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절거림

신사동에서 만난 다중영상

by 발비(發飛) 2006. 4. 6.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신사동 kfc 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비내리는 날은 돋보기를 댄 듯이 모든 풍경들이 자세하게 보인다.

창문너머로 원래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

신사역 전철 입구 계단, 검은 아스팔트 도로, 그 위를 달리는 버스, 그 건너를 달리는 승용차

길 건너편의 우뚝 선 건물, 건물에 달린 간판들.

그것은 실제 창문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이다.

바로 앞을 지나고 있는 우산 쓴 저 남자.

물론 존재하는 사람이다.

비오는 날 돋보기를 댄 듯한 세상에서 그 사람은 유령처럼 그 흔적만을 남겼다.

마치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저 남자 실재하는 사람이다.

유리너머. 아니 유리에 붙은 세상도 있다.

유리에 붙은 세상은 유리 안쪽의 세상이다.

내가 있고, 내가 마시던 냉녹차가 있고, 내 핸드폰이 있고, 그리고 불빛이 있다.

창너머의 세상과 겹쳐있지만 창너머의 세상이 아니라 창에 붙어있는 창안의 세상이다.

비내리는 날 유리창가에 있으면

몇 겹의 세상이 같은 공간에 함께 한다.

겹겹이 층층이 모여 있는 세상이다.

 

신사역 옆 kfc에 앉아있는 나는 몇 겹의 세상 어느 틈에 끼어 있다.

화석처럼 끼어 그 형체만 흐릿하게 보이고 있다.

다중세상에 끼어있는 내가 보인다.

 

몸을 비틀어보았다.

유리창위에서 끼어 있던 내가 꿈틀거린다.

세상이 하나 변하지 않았다.

난 움직이는데, 지나가는 사람도 여전한 발걸음으로 지나가고

내리던 비도 여전히, 지나가는 차들도 여전히 반짝이는 불빛도 여전히.

내가 움직이는 것과 상관없이 다중세상은 그저 제 갈길을 잘 가고 있었다.

흔들림없이 제 갈길대로 잘 가고 있었다.

 

비내리는 신사역 kfc에 앉아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비오는 날 유리창에 비친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가 내리지 않는 맑은 어느날에도 그리고 내가 저 길으로 나갔을 때도 나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세상은 돌아가고

나의 움직임이 세상에 아무런 방해를 받지도 주지도 않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 되나?

 

하지만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저기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남자는 실재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인데, 마치 형체가 없는 듯 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 반대도 가능한 일이다.

선명히 저 길을 걸어가면서도 거슬리지 않는 길을 걷고 싶다.

 

움직이나 움직이지 않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웃고 있으나 웃지 않는

만나고 있으나 만나지 않는

 

無爲 말이다.

 

신사역 앞에서 다중세상 안에서 無爲로 살아가는 꿈을 꿨다.

'주절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쇄용지샘플  (0) 2006.04.07
추천  (0) 2006.04.06
문 열린 1호선  (0) 2006.03.31
상상허기증후군  (0) 2006.03.28
전철에서 본 풍경  (0) 2006.03.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