했으니 적다 할 수도 없는 금액이다. 거창하게 80 일간의 세계일주랄 거는 없지만 그래도 80 일간의 좌충우돌이 시작하자 마자 무산되는가 싶으니 눈앞이 캄캄하다. 어제 저녁 인터넷 까페에서 호텔예약을 하며 카드를 꺼내 놓고 왔다 갔다 하는 사이 누가 정보를 빼내 간 것인가 싶다. 하루에 10 불을 애낄려다 전 재산을 날렸는가 보다.
칸쿤의 그 좋은 호텔은 직접가면 50 불이고 인터넷 예약을 하면 40 불을 받는다. 비밀번호를 쓴 적은 없지만 도대체 금융 사기범 치고 천재 아닌 자가 어디 있든가. 리이는 벌벌 떨면서 ' 당신 어떻게 된거야'만 되뇌이고 있다. 옛이야기가 생각난다


아주 어릴적 대구에서는 서쪽으로 나가면 커다란 우시장이 있었다. 한번씩 그 곳에서 장이 서면 장관이었다. 수없이 많은 소,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 천막안에는 간이 주점들이 서고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풍각쟁이, 광대들은 온갖 재주를 보이며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그 사이를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시골에서 한 할아버지가 소를 팔러 그곳을 왔다. 저녁이 되어 술이 거나해서 집으로 돌아간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불렀다.
" 할마이, 할마이. 오늘 소장에서 깍쟁이한테 소 일가뿐 사람들 억수로 만터라"
가슴이 철렁한 할머니가 물었다.
" 우리 소는요?"
" 우리 소? 우리소는 초장에 휘뜩했지"
과년한 딸은 그해 가을에도 시집을 못갔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상황에서 호랭이 담배 묵던 시절의 농담이 생각 난단 말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럴 때 일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자칫 허둥대다가는 또 다른 사고가 생기기 십상이다. 사실은 이미 오늘 새벽에 다른 사고가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짐을 챙기며 보니 카메라가 없어진 것이었다. 숙소가 가까운 곳에 있어 돌아가 보니 그 곳에도 없었다. 전날 인터넷 까페다, 기념품 가게다, 식당이다 하며 다녔으니 그중의 하나인데 새벽에 문 연 곳도 없을 뿐 아니라 어디쯤 이였는지 확실히 기억도 나지 않았다. 카메라야 싸구려니 그렇다 하지만 안에 있는 필름이 모두 티칼의 유적에 관한 것이라 소위 티칼을 다녀온 증명서를 다 잃어 버린 셈이었다. 그 때도 둘이서 침착하자 침착하자 하며 아무렇지 않은듯 왔는데 또 사고가 생기다니.


마귀는 절대로 혼자서 오는 법이 없다더니 사실인가 보다. 옛말에 마귀는 항상 셋이서 짝을 짓고 온다고 하지 않든가. 여기서 우리가 허둥대면 카메라, 돈 그 다음에는 사람이 다친다 하면서 둘이서 버스 정류장 대합실에서 심호흡을 하며 차근 차근히 의논 하였다. 세번째 마귀에 대처하는 행동강령 그 셋.

하나, 짐을 보관소에 맡긴다. 전화를 하거나 다른 행동을 할때 신경를 그쪽으로만 집중하므로 가급적 몸을 가볍게 가져야 한다.
둘, 버스편을 연장 하거나 내일로 미룬다.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셋, 콜렉트 콜로 집과 해당 은행에 알아본다. 수중의 비상금으로 살아가야 하니 가급적 현금을 아끼자는 의도다.


대합실의 국제전화 연결하는 곳에서는 콜렉트콜이라고 하니 알아들은 척도 않는다.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계획에 없든 체투말 시내 관광을 하는 셈이다. 웬만한 도시인지 큰 건물들도 제법 있다. 우체국은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라 가까운 할리데이 인 호텔로 들어갔다. 프론트에 설명을 하고 콜렉트 콜로 전화를 쓰자고 하니 그러라 한다. 집으로 전화를 해서 아들아이에게 설명을 하고 알아 보라고 하였드니 바로 연락이 왔다. 구좌에 관한 일은 본인 아니면 절대 불가능하니 직접 해야 된다고 한다.

다행히 은행의 직원이 번호를 주며 콜렉트 콜로 하라고 한다 했다. 다시 연결을 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아가씨가 바짝 긴장을 해서 조금 기다리라 한다. 일각이 여삼추가 아니라 억추쯤 되는 기분으로 기다리니 다시 나온다. 지금까지 잔고에는 아무 이상이 없지만 다른 카드가 있으면 그 카드는 정지를 시키자고 한다. 잔고에 이상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 천사의 목소리가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은행직원의 설명으로는 아직 중남미에는 지방 중소도시로 가면 외국의 카드로 현금 인출이 안 되는 곳이 많으니 그럴 때는 은행으로 가서 직접 인출 하라고 한다.

어찌나 고마운 나머지 Thank you 한다는 것이 부지 불식중에 I love you 해버리고 말았다. 내 마음의 마귀가 저 안쪽에서 조소를 보내는 것만 같다. Anyhow, 땡큐, 그라시아스, 메르시 보꿈, 당케 쉔, 스빠시바, 슈크란, 쉐 쉐, 아리갓도, 감사합니다.

"Money, money, money
Must be funny
In the rich man’s world

Money, money, money
Always sunny
In the rich man’s world

Aha- ahaaa
All the things I could do
If I had a little money
It’s a rich man’s world ( ABBA의 Money, money, money 중에서)


 

4. 신의 귀환(툴룸)


툴룸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니 겨우 새벽 세시가 조금 지나 있다. 가급적 체투말에서 제일 늦은 버스 편으로 왔으나 우리 사정을 알 바 없는 운전기사는 최대한 빨리 온 모양이다. 카드는 정지 되고 수중의 돈은 얼마 없고, 별수 없이 대합실 의자에 앉아 밤을 새워야 하는데 아침이 되자면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 길 건너편의 모텔 네온이 유난히 밝고 따뜻해 보인다.
시골 정류장이라 매표소 앞에 의자 몇개 놓여 있고 옆에는 매점도 있는 데, 다행히 그 곳은 문을 열었다. 금쪽같은 돈으로 커피를 한잔 시켜 먹으니 너무 맛이 좋아 혼자서 다 마시고 싶다. 눈치를 챘는지 리이는 자꾸 커피가 마시기 싫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눈물어린 커피를 혼자서 다 마셨다.

조금 있자니 밖에서는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열대에 가까운 지방이나 으스스 하게 춥다. 같이 있던 사람들은 다른 차가 와서 하나 둘 떠나가고. 화장실 앞을 긴 의자로 막아 놓았길래 치우고 갔다 오니 매표원이 손가락을 까닥 까닥하며 부른다. 왜 불을 켜 놓고 나왔느냐는 모양이다. 그래도 쓰지 말라는 뜻은 아닌 것 같아 다소곳이 미안하다고 했다. 젊디 젊은 놈한테. 용이 개천에 떨어지면 깍데기가 덤빈다더니 으허으음.

아무리 의자가 딱딱하고 비가 부슬거려도 결국은 날은 밝는 법이다. 툴룸의 고적쪽으로 가는 첫 버스를 타니 금방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사람의 기분이 이럴까 싶다. 툴룸은 유카탄 반도의 카리브해 중간쯤에 있는 마야의 옛도시이다. 스페인의 코르테스가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치러 갈 때 이 일대를 지나 갔다. 그때 배에 타고 있던 선교사 한 명이 툴룸을 보고 감탄해서 쓴 글이 있다.
" 이곳은 2 마일씩 떨어진 세개의 커다란 도시로 이루어져 있다. 절벽위에 서 있는 성채는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고 그 웅장함이 세빌(스페인의 중세도시 세빌리야)도 이에 미치지 못할 것만 같다".

600 명의 정복자들은 11 척의 배를 끌고 이 땅에 상륙 하였다. 처음 만난 인디언에게 한 사람이 거만하게 말을 걸었다.
" 여기는 어디냐?"
" 이유카타느(넌 도대체 뭐냐)"
그때부터 이 땅의 이름은 유카탄 반도가 되었다.

코르테스가 쿠바의 정복군으로 부터 독립하여 멕시코 정복의 사령관으로 유카탄 반도에 상륙 하였을때 처음에는 마야인들로 부터 심한 저항을 받았다. 겨우 짐승을 사냥하는 정도의 무기로도 마야인들은 신무기를 갖춘 정복군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마야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마야인들은 전쟁을 너무 양반스럽게 치른다는 점이었다. 도무지 잠자는 시간에 전쟁을 치른다는 개념이 없어서 야습을 당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더구나 전쟁을 하다가 추수기나 파종시기가 되면 적들도 당연히 휴전할 것으로 생각하고 병장기를 버린채 논밭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코르테스가 결정적으로 이기게 된 동기는 마야인들 사이에 떠돈 조용한 소문 이었다.


" 케찰코아틀이 돌아 오셨다"
소문을 들은 마야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한 중에도 어딘가 기대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케찰코아틀.
아주 아주 오래전 신들간에 전쟁이 벌어 졌을 때 패배의 분루를 삼키며 떠났든 신 케찰코아틀이 약속대로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케찰코아틀은 마야인들의 신이라기 보다는 멕시칸의 신이었다. 이 멕시코인들의 신이 마야인들에게로 오며 그 이름을 쿠쿨칸이라 하고 날개 달린 뱀의 신이 되었으나 근본을 따지면 같은 신인 셈이다.


멕시코 지방에 아즈텍, 톨텍 문명 이전의 올멕 시절, 그러니까 BC 2000 년 경, 바다에서 이상한 물체가 나타났다. 사람이 노를 젓지 않고도 바람에 의해서 가는 배가 나타났는데 거기에는 얼굴이 희고 큰눈에 긴머리와 턱수염을 길른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그중의 수장인 듯한 인물은 키가 7 척이나 되고 넓은 이마에 좋은 혈색을 가졌으며 머리에는 뱀의 문양이 새겨진 관을 쓰고 있었다.

그는 그냥 나무위나 동굴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을 이용해서 집을 짓는 방법을 가르켰다. 짐승들 처럼 사는 것을 남녀가 짝을 지어 부부가 되고 가정을 이루어 그 집에서 사는 법을 가르쳤다. 걸핏하면 싸움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평화롭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법을 세웠으며 날짜를 헤아리는 방법도 배워 주었다. 그는 자기에게 바치는 산 제물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그것을 금하였다. 정말 사람들이 자기에게 바치기를 원한다면 과일이나 채소, 새나 나비를 바치라 하였다. 그와 같이 온 사람들도 모두들 신이 되었다.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은 어류의 신, 농사를 가르치는 농업의 신, 날씨를 가르치는 천둥의 신등등.

전설 속의 케찰코아틀이 인간에 대한 기여의 방식이나 생활행태가 너무나 사람과 닮아 있어 그가 역사 속에 실존하든 인물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가들도 있다. 그가 어떤 경위로든 사라지고 나서 그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사람들이 그를 신의 반열에 올려 놓았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와 동행의 인물들도 신이라 호칭 되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스승의 개념으로 이해 하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케찰코아틀은 어디서 온 사람 이었을까? 콜롬부스 이전에 그런 긴 항해를 할 수 있었던 집단 중에는 바이킹이 있었으나 그들의 활동시기는 AD 800 년 경 부터이었다. 고조선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으나 별로 항해를 즐긴 것 같지도 않고 얼굴이 틀린다.
BC 2000 년경에 야만에 불과하든 올멕인들이 이미 피라미드를 건설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연히 해답은 이집트인으로 모아진다. BC 2400 년 부터 2100 년 사이의 고대 이집트 왕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자 수세기에 걸친 여러 왕조가 내부의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멸망을 거듭하고 있었다. 파라오를 위시한 귀족 계급은 걸핏하면 유랑의 길로 나서야만 하였다. 이집트의 기자에 서 있는 거대한 세 피라미드는 고대왕국에 의해 건설 된 것이었다. 머리에 뱀의 문양이 새겨진 관은 호루스 신의 후예로 불리워 지는 파라오들만 사용하는 것이었다.

무슨 연유인 지는 모르나 케찰코아틀은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뒤쫓아온 반군이었는 지, 내부의 갈등이었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평화의 신 케찰도 너무나 분한 나머지 다짐을 하며 떠났다고 한다.
" 내가 다시 돌아 오는 날, 하늘은 칼빛으로 뒤덮히리라"

코르테스가 뱀의 문양은 없으나 찬란한 투구를 쓰고 창검을 허공 가득히 세운채 턱수염을 날리며 오는 것을 보고 마야인들은 벌벌 떨었다. 코르테스가 땅을 딛고 서 있을 때는 마치 거인처럼 보였다.
돌아온 신 앞에 누가 감히 맞서리요, 마야인들은 성문을 활짝 열고 신을 영접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신의 일행은 새와 나비는 거들떠 보지도 아니하고 금과 은을 내놓으라 하였다. 마야인들이 가장 값지게 여기는 제이드(푸른 옥)를 바쳐도 그저 시쿤둥 하였다. 금과 은이 없음을 안 코르테스 일행은 마야의 정복을 중단하고 아즈텍 제국을 무너뜨리러 베라쿠루스로 떠나고 말았다.

나중에 몬테호가 나머지 마야를 정복하러 왔을때 마야인들은 극심한 저항을 하였다. 정복자들이 신이 아니라 단순한 약탈자임을 그들도 알았든 것이었다.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의 왕을 체포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의 왕국을 쉽게 정복한 반면에 몬테호는 도무지 구심점이 없는 마야와 상대 하느라 천신만고의 고생을 하였다. 왕도 없고 확실한 지배계급도 없는 마야의 수많은 부족을 하나 하나 상대해 나가는 일은 누구라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마야의 게릴라 전법을 배워 나중에 스페인이 나폴레옹에 점령 당했을 때 써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위풍당당히 쓰러져 있는 툴룸의 까스티요(성)를 쳐다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졸립고 조금 배가 고프다.

" Home is behind
The world ahead
And there are many paths to tread

Through shadow
To the edge of night
Until the stars all alight

Mist and shadow
Cloud and shade
All shall fade
All shall fade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편 중 Pippin의 노래에서

 

 

5. 희망의 나라 암흑의 사람들(마이아미)


론리 플라넷을 보고 리이가 알아낸 호스텔은 마이아미 비치에서 한 블륵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큰길가의 리셉션 건물을 나와 뒷쪽 샛길에 있는 숙소로 걸어 가는데 대서양 쪽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무덥다. 이제 곧 겨울일텐데 웬만한 곳의 여름보다 더 더운 것 같다. 짐을 대강 정리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월마트로 가 퀵 서비스에 필름을 맡겼다. 새 카메라를 잊어 먹고 비상용 고물 카메라로 찍은 것이라 사진이 나올 지 내심 걱정이다.

길을 건너자 상점들이 즐비한 보행자 거리에, 널려 있는 것이 카메라 가게들이다. 쑈 윈도우의 물건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니 세일즈 점원이 나와 안으로 들어 오라 한다. 괜찮아 보이는 카메라를 반값으로 써놓고 있어 흥미가 있어 하자 얼른 1/3 값으로 주겠다 한다. 거기다가 밧데리는 무료로 주겠단다.
출납으로 가서 카드 영수증에 싸인을 하니 점원이 밧데리를 끼우며 너스레를 떤다. 영수증 사본을 넘겨 받아 찌푸리고 보고 있던 리이가 고함을 빽 지른다. 40 불이라더니 왠 400 불 이냐면서. 갑자기 점원이 엉터리 영어를 쓰면서 자기는 400 불로 말했다고 우긴다. 그러면서 밧데리를 뜯었으니 취소를 하려면 밧데리 값을 물란다. 껍질을 보여 주는데 35 불로 적혀 있다.

물어 물어 경찰서를 가니 민원인들이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몇사람 없어 금방 차례가 오려니 했는데 담당 경찰이 젊은 여자랑 수다만 떨고 있다. 여자의 얼굴이 부은 것을 보니 폭력 사건인 모양인데 젊은 경찰과 시시덕 거리며 좋게 한 시간 이상을 버티고 있다. 조급증을 내고 있으니 옆에 있던 노부인이 무슨 일이냐 묻는다. 사정을 듣고 우리 사건은 오래 걸릴 것 같지 않으니 제일 먼저 하는게 좋겠다고 사람들 한테 말해 준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람들이 계속 들락 거리는데 금방 밤무대에 갈 것 같은 사람, 허름한 노숙자 타잎등 온갖 사람이 다 있다. 다들 본관으로 들어 가며 키 넘버를 누르는 걸로 보아 형사들인 모양이다. 타이트한 사이클링 복장으로 들어 오던 사람이 접수의 경찰에게 우리를 가르키며 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꽤 높은 사람인지 접수가 우리를 부른다. 사정을 듣드니 자기들은 명백한 범죄가 아니면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의 말을 한다. 5 불 짜리 밧데리를 35 불에 사기를 치고 판 것이 범죄가 되지 않으면 미국 민주경찰은 지구를 구할 사건만 취급하는 모양이다. 결론은 이정도는 범죄도 아니고 그냥 일상사의 한부분인 셈이다.

장사꾼도 경찰도 신고하러 온 여자도 모두 히스패닉이니 그 테두리에 못 들면 거들떠 보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래 마이아미는 아무래도 My Ami는 아닌 것 같다. Your Ami가 좋겠다. 상점으로 돌아가니 그 점원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출납 직원에게 경찰에 신고를 했드니 우리가 마이아미에 체류하는 동안 해결해 준다더라 하고 나왔다. 며칠간 걱정이나 했으면 좋겠다. 15불 짜리 티셔츠를 일본인에게 1500불이나 받아 먹었다든 인간들이 눈이나 깜짝할런 지 모르겠다. 미스터 프레지던트께서는 자국민들 도덕교육부터 강화했으면 싶다. 제삼세계에서도 부끄러워할 일을 최강국이라는 나라에서 버젓이 저지르다니 할말이 안 나온다.


불쾌한 기분으로 먹은 저녁이 체 했는 지 리이는 밤새도록 고생을 한다. 아침을 먹고 비치 쪽으로 나가니 근육남, 늘씬녀들이 조깅을 하고 있다. 우리 같은 몸짱은 명함도 못 내 밀겠다. 몸이 짱구처럼 생긴 사람이 몸짱 아닌가? 비치가에 있는 집 앞에서 포즈를 잡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있어 물어 보니 베르사체네 집이라고 한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손톱이 다 닳도록 해 온 재봉일 밖에 없는 청년 지아니가 희망의 나라 미국에 온 것은 스물 다섯살 때였다. 그리고 그는 일년 수익이 20 억불이 넘는 패션 제국을 이루고 그 왕이 되었다가 매춘남의 총을 맞은 채 50을 겨우 넘기고 죽었다. 지아니 베르사체가 평소에 호언장담한 말이 있다. " 나는 300 만불을 두 시간 안에 쓸 수 있다". 남은 평생을 벌어도 못 가질 돈을 두 시간 안에 쓰는 사람도 죽음의 사자를 매수할 방법이 없었든가 보다. 지아니 너의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그 많은 돈을 어린 조카딸에게 남기고 빈손으로 가는 것이었든가?


한 시간이 넘도록 오지 않든 시내관광 투어 버스가 와서 늦은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대강 대강 다니더니 리틀 하바나로 가서는 가이드가 여기 저기 삼촌 아저씨 하며 인사 다니느라 시간을 꽤 끈다. 뭐라도 사라는 뜻인 모양이다. 투어를 따라가면 샤핑(?)을 시키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리틀 하바나는 피델 카스트로가 체 게바라와 연합하여 산적같은 바티스바 정권을 무너뜨리고 미국과의 자유선거 약속을 저버리고 독재를 시작하면서 쿠바인들이 망명와서 이룩한 촌락이다. 당연히 빈민굴일 수 밖에 없지만 이 리틀 하바나와 인접한 코랄게블은 마이아미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중의 하나이다. 이름 그대로 산호자갈이 지천으로 깔린 곳인데 이 일대의 땅을 상속 받은 개발업자가 지중해 풍으로 꾸며 놓아 건축학상의 디즈니랜드로 불리는 곳이 이곳 코랄게블이다. 물론 개발업자는 허리케인과 함께 닥친 대공황을 이기지 못하고 망했지만 어쨋든 코랄게블은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코랄게블에는 빌티모아 호텔이라는 곳이 있는데 빌 클린톤이 이곳에서 북중남미 지도자를 모두 모아놓고 서반구에서는 가장 큰 정상회담을 열었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이 빌티모어 호텔에서는 클린톤 보다 더 유명한 사람의 흔적이 있다. 제일 꼭대기층에 '에버글레이즈 스위트' 라는 곳이 있는데 아무도 심지어는 호텔 경영층에서도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다들 그곳을 '알 카포네 스위트' 라고 부르는 곳이 그것이다.


젊은 부부 테레사와 가브리엘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하자, 나폴리 밑의 벽촌에 살든 마을 사람들은 까뽀니 부처가 도로를 금으로 포장한 희망의 나라로 간다고 하며 부러워 하였다. 그러나 부룩클린의 빈민가에 정착한 부부가 밤낮없이 일을 해도 단칸방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넷째 알폰소가 20 세기가 되기 몇달 전에 태어 나고도 부부는 아이들을 어떻게 칼처럼 눕혀서 재우느냐가 밤마다 큰 일과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곳의 유럽 이민자들은 이런 말들을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 우리는 가난하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가난뱅이지 유럽의 가난뱅이는 아니다. 우리에게 자동차는 없지만 그래도 먹을 것 만큼은 얼마든지 있다" .

잘 먹여서 키운 알폰소의 체구는 단단 하였고 주먹은 번개처럼 빨랐다. 알폰소가 열 일곱이 되던 해 미국은 일차 대전에 개입하게 되고 그도 곧 입대 하였다. 제대후 그는 뺨에 있는 상처를 적의 유탄에 맞은 것이라 자랑하고 다녔으나 사실은 술집에서 칼싸움을 하다가 생긴 상처였다. Whatever 그는 이로 인해 Scar face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스카페이스가 그냥 대기병으로 있다가 제대한 군에서 그는 그의 일생을 통한 사업의 이념으로 정한 말을 훈련교관으로부터 듣게 되었다.
" 한정의 Machine gun을 가진 사람이 Pistol을 가진 50 명을 제압할 수 있다."


뉴욕의 식당에서 주급 25 불의 알폰소가 대부를 따라 시카고로 가서 유대인과 아일랜드의 갱들을 정리하고 나자, 그의 월수는 2만 5천불이 넘고 있었다.
그의 휘하의 행동대장에 잭 맥건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다들 그를 ' Jack Machinegun'이라고 불렀다. 잭 머쉰건은 총만 잘 쏘는 것이 아니라 골프공도 잘 때려서 그 수준이 가히 프로급이었다 한다. 한번은 토너먼트에 출전하여 마지막날 기라성 같은 프로들을 제치고 혼자서 언더파를 치며 들어오는데 클럽하우스에서 형사들이 우승을 축하하러 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골프장옆으로 지나가던 화물열차의 연기와 함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프로대회에서 최초로 우승한 갱이 될뻔한 기록도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전국적으로 사업망을 펼친 알 카포네 재벌의 휘하에는 센트루이스의 '이건의 쥐들', 디트로이트의 '보라빛 갱', 아틀란타 시의 '큰울보 호프일당' 등이 있었다.


카포네의 사업이 그야말로 일로번창하여 요즘으로 치면 빌 게이츠 못지 않은 위세를 떨칠 무렵 뉴욕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뉴욕의 책임자는 알이 접시닦이 시절 식당주인이었던 프랭크 예일이라는 자였는데, 황제를 속이다가 맨하튼 앞바다에 떠 오르는 신세가 되었다. 이에 프랭크 예일의 옛동네 시실리안 마피아들이 반기를 들고 알 카포네는 뉴욕 마피아들에게 피의 퇴출이라는 응징을 하였다.
이틈을 타고 시카고의 아이리쉬 갱 잭 모란이 카포네 재벌의 주류사업 영역을 침범하게 되었다. 카포네 회장은 이를 저 유명한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로 제압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적을 깨우고 말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의 여론이었다.


알 카포네의 어린아이처럼 웃는 천진한 얼굴과 언제나 꽃을 들고 다니며 노부인들에게 선물하는 밝은 성품으로 인해 시카고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카포네의 싸움은 항상 갱이나, 부패한 정치인 또는 경찰들과에 국한 되어 있었으므로 대중들은 나쁜놈들 끼리 싸우다가 누가 이기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더구나 알 카포네는 갱끼리의 싸움에 일반 시민이 다치기라도 하면 병원특실로 모시고 병실 가득히 꽃으로 치장하여 주었다. 총질에 망가진 가게는 곧바로 신장개업 수준으로 수리 되기도 했다.

미국에 대공황이 들이 닥쳤을 때 시카고에서 관민을 통털어 실직자들을 위하여 무료 급식소를 연 것도 그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냥 흉내만 낸 것이 아니라 하루에 3,000 명을 먹일 수 있는 수준으로. 그의 그런 처신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그를 최초의 그리고 유일의 깡패영웅으로 대우하여 주었다. 알 카포네 자신도 대중을 사랑한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다.
" 나는 대중의 후견인이다. 사람들의 목마름을 법률로서는 채워줄 수 없는 것 아닌가? 나를 모두 밀주업자라고들 한다. 그러나 트럭에 실려 있을 때는 밀주일지 모르지만 바에서 이를 은쟁반에 바쳐 올리면 그것은 즐거운 환대가 되는 법이다. 혹자는 그것을 금주법 위반이라 하지만 과연 미국에서 누가 그것을 꼬박 꼬박 지키고 있는가?" 그러나 발렌타인 데이의 대학살은 대중이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참혹 하였고 비난의 여론은 비등하게 되었다. 스타의 인기가 시들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 셈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금주위원회의 Eliot Ness와 그의 'The untouchables'들이 카포네의 밀주사업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11 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나온 그에게 기다리고 있든 것은 재기를 도울 부하들이 아니라 탁월한 실력을 갖춘 세무조사관들이었다. 모란 일파가 학살을 당할 때 거기에는 모란의 회계도 있었는데 그의 비밀 회계장부를 입수한 세무당국은 갱들의 비밀자금이 어떻게 흐르는지 소상히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바다 한가운데의 형무소에서 착실한 수형생활과 고질병 매독의 발병으로 그는 출소하게 되었지만 플로리다의 집으로 돌아온 그는 18살 부터 사랑에 빠진 조신한 아내 매이의 품에서 풍운의 세월을 마감 하였다. 살아있을 때는 천문학적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죽고나서 세무당국이 탈세 추징을 하려 하자 한푼도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알 카포네 같은 천재가 가족들을 위하여 재산을 숨겨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하였지만 그의 부인과 아들 쏘니는 생계를 위하여 공장으로 출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고는 오랜 세월이 흘러 동방에서 온 나그네 부부가 알 카포네 스위트 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 Speak softly love, and hold me warm against your heart
I feel your words, the tender, trembling moments start
We're in a world, our very own
Sharing a love that only few have ever known

Wine colored days warmed by the sun
Deep, velvet nights when we are one

Speak softly love, so no one hear us but the sky
The vows of love we make will live until we die
My life is yours, and all because
You came into my world with love so softly love" (영화 대부 1편의 주제가 중에서)


 

6. 제국의 석양(쿠스코)


두통과 어지럼증은 낮잠을 자고 났는데도 여전하다. 코카 티를 수없이 마시고 아스피린을 먹어도 듣지 않는다. 마냥 호텔에만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나오니 중세의 교회가 있는 아르마스 광장이 바로 옆이다. 이 근처 어딘가에 잉카의 궁전이랑 태양신의 사원도 있을 것이다.

태양신 인티가 사람들이 너무 무질서하게 사는 것을 보고 형제자매 8 명을 창조하여 티티카카 호수 근처의 땅속에 묻어 놓았다. 땅의 창인 동굴을 통하여 세상에 나온 그들은 서로간의 싸움이 나서 죽기도 하고 돌로 변하기도 하였다. 형제중에 하나 남은 망코 카팍이 누이동생 마마 오칠로와 북쪽으로 유람을 떠났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계곡을 발견한 망코가 태양신의 금막대기를 꺼내놓자 그것은 금방 땅속으로 사라져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그는 그곳을 땅의 배꼽(쿠스코)이라 명하고 추종자들과 그곳에서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이 아르마스 광장은 지구의 배꼽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부분이 되는 셈이다.

태양의 아들인 초대 잉카 망코는 사람들에게 이 배꼽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길을 열라 명하였다. 길은 태양의 자손 후대에 까지 계속 뻗어 나갔고 그 끝에 네개의 마을이 생겼다. 이민족이 사는 빈한한 동네였으나 그 이름들은 달동네 만큼이나 낭만적인 것들이었다. 소금창고, 황금의 뱀, 푸마의 꼬리, 말하는 광장이 그것이었다. 태양의 아이들은 12 대 까지 내려가고 그 네개의 마을 밖으로 뻗어 나간 제국은 남북으로 4000 Km 까지 길게 내려갔다. 20 개 언어를 사용하는 100 여개의 종족 1200 만명이 하나의 제국아래 한사람의 지배 밑에 하나의 종교를 가지고 하나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 하였다.

In the mean time, 지구의 저쪽에서는 오백년마다 닥치는 종말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독일의 어느 곳에는 핏물의 비가 삼일 밤낮으로 내렸다고 하고 이태리에서는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 교황이 옥좌에 앉은채 공중들림 당했다는 소문들이 눈덩이 처럼 굴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콜롬부스라는 사람이 신대륙을 발견 하였다는 낭보가 들어왔다. Y 1.5 K는 별탈 없이 지나가고 이번에는 콜룸부스가 발견한 신대륙의 남쪽에는 강의 자갈이 전부 금이고 도시 전체가 금과 은으로 지어진 엘 도라도가 있다는 소문이 번져 나갔다.

스페인이 세운 식민마을 파나마에 한 강인하고 사나운 전직군인이 정착하러 왔다가 엘 도라도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의 이름은 프란시스코 피싸로였다. 멕시코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귀족 출신에 잘 교육을 받았던 사람이었던 것에 비하여 피사로는 돼지 농장의 인부 출신으로 처음에는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무식장이였다. 그러나 그의 가슴에 불타고 있는 부와 명예에 대한 야망은 누구 못지 않게 강했다.
그는 소문에 떠도는 금의 도시를 페루라 이름 짓고 페루로 향하여 배를 타고 나섰다. 그는 이 답사 항해에서 지금의 에콰도르 남단 툼베즈까지 내려가 금으로 만든 수많은 장식물을 얻고 카누를 타고 가던 똘똘한 청년 하나를 데려 와서 스페인어 교육을 시켰다. 크나큰 선물에 대한 답례로 그쪽 사람들은 하찮은 장신구와 듣도 보도 못한 역병, 천연두와 홍역을 얻었다.

스페인으로 돌아간 피사로는 국왕 카롤로스에게 노획한 황금을 바치면서 앞으로 벌어들일 재화의 9할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페루의 종신총독이란 자리를 얻었다. 그는 형제들과 함께 180 명의 용감한 군인들과 60 필의 말로 정복군을 편성 하였다.

한편 잉카의 제국에서는 사파 잉카(위대한 수령)인 후이아나 카탁이 후계자의 선정이 없이 천연두로 급사하자 배다른 두 아들이 남 북에서 각기 잉카를 자처하고 나섰다. 3 년간의 싸움에서 형인 아타후알파가 쿠스코에 있던 동생을 격파함으로써 내전은 끝이 났다.
승리에 들떠있는 새로운 잉카에게 급보가 들어왔다. 밤에 잠도 자지 않고 금과 은을 먹고 살며 얼굴은 눈만 빼고 짐승의 털로 덮혀 있는 사람 모양의 짐승이 나왔다는 보고였다. 의기양양해 있던 아타후알파는 이 짐승들에 대한 호기심이 부쩍 일어났다.

통역을 대동한 피사로의 사절이 잉카에게 와서 그를 초청하였다. 통역은 피사로가 제국의 강성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잉카에 대한 흠모의 정이 얼마나 큰지 말로 표현을 못한다 하였다. 마땅히 몸을 낮추고 엎드려 알현하여야 하오나 먼길오며 병이 들었으니 부디 내려와 영광을 베풀어 주십사 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동족의 병사들에게 내려가 소문을 퍼트렸다.
피사로는 벼락과 번개를 치게 하는 물건이 있으며 그의 병사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짐승을 타고 나르는 것 처럼 다닌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지난번의 잉카처럼 무서운 병에 걸려서 죽게 된다고 겁을 주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들의 옛날 왕은 백성을 대신하여 만물의 근원인 십자가를 등에 지고 언덕에 올라 못 박혀 죽었노라 하였다. 이백 삼백의 교꾼을 두고 금가마를 타고 다니는 잉카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아닌가.

한줌의 짐승같은 무리를 구경하러 가는데 무슨 방비가 필요할까 하고 잉카는 군사들을 거의 비무장 상태로 하여 금가마를 타고 내려 갔다. 약속 장소에 당도하자 피사로는 나오지 않고 선교사가 한손에 성경을 들고 성호를 그으며 나왔다.
“이 페루의 땅은 스페인 국왕의 것이고 너는 그의 신하이거늘 어찌 방자히 금가마를 타고 오는가? 어서 무릎을 꿇고 하늘의 축복을 받을 지어다”
잉카가 노하여 성경을 땅바닥에 팽개치자 사방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 싼티아고(전쟁이다)”

번개같은 불빛이 일며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돌알들이 잉카의 병사들에게 날아 갔다. 코에서 풀무 소리를 내는 마흔 여덟 필의 말을 타고 나르듯 기병들이 나가자 병사들은 혼비백산 하고 말았다. 날이 잘 선 칼날이 그들의 목을 사정없이 자르고 있었다. 피사로는 푸마와 같은 날랜 몸짓으로 가마위에 튀어 올라 잉카의 머리채를 잡고 목에다 칼날을 겨누었다. 호위병들이 맨손으로 덤볐지만 피사로 형제들의 칼에 사지가 잘려 나갔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던지 피사로 자신도 동생의 칼에 팔이 베일 정도였다. 병사들의 절반쯤은 같은 편에 밟혀서 죽고 기백 정도는 스페인 군에 죽고 나머지는 도망가고 말았다.

어이없이 포로가 된 잉카는 저들이 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기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큰방 하나를 가득 채울 금을 주겠다고 약속 하였다. 전국의 사원에서 거둬들인 7톤의 금과 13톤의 은을 받고 피사로는 포로의 몸으로도 제국을 호령하는 사파 잉카의 능력을 보고 전율하였다.
명령을 내려 쿠스코에 있는 동생을 죽인 와타활파에게 살인교사죄와 역모죄의 올가미가 씌워졌다. 거대한 제국의 황제는 기독교에 귀의함으로써 쟌 드 아크같은 마녀들이 받던 화형을 면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집행이 있던 날,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와타후알파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돌아서는 터프가이 피사로의 눈가에는 기이하게도 물기가 배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꿈을 꾸던 그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이루게 해 준 그 사람. 그러나 그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만 하는 각박한 운명이 안타까워 피사로는 눈시울을 적셨을까?

피사로의 군사가 180 명이었고 잉카의 직할군사가 3 만이었으므로 단순한 산술계산으로는 피사로가 1당 200 정도의 싸움에서 이겼으므로 인류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명장은 없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아무도 피사로를 영웅이라거나 훌륭한 장군이었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보다도 잉카의 제국을 멸망 시킨 것은 피사로가 아니라 통역 펠리필로의 세치 혀와 48 필의 말이라고 하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편이다.
수백년이 흐른 지금뿐만 아니라 피사로가 평가를 받지 못한 것은 그 당시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페루의 종신총독은 약탈물의 분배와 지배권에 대한 분쟁으로 같이 갔던 동료들에게 독수리처럼 사납던 5형제와 함께 맞아 죽고 말았다.
신분의 차이를 굳건한 의지 하나로 극복하고 대제국의 황제를 무릎 꿀리던 이 대단한 사람도 자국민이라면 주교의 벽도 넘지 못하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 했었는지 궁금하다.

코카티를 너무 마셔서 그런지 자는둥 마는둥 하고 일어나니 어제보다 두통이 더 심해지는 것만 같다. 그래도 유적지를 돌아다니며 심호흡을 하니 조금 나은 듯도 하다. 이러다가 페루 사람들 처럼 가슴이 통짜가 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한번 들이키는 숨에 산소를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서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가슴이 통처럼 생겼다. 큰 상체를 바치고 있는 다리는 짧지만 매우 튼튼하다. 하루만에 숏다리가 더 짧아진게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내려다 보인다.
리이는 샥시우먼의 유적에 가더니 완전히 녹초가 되서 토하고 야단이 났다.
삭시우먼의 성은 북쪽의 외적을 막기 위해 지은 것인데 매일 2 만의 노동력이 70년간 투입된 성벽이라고 한다. 리이의 고산증이 더 심해지고 있어 아무래도 몇 백 미터 아래인 호텔로 내려가 산소호흡이라도 해야할까 보다.

밑으로 내려갈 차를 기다리는 동안 어린 아이들이 사진을 찍으라고 조른다. 사진을 찍고 나면 모델료를 받을 셈인 것이다. 눈이 새까만 두 사내아이가 가만히 보니 쌍둥이이다. 잉카제국에서는 여자가 쌍둥이를 낳으면 성녀 취급을 하였다 한다. 다산을 장려 하였는데 한꺼번에 둘 이상 나으니 황제의 군대나 노역에 크게 기여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요즘은 그렇지 않겠지만 옛날에는 산모가 출산 당일까지 일을 하다가 아무 산고 없이 밭에서 아이를 낳고 탯줄도 직접 입으로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간난 아기를 냇가로 가지고 가 입에 물을 머금어 덥힌후 태아를 씻기는 것이다. 아기는 작은 요람 바구니에 넣어지고 이제 부터는 절대 부모가 품에 안지 아니한다. 버릇이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수유도 아기를 안지 않고 어머니가 작은 요람위에 엎드리면 아기가 젖을 빨게 되는데 아무리 보채도 하루에 세번 이상은 젖을 주지 않았다 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사자새끼처럼 길러지던 아이들이 이제는 길거리에서 관광객에게 구걸을 하고 있다.
서쪽에서는 수풀속으로 사라지는 푸마가 잠간 뒤돌아 보며 날카로운 일별을 보내듯, 두개의 산등성이 사이로 태양이 눈을 찌르는 빛을 보내고 사라졌다.

“ I was born like a lily in the garden
And it is thus I grew
Time has passed and I have grown old
On the eve of departing I wither
And I die” ( 잉카 고시의 영역중에서 )


 

7. 구름 위에서(마추피추)

쿠스코를 떠나 피삭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라 한결 숨쉬기가 수월해진다. 피삭의 재래시장은 일주일에 두번씩 장이 서는데 오늘은 그 중의 하나인 일요일이다. 이 피삭의 market을 가기 위해 쿠스코에서 고산병을 앓으며 버틴 것이 미련스럽도록 장하다.
산간에 사는 사람들이 특산품을 갖고와 물물교환을 하든 것이 이제는 관광객이 더많이 들끓고 있다. 기념품에 눈독을 들이다가는 짐만 커질것 같아 군 감자와 옥수수를 사먹었다. 감자는 안데스 산맥이 원산지이다. 그 종류만 해도 수백가지가 넘는데 해발 5천 미터 이상에서 자라는 감자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그런 건지 아주 맛이 쫄깃쫄깃하다.
마을을 돌아다니다 보면 옛날 잉카같은 복장을 한 촌장을 만날 수 있다는데 우리 한테는 기회가 오지 않았다. 수천리를 호령하던 황제가 이제는 관광객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1 불씩 받아서 챙긴다니 할말이 없다.

쿠스코에서 출발한 성스러운 계곡의 일일투어는 우루밤바강을 따라 유적과 마을들을 순례하는 것으로 상당히 내용이 알차다. 개별적으로 다니다가는 불편한 교통으로 며칠이 걸릴것 같다. 카르카, 우루밤바를 거쳐 올란타이탐보에 도착하니 오후 세시가 되어 있었다. 가파른 경사의 유적계단을 올라 가려니 숨이 턱에 찬다. 그동안 고산증에 시달리느라 몸이 쇠약해진 모양이다. 꼭대기로 올라가니 거석이 여럿 있다. 가이드의 말로는 10x4x1미터의 크기라고 한다. 그런 엄청난 거석을 강 건너편의 산에서 수레도 없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가져 왔는 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라는 설명이다.

이 올란타이탐보는 역참 역활을 하는 요새였다. 스페인군이 잉카의 지도자를 처형한 후에 그의 이복동생이 반란을 일으켰다. 쿠스코의 샥사이우만에서 야습을 당하여 패배한 그는 이곳 올란타이탐보에서 정규전으로서는 처음으로 잉카군이 승리하는 전투를 이끌었다. 그러나 곧바로 곡식의 파종기가 닥치고 병사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 틈을 타서 공세를 편 스페인군에 대패를 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반란수장 망코 잉카는 비르카팜파라는 곳으로 숨어들어 40 년 이상 대를 이어 게릴라전으로 스페인군을 괴롭혔다. 저항세력의 마지막 잉카 투팍 아마루가 1572 년 체포되고 처형되자 투항하지 않은 세력들은 안데스 산맥 깊숙이 숨어들며 훗날을 기약하였다.

올란타이탐보에서 쿠스코로 돌아가는 일행을 배웅하자 모두들 부러운 듯이 내려다 본다. 사실은 별것도 아닌데 단체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베낭 달랑 둘러매고 단독여행을 다니는 걸 보고 가엾게 여기면서도 주눅이 들어 한다. 이럴때일수록 손도 크게 흔들고 씩씩한 목소리로 또보자고 소리를 질러주면 된다. 잘난척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 순간을 놓지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기차시간이 될 때까지 마을을 어슬렁거리다가 역으로 나가려니 2 킬로 정도를 걸어야 한다.
싫다는데도 굳이 걸으면 힘들다고 자꾸 권하는 젊은이가 있어 오트바이에 달린 리어카같은 것을 타고 갔다. 물론 얼마되지는 않지만 리어커 삯은 냈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갑자기 비명소리가 나서 밖으로 가보니 동그란 모자를 쓰고 동그란 몸집을 한 인디오 아줌마가 정신없이 이리 저리 다니며 어쩔줄을 몰라 하고 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짐보따리를 잃어 먹은 모양이었다. 페루의 그 유명한 열차 도난 현장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오랫만에 산골에서 내려와 아이들 입힐 옷가지도 사고 감자, 옥수수도 샀을터인데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관광객들은 모두 역 대합실에 들어와 있지만 현지인들은 야단 맞을까봐 밖에서 서성이다가 그 소중한 보따리를 누가 채가고 만 것이다.

올란타이탐보에서 마추피추 까지는 100 킬로가 되지 않지만 험한 길이라 열차가 속력을 내지 못하므로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린다. 밤에 다니는 열차는 관광객 전용이 아니고 일반 열차라 그런지 좌석이 아주 불편하다. 앞사람과 마주 보고 앉게 되어 있는데 무릎 한번 옮기는데도 상대방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등받이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터인데 아직까지 페루 국영철도에서 그런것 까지 신경을 쓸 정도가 되지는 못한 모양이다.
이렇게 짧은 시간을 가면서도 불만이 가득한데 걸어서 다니는 사람들은 어떨까 싶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잉카 트레일은 보통 2박 3일 정도의 트랙킹을 한다고 한다.

1911 년 어느날 덤불과 잡초로 우거진 잉카의 옛길을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한 사람이 가고 있었다. 그는 중절모자를 쓴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을 가진 젊은 사람 이었다. 그의 한쪽 어깨에는 채찍처럼 생긴 밧줄이 걸려 있었다. 그는 미국의 예일대 교수로 고고학을 전공하는 사람 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수이고 학자이기 이전에 타고난 모험가이자 탐험가였다.
그의 이름은 인디아나 죤스가 아니고 하이람 빙검이란 사람이다. 빙검 박사 이전에도 많은 탐험가들이 전설의 비르카팜파를 차자 헤매고 다녔다. 그들의 목적은 고고학에 있다기 보다 잉카의 패망과 함께 사라진 그 많은 보물의 회수에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제대로 된 비르카팜파를 발견해낸 사람은 없었다.

빙검과 일행이 2 주일간 해멘 끝에 우루밤바의 급류가 흐르는 통나무 다리를 넘어서자 그의 눈앞에 두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마추피추와 후아이나피추이다. 그 봉우리들을 향하여 올라가자 그의 눈앞에 믿을 수없는 광경이 나타나고 있었다. 폐허가 된 성벽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 뒤로는 나무와 그 뿌리에 덮여있는 유적들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안데스의 한 봉우리에서 아메리카를 통털어 가장 훌륭한 유적을 발견한 빙검은 숨이 막히는 듯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400 년 동안 잠자고 있던 잉카의 잃어 버린 도시, 공중의 도시는 이렇게 해서 사람들 앞에 그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하이람 빙함은 죽을 때까지 자기가 발견한 마추피추가 전설의 비르카팜파라고 믿었으나 많은 정황이 그곳은 태양처녀들의 양성소겸 태양신전을 받드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태양처녀란 일종의 궁녀와 같은 것으로 어려서 얼굴이 예쁘고 재주가 많은 아이들을 모아 양성을 한다. 그 역활은 잉카의 궁전에 들어가 첩이 되거나 시중을 드는 부류, 요리나 직조등에 재주를 보여 그 방면으로 가는 부류, 마지막으로 후배 태양처녀를 교육하는 부류로 나누어 지게 된다. 아무래도 잉카의 주변에 있게 되면 황후까지도 될 수있지만 잘못하면 잉카가 침을 뱉을 때 손바닥을 내미는 궁녀로 뽑힐 수도 있다. 왕의 변검사를 하든 대장금이와 그 직위를 한번 겨루어 봄직하다.

비르카팜파로 추정되는 지역이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약 50 킬로 되는 지점에 발견되었으나 잉카의 보물은 끝내 발견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티티카카 호수도 가야 하고 여러모로 바빠서 그냥 가지만 다음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탐험을 한번 해 볼까 싶다. 어쩌면 200 명의 병사가 들고 다녔다는 사파 잉카의 금사슬이라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인생에 웬 횡재수를 바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첫버스를 타고 올라온 유적은 아직 안개에 휩싸여 그 모습을 전부 드러내지 않고 있다. 사다리꼴을 한 태양의 문을 지나니 위에서 산신령 같은 하얀 물체가 내려온다. 가까이 다가온 걸 보니 라마다. 라마를 이렇게 가까이 보기는 처음인데 쓰다듬어 볼까 하다가 침을 뱉을까봐 그만 두었다. 라마는 화가 나면 그린색깔의 침을 뱉는데 그 냄새가 너무 고약하다고 한다. 라마는 여기서 별명이 여럿으로 불리고 있다. 안데스의 양반, 구름위의 낙타, 바위 타는 천마. 라마는 제물로 쓰지 않지만 사람의 이름을 붙여주면 그 사람 대신 제물로 쓸 수 있었다 한다. 색깔에 따라 흰색은 태양신, 갈색은 창조주, 얼룩무늬는 천둥신에게 바쳐졌다.

늙은 봉우리 마추피추에 안개가 걷히자 태양신전으로 햇살이 강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저 아래 우루밤바의 어느 계곡에서 목동이 부는 소리인지 잉카의 피리 쿠에나의 애잔한 음률이 울려 퍼지고 있다. 저 피리 소리를 따라 안데스의 장엄한 풍경을 뒤로 하고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등에 전설의 잉카를 태우고 곧 날라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 I’d rather be a forest than a street
Yes I would, if I could I surely would

I’d rather feel the earth beneath my feet
Yes I would, if I only could I surely would”( Simon & Garfunkle의 El condor pasa중에서 )


 

8. 아메리카의 지붕


오후에 닿은 산티아고의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음에도 회색으로 덮혀 있었다. 태양은 오렌지 빛을 내고 있어 맨눈으로 바라 보아도 아무렇지가 않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이 매연 속에서도 산소는 숨을 쉬고 남을 만큼 충분하다는 점이었다. 페루에 있는 동안은 티티카카가 있는 푸노를 오가는 내내 4000 미터가 넘는 고산지대를 다녀 숨을 쉬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하는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기간이었다.
그래도 잉카의 전설이 녹아 있고 기선이 다닐 수 있는 세계의 가장 높고 큰 호수를 보고자 하는 일념으로 왕복 나흘을 버텨 낸 것이 너무 장하다. 나말고 우리 마누라. 싸고 좋은 호텔 구할랴, 편안한 버스 잡을랴 고군분투하는 것을 짐꾼은 구경만 하면서 따라 다니면 가끔은 미안할 때도 있다. 그러나 괜히 나서다가 또 싸움이 나는 것 보다야 훨씬 낫다. 가정이 화목하면 만사가 형통이라.

화목한 가정의 안쪽으로 산티아고에 사돈이 있어 불문곡직 신세를 지겠단다. 생면부지인데 난감한 생각이 든다. 해외에 사는 사람에게 손님, 그것도 아리송한 손님이 닥치면 그쪽도 난감하다. 하느라고 했는데도 조금 소흘하다 싶으면 나중에 뒷말이 들려오고 칙사 대접을 하자면 생활의 리듬이 완전히 깨진다.
어쨋거나 공항까지 마중 나온 이사장(호칭이 애매해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은 너무 반갑게 맞이한다. 젊은 나이에 산티아고의 부촌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니 말설고 낯선 곳에서 훌륭하다 싶다. 다른 교민 가족과 함께 남미의 바베큐 아사도 파티를 하는 중에 아르젠티나 이야기가 나왔는데 비자 없이 왔다니까 깜짝들 놀란다. 대사관의 지인에게도 전화를 하고 하더니 비자없이 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많다고 한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물론이고 남부의 파타고니아, 이과수 폭포가 다 물거품이 될 모양이다. 금요일 오후이니 월요일 오후에 출발하며 무슨 수로 비자를 받겠는가.

아르젠티나 비자를 테스트 하기 위해 다음날은 만사를 제치고 국경의 이민국을 통과해 보기로 작정했다. 육로로 가장 가까운 곳은 히말라야 밖에서는 가장 높다는 아콩카과 산밑의 잉카 델 푼테가 있다.
산티아고 시내로 나와 칠레 돈을 조금 빼서 거리를 걸어 가는데 웬 군인같은 사람들이 근사한 복장으로 제식훈련을 하고 있다. 주위에 물으니 대통령궁의 위병들이 교대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틀에 한번꼴로 30분 정도 하는 것이 어떻게 운좋게 걸린 셈이다. 이 모네다 궁은 한많은 사연이 있다.

남미에서 비교적 일찍 민주주의가 시작된 칠레에 막스주의자 알란데가 1970년 선거에 승리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였다. 곧이어 토지와 기간산업의 국유화가 강제로 실시 되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의 반발로 경제는 곤두박질을 치고 일년의 인플레가 300 %가 넘게 되었다. 거리는 연일 데모대로 가득차고 좌익 게릴라들은 제 세상을 만난듯 날뛰고 농부들은 지주와 전쟁이라도 벌릴 태세였다.
군부의 실권자 피노체트 장군이 알란데의 사임을 요구하며 모네다 궁을 포위하였다. 위병들과 함께 알란데가 총을 잡고 저항하자 피노체트는 대통령궁을 공중포격하고 그 와중에 알란데는 죽었다. 그 날은 산티아고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노체트의 16년 철권통치하에서 얼마나 많게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실종되고 고문 당하였냐를 말하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우째 그런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아마도 22 세기가 되어서도 그런일이 이 세상에는 버젓이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경제가 그런대로 괜찮아 칠레가 남미에서 제일 잘 살게 되었고 치안이 확고해졌다는 점이었다.
이것을 믿고 피노체트가 서울올림픽이 있던 1988 년 임기를 8년 연장하겠다고 국민투표를 실시 하였다.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부결표를 던지고 선거결과가 나오든 날 사람들은 산티아고 거리에 가득 쏟아져 나와 피노체트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 잘가오 장군. 그리고 절대 돌아 오지 마시요”

북부 정류장에서 아르헨티나의 맨도사행 버스와 콜렉티보를 알아 보러 다니는 중에 이사장이 불쑥 나타났다. 아무래도 국경에서 쫓겨나 오도가도 못할까 봐 걱정이 돼서 오후의 약속을 다 팽개치고 나온 모양이다. 비지니스 하는 사람의 천금 같은 시간을 빼앗아 미안 하기 짝이 없지만 마음 한구석은 안도가 된다. 이사장의 차를 타고 편안하게 시내관광도 하면서 국경을 향하는데 한곳에 동상이 세워진 곳을 지났다. 누구냐니까 칠레의 정복자 페드로 데 발디비아라고 한다.

피싸로가 페루의 잉카를 제압하고 부하인 알마그로란 사람을 시켜 더 남쪽으로 금의 탐험을 시켰다. 그러나 능력부족의 알마그로는 스페인군 500 명과 인디언 만명이 죽는 결과만 얻고 그냥 돌아왔다. 만회를 하기 위해 그는 반란을 일으키고 쿠스코를 공격하다가 피싸로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이 분란에서 피싸로의 편에 서있던 똑똑한 젊은이 발디비아는 피싸로에게 150의 스페인군을 얻어 그의 탁월한 지도력을 유감없이 발휘 하였다.

1540년부터 탐험을 시작한 그는 전투의 함성이 드높던 마을의 이름을 산티아고라 명하였다. 그는 이후 10 년이 넘도록 영토를 남으로 확장하여 지금 칠레의 중간 지점인 푸에르토몬트 인근까지 내려갔다.

그러나 칠레지방에 살던 원주민들은 페루의 인디언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강하였다. 마땅히 국가도 없이 야만인 처럼 살고 있었으나 말과 무기를 정복군으로 부터 훔쳐 저항운동에 사용하였다.
여러 종족중에 가장 강력한 것은 마푸체였다. 마푸체는 침략이 있고부터 19세기에 칠레가 독립될 때까지 한번도 항복한 적이 없다. 일시 휴전협정이 체결된 적이 있지만 마푸체쪽에서는 너희가 나가면 그만이지 무슨 소리냐하는 입장이었다. 발디비아도 이 원주민에게 포로가 되어 결국에는 그들의 손에 얻어 맞고 죽었다.

일세를 풍미한 정복자도 그 죽음은 어쩔수 없이 선배들의 전철을 밟을 수 밖에 없었나 보나. 피싸로는 동료의 배신으로 죽고 멕시코의 정복자 코르테스도 고향에는 돌아갔지만 자신이 신이라는 환상에 빠져 정신병으로 죽었다. 하기사 누구나 죽기 마련인데 그 죽음이 안락하지 않으면 어떠한가. 살아 생전에 그토록 화려한 풍운의 활동으로 후세에 그 이름이 길이 남으니 무엇을 더 바랄까.

국경에 도착해서 차를 내리니 싸늘하면서도 청량한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출국수속을 치르고 막상 아르젠티나의 입국수속을 밟으려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만약 안된다면 뒷일은 생각하기도 싫다. 닥치는 데로 하는 수 밖에 없다. 초조와 긴장으로 창구에 가까워질수록 숨소리가 커지는 것 같다. 깐깐해 보이는 아줌마가 여권을 이리 저리 뒤적이더니 빈자리에 스탬프를 쾅 찍는다. 그라시아스, 도스 그라시아스. 과테말라에서도 아줌마 이민국직원이 살려 주더니 역시 나는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다.

아콩카과 등반의 입구인 잉카의 다리 푸엔테 델 잉카에 있는 호텔까지 내려온 이사장은 차 한잔을 마신채 후딱 산티아고로 떠난다. 먼길을 혼자 가자면 지루할 것 같다. 물속의 광물질이 녹아서 자연적으로 멘도사 강위에 걸쳐 있는 잉카의 다리를 보고 기념품 가게에서 바꾼 아르젠티나 돈으로 맥주를 사서 저녁 반주로 하니 그 맛이 일품이다.

새벽녘에 소란스러운 소리에 밖을 내다 보니 호텔 뒷뜰에서 건장한 남녀들이 말들에 짐을 싣고 있다. 아콩카과를 등반하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당나귀에 짐을 싣고 간다고 들었는데 말을 타고 가다가 캠프에서 바꾸는 모양이다. 아메리카의 지붕이라는 아콩카과를 올라간다는 선입견이 있어 그런지 누워서 쳐다보는 사람들이 거인들 같아 보인다.

아침 일찍 산의 정상까지 올라 가지는 않고 쳐다 보기 위해 꼬불 꼬불한 길을 한없이 올라갔는데 구름이 끼여 있다. 렌즈 모양의 구름이면 기후가 몹씨 나빠진다는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다.
호텔에 예약해둔 산티아고행 콜렉티보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를 않는다. 애가 타서 왔다 갔다 하니까 이스라엘 청년 하나가 자기는 어제 하루 종일 기다렸다며 아무 차나 타고 가자고 그런다.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세워주는 차는 바로 코앞 동네에 가는 차들 뿐이다.

근 두시간이 지나 버스가 한대 서는데 다행히 기다리던 사람들이 다 탈만큼 빈자리가 남았다. 국경에 도착해서 일찍 수속을 마치고 다른 사람들 끝나기를 기다리며 산 위를 쳐다보니 이제는 완전히 구름에 뒤덮여 눈까지 내린다. 희끗거리는 눈발 사이의 산 아래로는 수십 고비 지그재그의 길을 차들이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까지 와서 비자 테스트에 성공한 것은 좋았으나 아콩카과의 위용을 못 보고 가서 못내 아쉽다.
“ The wild and windy night that the rain washed away
Has left a pool of tears crying for the day
Why leave me standing here, let me know the way

Many times I’ve been alone and many times I’ve cried
Anyway you’ll never know the many ways I’ve tried

And still they lead me back to the long and winding road
You left me standing here a long long time ago
Don’t leave me waiting here, lead me to your door (The Beatles의 The long and winding
road중에서)

 

9. 만 천의 처녀 해협(푼타아레나스)

시절은 바야흐로 12월의 중순, 남반부의 한여름이고 시각은 해가 질려면 열시간 정도가 있어야 하는 정오이다. 태양은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듯 꼭대기에 정지해 있는데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은 어느덧 뿔뿔이 사리지고 없다. 칠레공화국 아니 남미대륙의 최남단 도시 푼타 아레나스의 첫인상은 정적이 가득한 초원이다. 어물거리다가 비행기가 내리면 하나 있는 버스를 놓지니 얼른 택시기사가 다가온다. 시내의 제일 중심에 내려 달라니까 기사는 아르마스 광장의 마젤란 동상앞에다 내려 주고는 횡하니 가 버린다.
숙소를 구하러 간 리이를 기다리는 사이 공원에 있던 학생들이 말을 붙인다. 처음에는 많은 짐 때문에 긴장을 하였으나 가만 보니 영어를 써보고 싶어 다들 한마디씩 지 하고 싶은 말만 한다. 아이들이 가고 나자 벤치는 그늘이 지고 쌀쌀해 지기 시작한다. 점퍼에 내피를 껴입으니 살만하다. 남쪽 끝의 여름추위를 실감하겠다.

한참을 기다려 리이가 오는데 웬 동양인 한사람과 같이 온다. 벌써 남자친구를 사귀였나 쳐다보니 ‘안녕하세요’ 한다. 푼타아레나스에 살고 있는 한국사람 둘중에 한분이란다. 남극탐험을 떠난 한국원정대에 경미한 사고가 있어 산티아고에서 영사가 내려오는데 숙소를 구하는 곳에서 같이 만난 모양이다. 그 분의 소개로 멀지않은 곳에 백패커 롯지로 잠자리를 잡았다. 다음날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도 데려다 주고 예매까지 하게 해준다. 공무원도 아니고 탐험대도 아닌데 동포라는 이유 하나로 너무 신세를 진 것 같아 술이라도 한잔 하자고 하니까 바쁘다고 사양을 하고 가버린다.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았을 터인데 아쉽다.
시내구경도 하고 수퍼에서 시장도 보고 돌아 다니느라 아홉시가 넘었는데도 날은 아직도 밝다. 지금쯤이면 이곳은 하루에 열 일곱시간 동안 해가 떠 있게 된다. 숙소로 내려오는 길의 끝부분에 검푸른 바다가 보인다.

콜롬부스가 1492 년 신대륙을 발견 하고도 1504 년 까지 그는 네번의 항해를 성공적으로 수행 하였다. 그러나 그는 1506 년 풍운의 세월을 마감할 때 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땅이 동양의 치팡구(일본)라고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신진의 젊은 항해사들은 콜롬부스의 땅은 새로운 대륙이고 재화가 들어오는 향료의 섬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중의 하나로 폴투칼의 지방도시 오포로토에 젊은 귀족이 하나 있었다.

그는 에르난 마갈량이스라는 사람이었다. 마갈량이스는 콜롬부스의 신대륙을 거쳐 향료의 섬(Spice Islands)을 들르고 다시 서쪽으로 지구를 한바퀴 도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마갈량이스의 브리핑을 받은 폴투칼 국왕은 지방귀족의 계획을 시덥잖게 생각하고 이의 지원을 거절 하였다. 마갈량이스는 폴투칼의 라이벌국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국왕 카롤로스를 설득하고 그로부터 5척의 선박지원 약속을 받아 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그 순간부터 페르난도 마가야네스가 되었다. 그가 바로 우리가 마젤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마젤란은 1519 년 9 월 스페인의 세르비야에서 드디어 닻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하였다. 아프리카의 카나리 군도를 지날 즈음에 1년전 늦장가를 들었던 장인으로부터 함대안에 폴투칼의 자객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때마침 반란을 주도하던 자객을 색출하여 돛대위에 높이 매달아 위엄을 세운후 서인도 제도 까지는 콜롬부스의 항로를 따르고 부에노스아이레스 까지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항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 이후는 전인미항의 길을 가다가 마침내 남미대륙의 끝부분에서 서쪽의 대양으로 나갈 수 있는 협곡을 발견 하였다. 그러나 그협곡을 건너는 동안 배 한척은 침몰하고 또 한척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고 말았다.

남은 세척의 배로 협곡을 지나가며 일행은 양안의 눈덮힌 산들과 매서운 바람을 뚫고 지나가며 이 미지의 신비스러운 뱃길을 ‘만 천의 처녀 해협’ 이라 이름 지었다. 38일간의 항해 끝에 반대편의 바다에 도착하자 갑자기 평온하고 순탄한 대양이 나타났다. 마젤란은 이 평화로운(peaceful) 바다를 퍼시픽(Pacific) 오션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 거대한 대양이 그 무섭고 거친 모양을 마젤란 일행에게 잠시 속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젤란이 그 순간 실상을 알았다면 바다의 이름은 Horrific이 되어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평화로운 바다는 마젤란 일행에게 계속 뒷바람을 불어 주었다. 이 바람이 바로 무역풍이다. 이 무역풍은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불어줌으로써 미대륙에서 아시아쪽으로 가는 범선에게는 생명의 바람이나 같은 것이다. 물론 반대방향으로는 죽음의 바람이 될 것이다.
무역풍의 도움을 받았으나 마젤란 함대는 4 개월이 되도록 육지를 볼 수가 없었다. 식수는 빗물로 해결할 수 있었으나 식품은 바닥이 났다.

항해를 하며 식품이 떨어지면 제일 먼저 배안의 쥐사냥이 시작된다. 이런 순간에도 쥐를 잘 잡는 사람은 돈벌이가 쏠쏠하다. 쥐값이 금값이 되니까. 그것마저 떨어지면 배수리를 하느라 생긴 톱밥을 먹기 시작한다. 백프로 섬유질에 순수 미네랄이니 얼마나 다이어트에 좋을까. 톱밥마저 동이 나면 가죽옷이나 가죽신발을 끓여 고기국물 수프를 먹기 시작한다. 그마저도 떨어지면?

기근과 괴혈병으로 수많은 선원이 죽고나서 어느날 돛대에 앉아 망을 보던 사람이 고함을 질렀다. ‘섬이다. 섬이로다’ 그러나 그 섬은 닻을 내릴 곳이 아무데도 없는 섬이었다. 선원들은 그 섬의 이름을 실망의 섬이라 부르고 떠났다. 실망의 섬을 떠난 며칠후에 그들은 제대로 된 섬을 보았다. 그 곳이 바로 지금의 괌이다. 괌에서 일단 식수와 식품을 조달한 일행은 곧바로 항해에 들어갔다. 무슨 급한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배안의 물건이 수시로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원 하나가 이 섬의 이름은 좀도둑의 섬이다 하고 익살을 떨었다.

괌을 떠난 후의 항해는 순조로워 열흘이 되지 않아 다른 섬에 도착 하였다. 섬의 사람들은 친절 하였고 바나나를 코코낫과 야자기름에 익힌 생선과 같이 대접하였다. 친절과 환대의 보답으로 마젤란은 섬사람들에게 종과 거울과 화려한 색갈의 옷감을 선사 하였다. 그리고 마젤란은 그곳의 왕과 섬사람들에게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하였다. 왕은 마젤란 일행이 이웃섬의 적들과 싸우는데 도움을 준다는 조건으로 800 명 전원의 섬사람이 세례를 받았다.
마젤란은 이 섬과 그 인근의 섬들을 통털어 스페인의 황태자 필립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웃 섬나라와 전쟁이 시작되자 마젤란은 총과 칼을 가진 선원들이 죽창을 가진 현지인들을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러나 막상 해안에서 전투가 시작되자 벌거벗은 야만인들의 몸짓은 갑옷을 입은 현대군보다 훨씬 빨랐다. 스페인군은 이 전투에서 40 명의 선원을 잃었다. 그 속에는 용감하고 고귀한 함장 본인도 들어 있었다. 세계일주 항해를 시작한지 1년 8개월 만이었고 한창의 나이 41 세 때였다.

새로운 선장으로 폴투칼의 다른 귀족이 선출 되었고 그는 좀이 먹기 시작해 항해를 할 수 없는 배 한척을 버리고 나머지 두척으로 향료의 섬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 그는 마젤란의 성공에 질투를 느껴 그의 항해일지를 바다에 버리고 말았다. 세계의 귀중한 자료 하나가 졸장부 때문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인근에 있는 향료의 섬(몰루카 제도)에 도착하자 새로운 선장도 황열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

바스크 사람 델카노가 마지막으로 선단을 끌고 세빌리야로 돌아온 것은 그들이 떠난지 꼭 3 년만이었다. 다섯척의 배는 하나로 줄어 있었고 270 명의 선원들은 열 일곱명만 돌아왔다. 나중에 폴투칼령에 억류되어 있던 열 세명이 합류 하였어도 생존률은 10 %에 불과 하였다. 생환한 Vittoria호의 선원들이 거리를 가로질러 산타마리아 델라 빗토리아 성당으로 걸어가자 사람들은 그들의 맨발에 입을 맞추었다. 카롤로스 왕은 델카노와 선원들을 왕궁으로 불러 그 공을 치하 하였다. 가지고 온 향신료를 팔자 겨우 5척의 선단비용은 충당 되었다.

마젤란의 원대한 계획과 죽음의 모험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델카노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모든 잘못은 마젤란이 저질렀고 모든 공은 자신의 것이라고 떠벌렸다. 그러나 그런 그도 어느날 마젤란의 생각이 나고 또다시 항해병이 도져 마젤란의 항로를 따라 재항해를 시도 하였다.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는 그 지겨운 항해를 다시 나서는 것을 보면 그도 보통 용감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보다. 하지만 그도 역시 선배의 뒤를 따라 태평양에서 죽고 그 바다에 묻혔다.

델카노가 죽고 나자 카를로스는 마젤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시작하고 그사람 이야말로 진정한 대양의 제독이고 선지자라며 역사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만천의 처녀’ 들은 그 이름을 마젤란에게 바치게 되었다. 마젤란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해는 죽음의 항해로 소문이 나서 다시는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50 여년이 지나 영국의 해적영웅 드레이크가 더 남쪽으로 지나며 드레이크의 길을 만들어 세계일주를 성공 하였다. 그로부터 마젤란 해협은 하루에도 큰 배가 3척 이상이나 다니는 부산한 뱃길이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자 그때부터는 하루는 커녕 한달에도 3척이 다닐까 말까 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그 마젤란 해협이 이제 석양 나그네의 눈 앞에서 성난 파도소리를 내며 출렁이고 있다.

“ Lay down
Your sweet & weary head
Night is falling
You have come to journey’s end…

And all will turn to silver glass
A light on the water
Grey ship pass
Into the west” ( Annie Lennox의 Into the west중에서)


 

10. 죽음에의 열망(토레스 델 파이네)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가까이 오자 비가 내리던 것도 멈추고 황량한 초원 너머로 하얀 모자를 쓴 산들이 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만 옆을 지나며 보니 바깥이 상당히 추운 느낌이 든다. 푼타 아레나스에서 300 킬로 정도 북쪽으로 올라왔을 터인데 바깥풍경은 여름이란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호수같은 바닷가에는 물새들이 떼지어 놀고 있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덩치큰 택시 기사 하나가 숙소는 물론 토레스 델 파이네 관광도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떨어질 생각을 안한다. 인포메이션 표지가 붙은 여행사 사무실을 들어가자 숙소를 몇개 이야기 하더니 한곳을 특별히 추천하면서 자기 어머니가 하는 곳이라며 웃는다. 젊은 사람이 인상도 괜찮고 하는 짓이 밉지 않아 내일 파이네 등반도 같이 예약을 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호스탈에 들르자 리이는 뉴올리언스(카타리나 전)에서 사온 비타민 병부터 꺼내놓고 한주먹 집어먹으란다. 추운 곳에서 감기 들지 않으려면 그저 비타민 C가 제일이라는 설명을 붙인다. 사실 리이의 비타민 덕분에 여행 다니며 감기 걸려본 적은 없다. 그나저나 그렇게 많이 먹으면 소변색깔이 아름다울 터인데 간은 괜찮나 모르겠다.
밖으로 나오자 언제부터였는지 아까 그 택시기사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자기가 다 실어줄 것인데 그 무거운 배낭을 왜 지고 오느냐며 원망을 한다.

기다리게 한 것이 미안한지 리이가 수산시장을 가자고 한다. 기사는 빤한 길 같은데 빙글 빙글 돌더니 외진곳의 자그만한 건물앞에 세우는데 문이 이미 닫겼다. 다른 작은 생선가게로 데려 가는데 생선가게 아주머니가 싼값에 생선을 아주 잘 손질해서 준다. 택시기사가 내려준 시내 중심가에서(그기가 거기지만) 시장도 보고 둥그런 버섯같이 생긴 빨간 털모자도 하나 샀다.

숙소로 돌아와 부엌을 빌려 생선찜탕을 끓여 포도주랑 같이 먹으니 배불러서 행복하다. 사람다루는 선수 리이는 생선으로 주인 아줌마를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이층의 라운지에다 식탁을 차려주고 아들을 시켜 난로에 장작불까지 짚혀준다. 침실은 마루가 삐걱거리기는 하나 온-스위트(en-suite)이지 벽난로가 있는 라운지를 전용으로 쓰다싶이 하니 꼬질꼬질한 백패커의 탈을 벗고 비까번쩍한 Flashpacker가 된 것 같으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에 걸린 달을 보니 아줌마의 얼굴도 덩달아 달덩이 같아 보여 기분이 로멘틱하다.

“When the moon hits your eye like a big pizza pie, that’s Amore
When the world seems to shine like you’ve had too much wine, that’s Amore
Bells will ring, ting a ling a ling, ting a ling a ling
And you’ll sing Vita Bella
Heart will play tippy tippy tay, tippy tippy tay like guitarantella
Amore, that’s amore” (Dean Martin의 That’s Amore중에서)


눈을 뜨니 아직 다섯시도 안됐는데 밖은 훤하다. 아무리 그래도 새벽부터 샤워를 하네 어쩌네 하면 피차 기침소리만 내도 다 들리는 판에 이층 손님들 다 깨울것 같아 밖으로 나와 산책을 갔다. 북쪽으로 깊숙히 들어온 만은 바람이 없어 그런지 잔잔한 물결위로 새벽의 황금빛이 어리고 있다.

1832년의 어느날 부두도 없는 이 항구로 쌍돛대를 높이 달고 열문의 대포를 장착한 배 한척이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배의 옆구리에는 “폐하의 배(HMS; His Majesty’s Ship) 비글(Beagle)”이라고 적혀 있었다. 갑판위에는 28살의 선장 로버트 피츠로이가 망원경을 들고 서 있었고 그옆에는 네살 아래의 아마츄어 생물학자 촬스 다윈이 같이 서 있었다.

16세기가 저물 무렵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 the Invincible)가 도버의 흰벽 앞에서 절반 밖에 되지 않는 엘리자베스 1세의 드레이크함대에 무참히 깨지고, 1805년 외팔과 외눈의 넬슨이 트라팔가에서 이선배를 흠모하는 심정으로 “나 죽었다 적에게 알리지를 말라” 하며 나폴레옹 함대를 묵사발로 만든 후부터 전세계의 바다는 영국배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물론 영국의 최전성기는 1837년 열여덟의 포동포동한 처녀 빅토리아가 즉위한 이후이지만 그녀의 삼촌 윌리엄 4세 때에도 이미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초는 충분히 다져져 있었다.

폐하(윌리엄 4세)의 배 비글은 이러한 제국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전인미답이나 다름없는 남미대륙의 최남단과 남태평양 일대를 조사하기 위한 일종의 과학 탐사선이었다.
피츠로이가 당시로는 드물게 새로 생긴 왕립 해양대학을 졸업하고 비글호에 1차 승선 하고 있을 때 전임선장이 권태와 고독을 못이겨 권총자살을 하고 말았다. 스물셋의 해군중위 피츠로이는 선임들을 제치고 선장의 자리에 발탁 되었다.

해군 고위층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피츠로이는 최남의 해안을 샅샅이 살펴 수로를 발견하고 거기에 비글수로(Beagle Channel)라는 이름을 붙였다. 임무 도중 비글호의 포경선을 훔쳐 가려던 현지인 네명을 잡아 영국으로 데려오자 각계에서는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특히 아홉살의 여자아이가 발전하는 모습은 하루하루가 뉴스였다. 처음에는 완전히 크레마뇽인과 똑같이 생겼던 아이가 시일이 지나자 골격이 바뀌면서 용모와 생활이 문명인을 닮고 있었다.

왕과 여왕까지 푸에고인들을 구경오고 아델레이드 여왕은 잃은 두딸이 생각나서인지 푸에고섬의 꽃 푸에지아에게 자기의 반지와 모자는 물론 수중에 있던 돈까지 몽땅 주고 갔다 한다. 여기서 피츠로이는 다음 항해에 과학자를 대동할 것을 착안하고 그 결과가 바로 촬스 다윈이었다.
피츠로이는 출신성분이 비슷한 젠트리 계급의 다윈과 급속히 친밀해지지만 5년의 동반항해가 끝난 뒤에는 두 사람의 길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윈이 발표한 ‘종의 기원’은 비난과 찬사를 동시에 받는 획기적인 이론이 되지만 피츠로이의 진부한 창조론의 되풀이는 아무런 주목도 못받고 때로는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여기서부터 그는 평생을 다윈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아울러 삼촌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정계로 진출하지만 부정선거의 시비에 휘말려 정적과 결투까지 벌리고 정치에서 발을 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으로 뉴질랜드에 부임하여 총독의 유고로 그 자리를 이어 받지만 영국인과 현지인 마오리의 분쟁에서 곤경에 처하고 말았다. 백인을 여러명 죽인 마오리 추장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린 것이 화근이 되어 백인들은 총독배척의 탄원을 본국에다 계속 올리고 있었다. 당연히 총독을 지원하여야 할 추장은 “저 사람은 내가 눈만 크게 뜨도 꼼짝 못해”하면서 뻐기고 다녔다. 새로이 부임한 총독이 제일 먼저 한일은 문제의 추장을 잡아서 죽인 것이었다.

피츠로이는 민간인으로 해군에 다시 복직하지만 이도 곧 사임하고 만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자신의 목에 날카로운 면도날을 갖다 댐으로써 평생을 괴롭혀 온 열등감과 비글호의 전임선장의 망령은 물론 런던데리 후작의 자리를 자살로 팽개친 외삼촌의 핏줄과 얽힌 운명을 모두 청산 하였다.

해양학교의 수석졸업생 이었으며 언제나 선두를 달려 제독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며 어쨋든 선출의 국회의원이었고 관직으로는 여왕의 대리인인 총독이 되었지만 그대는 아는가! 우울증의 끝간데를? 그렇게 씁쓸한 결말을 맞은 그이지만 그의 이름은 아르헨티나의 칼라파테 위에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봉우리에 남아 있다.

아홉시에 출발한 토레스 델 파이네 투어버스는 군데 군데 빙하의 호수에 비치는 산그림자를 보며 유람을 다니니 다른 세상을 온 기분이다. 호수위에 떠있는 백조들을 보니 어디서 본듯도 하다. 티티카카 호수에서 보았던가? 먼길 오느라 힘이 들었는지 검은 백조도 있다. Swan이 왜 백조로만 번역 되었는지 흑조는 섭섭할 노릇이다. 겉검고 이름 흰새는 너 뿐인가 하노라. 그레이 호수로 오니 백조보다 더 희고 푸른색을 띄는 빙하의 덩어리가 떠다니고 있다. 큰거는 조금 과장을 하면 집채만 하다.

파이네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로켓을 쏘아 올리는 것 같은 봉우리들이 구름속으로 들락 날락하며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저곳은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워 보이는가. 어서 오느라 하며 마치 손짓을 하느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만약 허겁지겁 그곳으로 간다면 저 산은 곧 퉁명스러운 모습을 하고 무뚝뚝한 자태로 나를 얼어붙게 만들 것임을. 감히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폭포가 떨어지는 언덕위의 양지바른 곳에 누워 있으니 선경에 이르른 듯하다.

나이가 들면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이제까지는 어떡하면 잘 살아 보나 하고 지나 왔다면 이제는 거꾸로 생각해야 될 때가 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파이네의 봉우리들을 쳐다 보고 있노라니 피츠로이 선장의 혼령이 땡기기라도 하는 지 이곳이야말로 죽기에 참으로 좋은 장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 위로는 멕시코부터 따라 다니는 세마리의 콘돌이 날개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선회하고 있었다. 처량한 목소리로 옆에 앉은 리이에게 말을 걸었다.
“ 여보. 내가 이런데서 죽거들랑 끌고 가느라 애쓰지 말고 그냥 버리고 가. 날짐승들도 뭘 묵을기 있어야지”
어떻게 그렇게 재수없는 소리만 골라 하느냐며 야단을 직사하게 맞았다.

“Away I’d rather sail away like swan that’s here and gone
A man gets tired down to the ground
He gives the words
It’s saddest sound it’s saddest sound” (Simon & Garfunkle의 El Condor Pasa중에서

11. 파타고니아

푸에르토 나탈레스에서 아르헨티나의 칼라파테로 가는 길은 육로가 최선이다. 아침 일찍 출발한 버스는 파이네산으로 가는 길을 따라 북진하다가 중간에서 동쪽으로 갈라서게 되어 있다. 왼편의 산들이 점점 작아지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갈색의 황무지이다. 국경이라 하여 무슨 삼엄한 초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황야의 한복판에 창고 같은 호텔건물이 있고 한쪽에서 출입국 수속을 밟는다. 이제는 비자가 없어도 무덤덤하고 역시 무사하게 아르헨티나로 입국이 되었다.

건물 바깥에서 버스의 일행들 수속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평원을 보고 있노라니 파타고니아에 온 것을 실감 하겠다. 마젤란이 바다를 지나가며 바라본 파타고니아는 검은 연기와 회오리 바람의 땅이었다. 다윈이 방문 하였을 때 까지도 이곳은 역시 비참하고 쓸모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그는 만년에, 사람도 없고 나무도 없고 산도 없고 오직 있다면 갈색의 풀과 난장이 수풀만 있는, 이곳을 가장 그리워 하였다 한다.

파타고니아는 제일 먼저 마젤란이 그 이름을 지었다. 마젤란이 자기의 해협을 지나는데 연안의 언덕위에 커다란 거인이 머리에 동물의 대가리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자 첫마디가 파타(다리) 곤(큰)이었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젤란이 현지인의 롱다리를 보고 파타곤이라 하였다 하여 그 땅도 파타고니아라 한다 하는데 석양나그네의 조사로는 이야기가 조금 툴린다.

중세 그리스에 Saga(영웅담)를 쓰는 소설가가 있었는데 그가 쓴 영웅담중에 주인공이 세상밖으로 나가 파타곤이라는 거인을 잡아 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파타곤은 키가 구척이 넘고 머리는 개모양을 하고 있는데 주인공에게 잡히자 ‘세테보스’하고 대악마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요청을 하였다. 마젤란 일행이 거인을 잡으려 하자 그도 세테보스를 부르며 악마의 구원을 빌었다. 세익스피어가 템페스트에서 말한 개머리의 괴물 시인 캘리반이 이 파타곤의 연상작용이었는 지는 세익스피어 자신만 안다.

어쨋거나 그리스인의 무용담은 석양나그네의 이야기여행처럼 별로 주목을 못 받지만 그래도 당대의 율리시저(오디시우스)라 불리는 마젤란이 그 험한 여행을 기획하며 읽지 않았을리 없었다. 몇몇 의식높은 사람들이 이야기여행을 줄기차게 읽어주듯 대탐험가인 마젤란이 험한 세상의 모험담을 읽음은 당연한 일이다. Accordingly, 선지자 마젤란께서 큰 사람이 동물의 가죽을 쓰고 있는 것을 보고 내뱉은 첫마디 파타곤이 ‘큰 다리’였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코미디같다.

파타곤의 크기에 대해서는 시기에 따라 많이 달라지고 있다. 마젤란의 선원이 쓴 일지에는 9 피트의 크기라 하였고 다음 세기에 바이런의 할아버지는 8 피트 쯤이라 하였다. 그 이후로도 조금씩 줄다가 다윈에 이르러서는 6 피트 까지 작아졌다. 그 후로도 계속 줄어 들었는 지 지금은 파타곤은 커녕 다른 종족들 조차 씨가 말라 버렸다. 그리고 다만 이름만을 남겨 거뭇한 땅과 갈색의 풀밭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아 보이고 있다.

이 황량한 땅에도 사람들은 몰려오기 시작 하였다. 19세기 중엽부터 중북부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 오고 남북 아메리카 곳곳에서도 농장을 개척할 사람들이 몰려 왔다. 그리고 그 속에는 성분이 약간 이상한 사람들도 있었다.

1900년대 초에 전설의 은행 및 열차강도 Sundance kid 부부와 버치 캐쉬디가 달라스의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여 은행지점장에게 그 사진을 보내고 유유히 내려온 곳이 바로 이곳 파타고니아이다. 버치 캐쉬디는 평소 “저 남쪽의 Middle of no where로 가서 새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것을 실현하려고 왔는지도 모를일이었다. 세사람은 5년간 목장을 하며 지역의 유지가 되어 착실히 살아가고 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캐쉬디는 미국의 동료들을 다시 부르고 볼리비아의 은행을 턴다. 군대와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고 캐쉬디는 수십건의 강도를 하면서도 한번도 한적이 없는 살인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동생처럼 아끼던 선댄스 키드가 치명상을 입자 그 머리통을 날려 버린 것이었다. 진압을 완전히 끝낸 군대가 확인한 시체에는 여자가 한명 있었으며 그녀의 손목에는 당시로서는 드문 금시계가 채여져 있었다 했다. 그 금시계는 캐쉬디가 티파니에서 에섹스 백작의 손녀인 에타 플레이스에게 선댄스와의 결혼기념으로 사준 것이었다. 세가족과 갱들은 모두 사망한 것으로 처리 되었다. 여기까지가 당시의 ‘라이프’ 잡지에 실린 기사였다.

수십년이 지나고 캔사스 일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15건의 은행강도에 연루된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우리 엄마가 전설의 에타다”하며 떠벌리고 다녔다. 에타가 죽을 때 까지는 자식이 없었었다.
캐쉬디가 늙었으면 꼭 그같을 사람이 전혀 다른 이름으로 옛날 친구들과 애인들을 만나고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는 캐쉬디의 여동생집에도 와서 아버지랑 불루베리 파이를 먹고 가기도 하였다 한다. 그 사람은 돈을 잘 쓰고 다녔는데 죽은 삼촌이 준 돈이라고 하였다. 캐쉬디의 현역 시절에는 은행지점장을 항상 죽은 삼촌이라고 불렀었다. Anyhow 그가 파타고니아에서 새사람이 된 캐쉬디인지는 누구도 단정할수 없었다.
석양나그네도 파타고니아를 떠나면 중천나그네가 될수 없을까 생각해 보지만 Stranger in the night이 될 가는성이 더 높을것 같다.

국경을 통과한 버스는 가도 가도 비슷한 풍경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길옆으로는 펜스를 친채 목장들이 이어져 있다. 길 가까운 곳에 있는 소들이 놀라서 달리기도 한다. 그런데 소들이 이리 저리 놀라서 뛰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마치 젊은 날의 데모 광경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228을 시두로 419, 63 사태, 유신까지 거쳐온 세대로 데모 한번이 없었을 수 없다. 물론 주동을 한적은 없지만 비교적 출석율이 좋은 편이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요령이 생겼다. 꽁무니에 붙으면 여학생들이 손가락질을 하니까 엉거주춤 중간에 끼는데 상황판단이 아주 어려웠다. 선두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잘 빠질 수있는 골목은 어딘지 알지 못하고 더구나 뒤로 가려면 길이 열리지 않아 아군에게 밟힐 수도 있었다. 그래서 터득한 데모요령이 선두에 서는 방법이었다.

선두에 서 있으면 남들 보기에도 좋고 또 적들의 동태가 훤히 내다 보이므로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가 아주 편리하다. 진압군이 돌격의 형태로 바뀐다 싶을 때 남먼저 냅다 눈여겨 둔 골목으로 튀면 절대 잡히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선두에 서는 재미를 즐기고 있을 때 누군가 아주 심각한 귀뜸을 해줬다. 선두에 서는 사람은 촬영이 되서 관할 정보과 형사랑 친분을 맺어야 한다는 소문이었다.

귀가 얇은 석양이 냉큼 몇줄 뒤로 물러 섰는데 당장 그날로 문제가 터졌다. 앞쪽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어디로 가나 우왕 좌왕 하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경찰의 몽둥이가 날라왔다. 뛰면서 팔뚝으로 막고 골목을 여기저기 돌아 최루를 하며 겨우 도망은 갔지만 그때부터 팔뚝이 쑤시기 시작했다. 신신파스를 붙이고 새찜(당시의 진통연고)을 발라도 열흘 이상 멍이 가라 앉지를 않았다. 된장을 발라 보라고 우정어린 충고를 하는 친구도 있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하숙생들이 그 단단한 경찰 진압봉은 뭘로 만들었느냐 하는 논쟁이 붙었다. 백가쟁명 하다가 참나무파가 막 득세를 하는 판에 복학생 하나가 일갈을 하자 좌중은 숙연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옛날에 쇠가 부족할 때는 기차 바쿠도 박달나무로 만들었다는데”

그 이후로는 학교앞 막걸리집에서 공짜로 주는 허파안주를 씹으며 고담준론 나눌때 마다 박달이 한마디 하면 그것으로 바로 결론이 났다.
“기차 바쿠를 박달나무로도 만든다는 사람이 뭔들 모르겠어” 그러면서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동안, 숲속의 미녀 민주는 잠깐 눈을 깜박이다가 다시 오래고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버스가 목장옆으로 다가가자 앞쪽에 있던 겁많은 석양소가 갑자기 뛰기 시작하자 딴 소들도 다같이 뛴다. 중간쯤에 폼을 잡고 있던 박달소는 허둥 지둥 하다가 옆소에게 부딛혀서 넘어지고 말았다.
누가 파타고니아를 유배의 마지막 곶, 악마의 땅이라고 하였는가? 이제 파타고니아는 촬스 다윈의 추억의 땅을 넘어 석양 나그네에게도 소름이 끼치도록 매혹적인 추억으로 남으려 하고 있다.

http://www.backpacker.net/subindex/america/america_board.asp?file=content&etc_field=&idx=4833&bc=travel&GoTopage=&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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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세요!!!

지도를 봐야할 것 같군!

어디가 어디인지... 첨엔 누구나 그런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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