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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백패커 장재열] 라틴문화의 이해

by 발비(發飛) 2006. 5. 4.

라틴문화의 이해-혼혈은 은총! "물라또", "삼보"

 

1492년은
스페인에게 실로 다사다난한 해였다.
이사벨 여왕의 진두지휘하에 모로족의 거점이었던 그라나다가 함락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를 재통일하였고, 한편 밖으로는 콜럼버스가 오랜 항해끝에 미지의 땅에 도착하였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은 세계사적으로 볼 때, 예수의 탄생에 비견할 만한 엄청난 사건이였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땅을 발견한것 때문이 아니라 그 땅에 당시의 유럽과는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다른 양태를 보이는 수천 년에 선진 문명이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유럽과 아시아의 각 문명은 수천 년에 걸쳐 사상과 지식 그리고 물품을 교류하면서 직접, 간접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으나 아메리카 대륙은 그 동안 전적으로 이들 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이질적인 문명들이 아무런 사전 준비없이 조우한 것은 지구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지중해의 좁은 바닥에서 세계의 패권을 운운하던 유럽인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타자성"의 발견인 동시에 "또 다른 나"의 발견이었고 잃어버린 낙원의 도래였다.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유럽인들은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경이로운 현실"에 압도되었다. 그것은 오늘날 인간의 달 착륙보다도 더욱 충격적인, 세계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우리와 먼 친척 뻘로서 같은 몽고반점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오)들에게 이 사건은 더욱 의미 있는 것이었고 결국 비극의 전조가 되었다. 이후 새로운 인종인 메스띠소의 탄생을 비롯해서 아메리카 대륙의 모든것이 바뀌게 된다. 이 때문에 중남미의 역사는 크게 "콜럼버스 이전 세대"와 "이후 시대"로 구분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문명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상이한 특징을 보여주는 인디오 문명이 유럽인들에게 노출되면서 두 문명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고 기술 문명이 앞선 유럽인들이 인디오들을 정복해 나가는 것 역시 예정된 수순이었다. 당시 아메리카에 대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정책은 간단히 세 가지로 집약된다.
땅을 발견하고, 정복하며, 식민지화하는 것이다.
이 정책의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정치적, 군사적, 그리고 종교적인 것으로 인디오들을 지상에서 충성스런 국왕의 신민으로, 그리고 천상에서는 영혼이 구제되는 선민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었다. 따라서 식민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인디오 문화는 외적으로 뿐만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파괴되었고 유럽인이
부과하는 새로운 잣대에 맞추어 재편되었다. 그러나 폭력적인 식민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인디오 문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이식된 유럽문화와 이질적인 융합을 이루었고 이로 인해 탄생한 이종혼합 문화는 오늘날 중남미 문화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이종혼합 문화가 더욱 복합적이고 풍부해지는 계기가 되는것이 바로 흑인 문화의 도입이다. 아메리카 인디오의 육체적 조건이 중노동에 적합하지 않아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로 들여왔다. 비록 노예상태지만 자신들의 풍습과 전통을 간직하였으며 기존에 형성된 메스띠소 문화와 점차 혼합되면서 또 다른 문화를 만들어냈다. 흑인들은 인디오나 백인과 피를 섞으면서 "물라또mulato", "삼보sambo"등의 새로운 인종을 탄생시켰다. 실로 인종적, 문화적, 예술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여러 이질적인 부분들이 모여 일찍이 지구상에 없었던 새로운 양식을 주조해내는 용광로였으며, 연극장이였다.

 

라틴문화의 이해2-"엄마찾아 삼만리"

 

스페인과 포르투깔에
의해 식민화가 이루어진 이후 동양과의 접촉도 오늘날의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인도나 필립핀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은 이미 1565년부터 시작되었으며, 필립핀에서 상품을 싣고 출항한 상선들은 까야오와 아까뿔꼬 항구에 짐을 풀어놓곤 했다. 이러한 교역은 밀매의 성격을 띠고 이루어졌는데 흔히 중국, 인도, 태국 등의 상품과 멕시코의 과나후아또와 뽀또시에서 캐낸 금이 서로 교환되곤 했다. 이때 수입된 아시아의 상품중 향료, 조각품, 비단, 상아 세공물, 도자기 등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 취향 일변도의 미적 가치기준을 흔들어 놓았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에게 라틴아메리카와 관련된 인상을 물으면 무엇이라 대답할까? 군사쿠테타, 독재, 빈부격차, 외채, IMF, 게으름 등등 온갖 험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기껏해야 "축구는 잘한다"라는 말 하나가 유일하게 긍적적인 평가가 될지 모른다. 경제위기를 겪는 와중에 "멕시코의 전철을 밟지 말자"라는 말이 언론과 방송에서 무지한 사람들의 화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해도 중남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단편적이며 천박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태리인들이 살고 있는 나라가 브라질이며, 그 이웃인 아르헨티나는 제2차 세계대전 전후만 해도 세계 4대 부국이였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 당시만 해도 많은 유럽인들에게 라틴아메리키는 미국과 별 차이가 없는 기회의 땅이었다는 사실도, [엄마찾아 삼만리]라는 동화가 '선진국' 아르헨티나에 식모살이 하러 떠난 엄마를 찾아 '후진국' 이태리 소년의 이야기라는 사실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비록 대부분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정치적으로 불안하지만 뿌리깊은 문화의 저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세계를 보는 방식은 우리처럼 1인당 GNP의 잣대에 짓눌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라틴아메리카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피가 섞이는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가 되어 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하고 복합적인 예술 전통이 형성되어 뛰어난 영감과 재주를 가진 예술가들을 배출해 냈다. 이는 혼혈이 병이 아니라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며, 상호 이해의 관용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형안을 허락해 주는 은총임을 알게 해준다.

반도에 위치한 우리들 역시 '반만년의 단일 민족'을 귀가 따갑도록 강조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허위의식의 발로임을 어찌 부정할 수 있을까? 피가 좀 섞이면 어떻고 안 섞이면 어떻단 말인가? 전염병도 아닌데. 중심민족이 어디 있고 변두리 민족이 어디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연신 '세계화'를 외쳐대고 영어와 해외여행에 죽고 사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과거의 파시즘과 나치, 유고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가까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일부 한국인들의 비열한 악행, 같은 황색인이면서 우리보다 좀 진한 황색인에 대한 우월의식, 그러면서도 세계일주 못하면 천국행 티켓을 놓치기라도 하는양 배낭여행으로 휴머니스트를 자처하는 우리들에게 먼저 여행전 라틴아메리카 문화세계를 탐색해보는 기회를 아랫글로 대신 합니다.

"다른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포용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데 얼마나 중요한가를 재삼 일깨워준다. 문화 공부는 일차적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내 안에 있는 타자성, 즉 본래면목을 찾는 순례여행인 것이다"

★참고 :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이해] 학문사★

 

라틴문화의 이해3-"하얀 산"과 "신들의 도시"

 

아메리카인의 기원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이 대륙에서 자체적으로 생성되었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부터 이주해 들어왔을까? 많은 인류학자 및 고고학자들이 지금껏 밝혀 낸 사실들에 근거해 볼 때, '인류다원 또는 다조(多祖) polygenesis'에 근거한 자체 발생의 가능성은 희박한 반면, '인류일원설monogenesis'에 근거한 타 대륙으로부터의 이주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곳으로부터 어떻게 두 개의 거대한 대양으로 타 대륙과 격리되어 있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해 왔다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세 가지 가설을 상정해 볼 수 있다.

1)흐들리카Hrdlicka를 축으로 하는 미국 인류학계의 주장으로서, 바이칼호에서 발원한 몽고족Mongoloid의 일원이, 아메리카 대륙의 마지막 빙하기였던 제4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10000-15000년 전에,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해수면의 강하(100m 정도)로 인해 베링 해협에 형성된 육교land brigde를 따라 또는 양대륙을 징검다리처럼 연결하고 있는 알류산 열도를 이용하여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해 왔다는 설(베링 해협의 수심은 약 60m이며 길이는 100km 정도임).

2)프랑스의 인류학자 리베River를 축으로 하는 일군의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베링 해협을 통한 이동 외에도 또한 말레이 군도인 및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들이 쪽배를 이용하여 태평양 해류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해 왔다는 설.

3)극히 소수 학자들의 주장으로서, 이집트 부근의 원시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한 후 대서양을 건너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해 왔다는 설.
위의 세가지 가설 중에서 현재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베링 해협 이동설이지만, 아메리카인의 기원에 관한 의문은 지금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고대문명(올메까, 아스떼까, 마야, 잉까)

1)올메까Olmeca
올메까는 메소아메리카(멕시코와 중미지역)의 가장 오래된 문화이며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큰 문명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심은 멕시코 동부인 멕시코만 기슭의 따바스꼬 고원이지만 오아하까Oaxaca주를 포함한 내륙고원지방에 전반적으로 그 영향을 미쳤고 후에 마야와 똘떼스까 문명의 기원이 된다.
라벤따, 꾸이꾸일꼬, 몬떼알반, 따한, 떼오띠우아깐, 뚤란 등 국가 이름으로 부족국가에서 도시국가로 부침을 거듭한다. 초기 올메까 문화는 수도였던 라 벤따 문화라 불리며, 건축물로는 빨렝께의 마야 유적에 있는 재규어 형상이
새겨진 석관이다. 그 당시 재규어는 힘과 권력을 상징하는 일종의 토템 동물로서 초자연적인 존재로까지 숭배되었으며 여기서 마야문명이 올메까 문명과 뿌리를 같이함을 알 수 있다. 올메까의 예술은 후에 이차빠와 사뽀떼까 그리고 마야 문명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멕시코의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로 꼽히는 몬테알반(하얀 산)이 바로 사뽀떼까의 수도였다. 현재 오아하까 주도
근처에 있는 이 유적은 장대한 석조 피라밋과 의식용 건축물들이 늘어서 있다.
커다란 산 위에 요새처럼 지어진 몬떼 알반의 유적을 전체적으로 보면 인간의 건축이 얼마나 자연의 풍경과 맞먹는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를 잘 드러내 준다.

 

라틴문화의 이해4-직경 3.5m, 24톤의 "태양석"

 

떼오띠우아깐은 최초의 도시문명이다.
현 멕시코시티에서 북쪽으로 50km 지점에 위치하며 해와 달의 피라밋과 껫살꼬아뜰 신전을 중심으로 구획된 웅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6세기말에 전성기를 맞은 떼오띠우아깐은 12만 평방km에 5만여 명의 주민이 1000여 개의 공동주택에 살았으며 600개의 크고 작은 피라밋과 신전들이 있었다. 이 도시의 중심대로는 '사자(死者)의거리'로서 폭 45m에 길이가 4km에 달하며 거리를 따라 옆으로 낮은 건축물이 줄지어 있다.
'사자의 거리' 북쪽에는 '달의 광장'과 '달의 피라밋'이, 동쪽에는 '태양의 피라밋'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에는 껫살꼬아뜰 신전이 있다. 태양의 피라밋은 건축과 조각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고대 아메리카인들의 예술에 대한 개념과 건축설계 기술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피라밋 높이는 66m이고 올라가는 계단은 45도로 경사졌으며 피라밋 밑변은 220x230m로 정사각형에 가깝다. 돌을 붙인 벽돌로 쌓아 올린 피라밋의 전체 크기는 백만 입방미터에 달한다. 이 피라밋의 서쪽에는 사각형의 단이 6도의 경사각으로 피라밋 밑부분에서 돌출되어 있는데 이 방향은 북위 10도 7시의 일몰 위치를 보이고 있다. 이 방위각은 태양의 회귀선으로서 하짓날 태양이 정확히 태양의 피라밋 정면을 비추도록 설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연과 문명이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축복하고있는 것이다. 거대한 신전의 계단 밑에 서있는 인디오는 신전 꼭대기에 있는 제사장을 잘 볼 수 없으며 단지 끝없이 위를 향해 있는 듯한 계단만을 바라볼 뿐이다. 이집트의 피라밋도 이렇게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건축되지는 않았으며 초자연적인 힘을 지배하는 인간의 환상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떼오띠우아깐은 기원후 700년경 이민족에 의해 멸망하지만 그 명성은 사라지지않고 후대의 부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다, 특히 아스떼까 부족은 이 도시를 '신들의 도시'라 불렀으며 귀족들과 신관들은 이곳으로 순례여행을 하곤 하였다. 유감스러운 일은 정복자들에 의해 파괴가 매우 잔인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원주민 예술 문명 발전사를 재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2)아스떼까Azteca
1325년경 제국의 수도인 떼노츠띠뜰란을 세웠다.
200년뒤, 아스떼까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은 그 자리에 현재의 멕시코 시를 건설했다. 아스떼까 제국의 수도를 처음 목격한 스페인 군사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웅장한 호반도시의 모습에 압도되어 넋을 잃고 보았으며, 스페인 연대기 작가들은 스페인의 어떤 도시도 떼노츠띠뜰란에 비교될 수 없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사실은 스페인 뿐만아니라 당시 유럽 전체 내에서도 이 아메리카의 도시에 견줄만한 도시는 없었다. 그 모형이 국립인류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인구 30만 명을 가지고 있던 떼노츠띠뜰란은 실로 16세기의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것이다. 도시에는 신전, 왕궁, 광장, 공원, 시장 그리고 동물원까지 있었으며 이것들은 거대한 피라밋들과 균형을 이루며 전개되어 있다.

아스떼까의 유산 중 오늘날 최고로 손꼽히고 있는것이 태양석' La Piedra del Sol 또는 아스떼까 달력Calendario Azteca이다.
아스떼까의 6번째 왕인 악싸야까뜰이 대신전에 안치할 목적으로 1479년에 태양석의 조각을 명령하였다. 1521년에 아스떼까 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인들
은, 태양석이 상징하고 있는 아스떼까인들의 믿음체계를 파괴하고 자신들의 기독교를 이식시키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이 태양석을 현재 멕시코시티 대광장 부근에 묻어버렸다.
그 후 수 세기가 흐른 1790년, 시청 공사 도중 거대한 원형석이 발굴되었는데, 당시의 천문학자 안또니오 데 게온 이 가마가 이것이 바로 태양석임을 입증하였다. 무게가 24톤 이상에 달하고 직경이 3.5m에 이르는 이 태양석은 현재 멕시코시티 국립인류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라틴문화의 이해5-마야 피라밋 계단수는 365개이다

 

3)마야문명Maya

중남미의 고대문명 중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마야문명은 꼬빤, 띠깔, 보남빡, 빨렝께, 욱스말, 치첸이사, 뚤룸 순으로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및 온두라스에 걸쳐 발전하였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상기 국가명이 현재까지 도시명으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마야 문명은 서기 4세기 초에서 10세기 초에 해당하는 구 마야제국과 10세기에서 14세기에 해당하는 신 마야제국으로 구분된다. 구 마야제국은 오늘날 온두라스와 과테말라 고원 밀림지역에 위치했으며 마야 문명 고유의 바로크적 예술을 창조한다. 신 마야제국은 유까딴 지역을 근거지로 발전했으며 검소하고 실용주의적이었다. 전후기 공통적인 것은 마야 예술이 사제들의 지도하에 신에게 봉사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불후의 건축을 하는 것은 곧 종교행위였기 때문에 다양하고 장대한 석조 도시를 건설해 신에게 바쳤다.
전기 마야시대의 주요 건축물운 학문과 천문관측의 중심지였던 꼬빤에 세워졌으며 여기에 완벽한 피라밋들이 세워졌다. 마야의 피라밋은 규모면에서 떼오띠우깐의 피라밋보다 20배 정도 작다. 그러나 마야인들은 질적인 면에서 보다 정교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크로폴리스 광장과 비슷한 종교행위 장소들과 조각이 되어 있는 각진 또는 원형의 돌기둥들이 이 고전시대에 건축되었다. 고전시대의 대표적인 마야의 유적지가 있는 곳이 오늘날 차아빠스 주의 깊은 밀림에 묻혀 있는 빨렝께Palenque이다.

후기 마야시대의 유물은 유까딴 남부 해안지역, 라스 무헤레스Las Mujeres 섬들과 꼬스멜Cozumel 지역에 보다 완벽한 형태로 분포되어 있다. 시의 중심부에는 사원과 아름다운 광장이 위치하고 있었고 그 주위로 귀족들과 사제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어있었다. 그리고 평민들의 주택은 그 밖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유까딴 북서쪽에 있는 치첸 이싸Chichen Itza는 마야시대의 가장 중요한 대도시이다. 치첸 이싸에서 우리는 두 가지 상이한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전형적인 마야 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똘떼까의 양식의 흔적이다. 똘떼까 영향은 사원의 기둥에서 나타나고 있는 깃털을 가진 뱀의 조각이다.
마야인들은 똘떼까의 영향으로 원형의 건물을 건축하기는 했지만 아치형의 건축양식까지는 알지못했다.
전기 마야의 피라밋들은 4면 중에서 한 면만 계단이 있는데 반해 후기 마야의 피라밋들은 4면 모두 계단을 만들고 있다. 각 면의 계단은 각각 91개로서 총 364개가 되는데 이것은 1년의 일수이며 여기에 정상의 재단을 더하여 365개의 계단은 태양력의 일수를 상징한다.

마야문명은 아스떼까 문명과는 달리, 고전기 이전시기부터 마야족으로 출현하여 고전기 이후 쇠퇴의 길을 걷가다 정복당하기까지의 오랜기간 동안에 유지되었던 문명이다. 아스떼까부족들과 동맹관계가 이루어지면서 헤게모니 경쟁을 위하여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리게된다. 그 결과 이 시기의 마야족들은 자체적으로 파괴되며 심각한 쇠퇴의 길을 걷는다. 스페인 군사들이 도착했을 대는 이미 마야의 찬란했던 문화는 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초라한 잔해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과테말라 지역의 마야족은 1525년에, 유까탄 지역의 마야족은 1541년에 손쉽게 정복당하고 만다. 정교함과 치밀함을 자랑하는 마야족은 세계의 어느 문명보다도 먼저 '0'의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러한 진보된 수학적 능력을 바탕으로 천문학, 점성술 및 연대기에 있어서 탁월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16세기에 마야 귀족의 후손들은 사라져가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그들의 고문서와 구전 풍습을 알파벳 문자로 기록한것이 오늘날 뽀뽈부와 칠람발람을 들 수 있다. 이것이 마야 문학의 기초를 이루게 되었다.

 

라틴문화의 이해6-잉까는 '태양의 아들' 의미

 

4)잉카문명Inca

띠아우아나꼬, 차빈, 모치까, 나스까 등 고대국가를 거친 잉카제국의 기원은 A.D 12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망꼬 까빡이 이끈 부족은 꾸스꼬 계곡에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세력을 잉카로 군림한 후 200년 동안 넓혀나갔다. 전설상으로 존재했던 선대 잉까들과는 달리 제9대 잉까인 빠차꾸떽(1408-1468)은 실존했던 인물로서 잉까제국의 토대를 이루어 냈다.
1533년 잉까제국은 프란시스꼬 삐사로가 지휘하는 불과 160여명의 스페인군에 의해 손쉽게 정복당하고 만다.
잉카제국의 영토는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들 중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또한 꾸스꼬를 수도로 건립하였다. 태양신전 꼬리깐차를 축조하였으며 삭사우마만 요새, 오얀따이땀보 그리고 마츄피츄 등에 남아 있는 잉까시대의 석조 건축물은 매우 뛰어난 기술을 보여주며 고대 그리스와 이집트의 정상급 건축물들과 필적한다. 가장 가까운 채석장이 15-35km의 거리에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수많은 거대한 돌덩이들을 산간지역으로 어떻게 운송했는지 신비하기만 하다. 시공 기술도 휼륭하여 페루에서 일어난 여러 차례의 지진에도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다. 잉까인들은 큰 석재를 잘단하여 접착제를 쓰지않고 접합하였는데 두 개의 돌이 접합하는 부분에 손가락이 대어도 이음매를 느낄수 없을 정도로 그 정확함은 경이적이다.

꾸수꼬를 방어하고 포위당하였을 때 주민들을 기거하게 할 목적으로 15세기 후반 꾸스꼬 북쪽 2km 지점에 건설된 삭사우아만 요새는 잉까의 석조건축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경이로움을 자아낸다. 이 요새에 사용된 돌 하나의 크기는 높이가 8m, 두께가 3.6m로서 무게는 무려 200톤 정도로 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잉까를 점령한 스페인 사람들은 꾸스꼬 시에 건물을 지으면서 조그만한 돌들을 사용하려고 삭사우아만 옥상 위의 건축물들을 기초 바닥부분만 남겨 놓은 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오늘날 유적지는 바닥부분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6세기 중반에 이미 파괴된 이 유적을 본 스페인의 역사가 빼드로 데 시에사는 요새의 장관에 압도되어 어떤 로마의 유적도 그 경이로움을 쫓아갈 수 없다고 적고 있다.

1911년 미국의 상원의원이자 고고학 교수인 히람 빙햄에 의해 발견된 마츄피츄는 안데스 산맥의 해발 2,700m의 봉우리에 숨겨지고 우루밤바 강의 계곡에 의해 들러싸인 요새 도시로서 잉까제국의 영광을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물이다. 그러나 수도인 꾸스꼬부터 113km 떨어진 이 도시가 과연 어떤 목적에 의해 건설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여러 건축 스타일로 건설된 궁전, 사원, 요새, 가정집, 광장 등이 있으며 고산지대임에도 불구하고 관개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그 위치로 볼 때 오얀따이땀보나 삭사우아만 처럼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건설되었다고 보기 힘들며 황제가 신과 직접 대면하기 위한 곳, 혹은 천문학적 관찰을 위한 곳이었다는 등의 설이 있으나 아직 밝혀진 것은 없다. 오로지 그 비밀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돌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고대문명들의 건축을 살펴보면 힘과 에너지가 넘치고 종교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 규모는 웅장하나 대체로 직각형태의 거석 건축이어서 투박한 느낌도 드나 이것을 서구의 미학에 의해 평가하는 것은 오류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건축이란 그 땅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자연이 던지는 질문에 대해 응답한 형태, 즉 신에게 봉헌된 인간의 자연관이자 자신들이 이해한 우주를 표현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왕인 잉까Inca, 왕비인 꼬야Coya, 및 왕의 자식들인 삐우이추리로 구성된다. 잉까라는 말은 인띱 추린Intip Churin이라는 태양의 아들을 의미하는 어휘에서 기인했다.

 

라틴문화의 이해7-알파카,콘도르,푸마-페루 토착어'께추아'어이다

 

중앙 아메리카 문명의 공통점

콜럼버스 이전 시대의 대표적인 문명이였던 올메까, 아스떼까, 마야, 잉까 등의 흔적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올메까, 아스떼까 그리고 마야 문명은 모두 지금의 중앙 아메리카에서 번성했으며 종교를 비롯해 여러 공통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상형문자를 사용했으며 나무껍질이나 사슴가죽을 이용한 육필 고문서
들을 남겼다.
둘째, 지도를 사용했다..
셋째, 태양을 주기로 해 일년을 365일 단위로 삼는 등 수준높은 천문학적
지식을 소유했다.
네째, 고무공을 사용해 오늘날 농구경기와 비슷한 운동을 했다.
다섯째, 담배를 피웠다.
여섯째, 옥수수와 호박을 주식으로 삼았다.
일곱째, 인신공양 제의를 행하였다.

산 살바도르(San salvador(성스러운 구세주)

이베리아 반도는 A.D. 711년에 모로족의 침입으로 무려 8세기 동안이나 이슬람교도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스페인은 국토회복 운동, 즉 레꽁끼스따를 전개하여 결국 1492년에 모로족을 완전히 축출한다.
그러나 당시 유럽으로부터 아시아로 통하는 육로는 회교도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는 상태였고, 또한 아프리까 해안을 따라 인도양으로 향하는 항로는 포르투갈이 개발에 착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스페인으로서는 또 다른 제3의 루트를 발견해야만 했다.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콜럼버스라는 한 모험가가 인류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선택되어 지는데,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확신하에 대서양을 횡단하여 인도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였다.
대서양을 가로 질러 인도에 도착하고자 했던 콜럼버스는 필연적으로 아메리카 대륙과 맞다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예정된 운명의 만남이였던 것이다. 1492년 10월 12일, 그는 바하마 군도의 한 작은 섬에 도착하였고 그 섬을
산 살바도르San salvador(성스런운 구세주)라 명명하였다. 콜럼버스는 1506년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그가 발견한 대륙이 인도라 여겼다.

실제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했을 당시 중남미에는 100개 이상의 많은 토착어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언어들을 뽑아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다섯 지역으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나우아뜰어(nahuatl) : 현재의 멕시코를 중심으로 한 지역.
께추아어(Quechua) :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바아, 칠레 남부 지역.
아라우까노어(araucano) : 칠레의 대부분 지역.
구아라니어(guarani) :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등지.
아라우아꼬어(arahuaco) : 쿠바, 푸에르토리꼬, 도미니카, 베네수엘라 연안.

특히 4백만 명의 사용인구를 가진 께추아어는 페루에서, 그리고 1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쓰는 구아라니어는 파라과이에서 스페인어와 공용어로 쓰이고 있다. 원주민 언어 중에서 많은 어휘들이 스페인어에 역수입되어 영향을 주었다. 그 중 일부는 영어와 불어 등으로 펴져갔고 외래어의 형태로 한국까지 흘러들어왔다. 그 중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들을 몇개만 들어보면,
카카오, 초콜렛, 치클, 토마토 (이상 나우아뜰어)
알파카 코카, 콘도르, 팜파, 퓨마(이상 께추아어)
카누, 따바꼬, 티부론, 사바나, 카니발(이상 아라우아꼬어)
재규어jaguar (이상 구아라니어) 등이다.

 

라틴문화의 이해8-21세기 세계 제2외국어는 스페인어

 

스페인어

수많은 원주민 언어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어가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 받아들여져 브러질을 제외한 18개국의 공용어로 사용되고 4억 이상의 사용인구를 가지게 된 데에는 베네수엘라의 인문학자인 안드레스 베요(1781~1865)와 스페인 학술원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스페인어는 비단 스페인어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불어, 독어권 그리고 아시아에서도 비약적인 신장을 이루고 있다. 스페인어는 영어와 함께 미래에 살아 남을 수 있는 언어로 꼽히고 있다.
더 나아가 스페인어는 21세기의 경제에서 영어와 더블어 가장 중요한 언어가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특히 미국에서서는 갈수록 스페인어가 확산되어 현재 3천만 명 이상이 스페인어를 구사할 줄 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50년 후가 되면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스페인어 사용 인구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으며, 공화당에서는 스페인어의 사용인구 급증에 맞서 스페인어 사용 규제 법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는 세계경제 무대에서 스페인어가 불어를 제치고 영어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제2외국어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의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는 최근 베르기슈 글라트바흐 어학훈련연구소(GIT)가 1천2백50개 독일기업 경영자들을 대상으로 경제분야의 외국어 사용에 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32%의 응답자들이 '2000년대부터는 스페인어가 세계경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제2외국어로 부상할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전했다.

이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중남미 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반영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불어는 현재 50%가 가장 중요한 제2외국어로 간주하고 있으나 2000년 이후에는 20.4%의 지지를 받는데 그쳤다. 다음으로는 중국어, 일어 등 아시아 언어들이 16.1%를 기록, 러시아어 등 슬라브계 언어(8.9%)보다 앞서는 것으로 조사됐다. (조선일보, 1997년 4월 12일자)

스페인어는 현재는 물론, 다가오는 21세기의 세계언어로서 배낭여행자뿐만 아니라 무역국가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배워 나가야할 것이라 믿습니다.
참고로 과테말라 안티구아 시에 있는 'IXCHEL 스패니쉬 스쿨'의 홈 페이지 주소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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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 me and I will forget,
(말만 해 준다면 망각할 것이고)

Show me and I will remember,
(보여 준다면 기억할 수 있고)

Innvolve me and I will learn.
(직접 참여시킨다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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