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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세월(안동집베란다)

by 발비(發飛) 2006. 5. 9.

 

세월

 

장석주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갔을까

어느날 갑자기 다리가 끊겨지고

몇 번의 암울한 세월이 곤두박질치며 흘러갔다

 

다시 봄이 와 터지는 부신 빛살속에서

벌떼들은 닝닝거리고

흰 꽃잎들은 흩어져가는 날들처럼 떨어져 날린다

 

빗방울을 움켜지고 있는 구름들은 흘러가고

들판에 얼룩처럼 남은 구름 그림자마저 흘러가고

폭삭 주저앉은 건물의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 있던 사람이 구조되고

끊어졌던 다리는 이어졌다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갔을까

 

멀리 떠났던 사람은 돌아오고

함께 살았던 사람은 헤어지고

적막을 밀며 흐르던 강물은

하단에 커다란 모래톱을 만들었다.

 

 

안동집 베란다에 가슴을 내밀고 섰다.

아파트 거실에는 아버지가 앉아 계셨고, 주방에는 엄마가 계셨고, 난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처음엔 10층아파트에서 곧바로 아래를 내려보았었다.

내 다리 밑으로 발이, 발밑으로 10.9.8.7......그렇게 1층까지 창들이 보일듯 보이지 않을듯

층층히 빛으로 대신했다.

매일 걸어다녔을 아파트 1층 출입구와 보도블럭, 그리고 아버지 차.

어느 때와 하나 다를 것 없이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참 오랜만에 그 곳에 서서 내려다 본 아래 아래는 참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그렇게 어지럼을 느끼며 굳이 내려다본 그 곳에서 눈을 떼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본 곳엔 참 넓은 세상이 있다.

낙동강 줄기가 보이고,

대구로 가는 국도가 보이고,

저 너머 저 너머 산들이라면 일직에 주소를 둔 산, 의성에 주소를 둔 산, 그리고 또 더 멀리 산들이 줄을 나래비로 서있다.

그것들도 어느 때와 다르지 않다.

낙동강도 그대로 흐르고, 산들도 그대로 푸르고... 멀리 본 세상도 그대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아버지는 거실에 계시고, 엄마는 주방에 계시고, 난 베란다를 내다보고 있고....

 

 

마당이 있었고, 마당에는 모과나무, 대추나무, 배나무, 석류나무, 감나무, 매실나무, 앵두나무가 담 앞으로 줄지어 있다.

나무들 앞 사이 사이로 도라지도 몇 포기 있었고, 사철나무도 있었고, 오엽송도 있었고, 아버지께서 화분 채로 마당에 묻어 둔 소나무 분재가 몇 그루 있다.

그 밑으로는 국화가 줄을 지었고, 채송화가 피었고, 엄마가 좋아하던 패랭이꽃도 몇 포기, 현관옆으로는 돗나물이 많이도 번져있었다.

또 수돗가에는 단오절이 되면 아버지가 잎째 꺾어 머리맡에 놓아주시던 궁구??(쑥처럼생긴건데...)이 풀이 향긋하게 자라고 있었다.

 

자랄 적에, 그래 자라고 있을 적에 우리집은 아파트가 아니고 마당집이었다.

 

창살대문은 지나가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이 우리를 볼 수 있었다.

밤이 되면 대문 앞에 빨갛게 켜진 가로등이 훤해서 베란다에 나와있기가 참 좋았다,

그 시간이 되면, 철철히 참 이쁜 냄새가 났었는데...

아카시아 향기도 진했고, 앞집 담너머로 전해오는 라일락냄새도 진했었고, 바람냄새도 ......

 

아버지가 안방에 계셨고, 엄마는 부엌에 계셨고,

오빠는 내 방 뒤에 있는 오빠방에 있거나, 안방에서 삐딱하게 앉아서 장학퀴즈에 나오는 문제를 잘도 맞췄다.

동생은 항상 대문밖 멀리서 동생이 골목대장을 하면서 휘젓고 다니는 소리를 바람소리에 묻혀 들렸다.

난 여기 저기......

 

아주 먼 이야기이다.

꿈처럼 멀리 있는 이야기이다.

 

멀리 아주 멀리 있었던 이야기가 아파트 베란다에 서서 본 멀리 혹은 가까이 있는 풍경을 보면서

휙 하고 지나간다.

뭘까?

 

세상일은 잊은 듯 문제를 맞추는 것을 좋아했던 오빠는 문제를 맞추고 있을 것이다.

그때도 내겐 참 어려웠던 장학퀴즈 문제를 잘도 풀었던 것처럼 지금도 내겐 참 어려운 문제를 어디선가 잘 풀고 있을 것이다.

자세히 잘 설명해줄까? 그럴 것 같다. 차근 차근.. 어깨를 두드리며......

 

항상 멀리서 들리던 동생의 목소리는 아직도 멀리서 들린다.

가까이에서 그 동생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참 어색할 것 같다.

이제 다음 주가 되면, 동생이 미국에서 온다.

동생도 오고, 또 동생이 된 동생의 아내 주희도 오고, 두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우리찐교도 온다.

눈앞에 있으면서도 멀리서 말하는 것처럼 아련할 것 같다. 설마....

 

항상 그 자리이다.

항상 그 자리인 것이 분명하다.

 

밀려 쓸려 앞으로 뒤로..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장석주 시인의 시처럼 우리들 저 밑으로 커다란 모래톱하나가 만들어졌다.

어느새 우리들은 모래톱에서 놀고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언제 이사온지도 기억에도 없는 아파트 베란다에 서 있는데 발밑이 저릿하다.

세월이 만들어준 모래톱에 서서 아직도 밀리고 쓸리는 강물이 발밑에 철썩거리는 것이 분명하다.

또 다른 모래톱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또 얼마가 지나야 할 것 같다.

때로는 멀리, 때로는 가까이 있는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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