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1.
지난 주부터 성철스님의 책을 읽기 시작했었습니다.
홍류동 계곡
.
이 계곡의 물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최치원은 이 곳 가야산을 떠나면서 시를 남겼습니다.
"계곡의 물소리가 산에게 귀를 멀게 하여 세상과 멀어지게 하는구나"
외지 못합니다. 아무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 곳의 정자이름이 '농산정'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나가는 차소리때문인지 계곡물소리가 그리 크게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들리지 않는 계곡 물소리에 귀를 세우고, 계곡을 끼고 한참을 걸어올라갔습니다.
홍류동 계곡을 꼭 보고 싶어 버스에서 좀 일찍 내렸더니 해인사는 참 멀었습니다.
하지만 성철스님께서 처음 출가하여 걸으셨을 길이라 생각하며 한 발 한 발 걸었습니다.
겨우살이
땅만 보기가 지루하여 하늘을 보았더니,
'겨우살이'라는 기생식물이 참나무에서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새들의 배설물에서 겨우살이의 씨앗이 나와 살아있는 나무에만 붙어 그 양분을 빨아먹고 자라는
그래서 추운 겨울도 견디는 '겨우살이' 였습니다.
사람같았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살아있는 것에 붙어 서로의 살을 피를 먹고 사는 것이 꼭 닮았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이 겨울에 초록을 선사하는 것이
우리 옆에 있는 못 믿을 인간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좀 비관적인가?
우리가 원하는 것과 그 분이 원하는 것..
사리탑들이 있었습니다.
사리탑이라기보다 비석같은 것들이 이끼와 더불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옆으로 ...엄청 크고 그리고 예술작품모양을 한 성철스님의 사리탑
마치 어린시절 보았던 충혼탑같았습니다.
씁쓸. 그 분은 평생 누더기에 수도만 하시다가 가신 분이신데...
아마 혼날겁니다. 그 탑을 만들자고 한 사람들은 분명 스님께 혼날겁니다.
그리고 걱정되었습니다. 오지랍넓게...
그 큰 돌에 언제 이끼가 다 끼이나?
그리고 앞으로 우리나라엔 스님 같으신 도량이 다시는 없을건가?
마치 마침표처럼 보였습니다.
해인사는 무지 커서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제가 가보고 싶었던 곳은 '백련암'
성철스님이 거의 평생을 수도하시던 곳.
해인사와 백련암을 수없이 오고 가셨을 그 길을 한 번 밟아보고 싶었습니다.
길을 잘 못들면.
맙소사
몇 번을 물어 물어 찾아들어갔습니다.
참고로 전 까만 썬그라스에 빨간 파카를 입고 있었습니다.
느낌이 이상하다 싶었는데, 웬걸....
가사를 입으신 스님들께서 백명은 안되어도 그 즈음은 되어 보이는....
줄을 잘 서서 나오십니다.
'이건 아니다.'
"보살님, 왜 여기 계십니까?"
"백련암을 가는 중인데요."
"여기는 수련중이므로 아무도 못 들어오는 곳입니다. 따라오시지요."
다른 스님들이 힐끗 보십니다.
그 스님을 따라 잘 못 들어도 한참 잘 못 든 길을 다시 내려갑니다.
수도하시는 분들을 잠시 흔들어 놓은 것 같아 정말 죄송했습니다.
딱따구리
백련암은 꽤 멀었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못 박는 소리가 났습니다. 요즘 절은 공사를 많이 하지요.
또 들립니다. 소리 나는 쪽을 보았습니다. 찾았습니다.
처음으로 딱다구리를 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작았고 예뻤습니다.
그 작은 새가 숲을 울리도록 나무를 쪼고 있었습니다.
제가 걷지 않으니, 바지 소리가 안 서 더 크게 들렸습니다. 서서 딱다구리를 보았습니다.
그 분이 이 길을 걸으실 때도 벗 삼으셨겠지요.
자기를 바로 봅시다.- 성철 前 조계종 종정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입니다.
자기는 항상 행복과 영광에 넘쳐 있습니다.
극락과 천당은 꿈속의 잠꼬대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합니다.
설사 허공이 무너지고 땅이 없어져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유형(有形), 무형(無形)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그러므로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 등등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자기 밖에서 진리를 구하면, 이는 바다
밖에서 물을 구함과 같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하므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걱정하며 두려워하여 헤매고 있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 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 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백련암에 도착했습니다.
위의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려고 이 곳을 찾아왔나보다 했습니다.
백련암 앞뜰에 빨간 장미가 피어있었습니다.
얼어서 시들지도 떨어지지도 못한 체 냉동된 장미가 있었습니다.
봄이 오면 장미는 그 꽃잎을 내려놓겠지요.
저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장미송이들.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가슴이 벌렁벌렁 했습니다.
적당한 거리 그리고 간격.. 유지
올라간 길을 다시 내려갔습니다.
팔만대장경.
유난히 그 곳엔 풍경이 많이 달려있었습니다.
기와의 주름마다, 담벼락마다 풍경이 울리고, 그 소리는 자꾸 잠자려하는 목판들을
깨우는 죽대같았습니다. 참 많이 딸랑거립니다.
그리고 하나 더 ...간격
팔만대장경은 땅위로 적당한 간격, 건물과 적당한 간격. 그리고 저들끼리 적당한 간격
창살 사이로 들여다보는데 모든 간격이 일정했습니다.
더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간격.
사람도 그렇겠지요. 적당한 간격을 가지는 사람들은 절대 헤어지지 않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적당한 간격을 가져야겠네요..
설 차례를 지내고 떡국을 먹고....
모두들, 가벼운 맘으로 해인사를 가기로 했다.
이건 순전히 어른들의 결정이다.
사실, 난 조카와 함께 이미 집을 나와 마을탐방에 나섰더랬다.
-잠시 딴 소리-
조카? 그런데 다 큰 조키다.
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사촌 큰오빠와 아버지가 같은 연배이고,
조카들과 우리가 같은 연배다.
대를 이은 호칭의 난감함이 이젠 즐기기도 한다.
난 다 큰 나와 비슷한 또래의 고모이고, 난 나와 같은 세대의 조카를 두고 있다.
우린 호칭으로 장난을 친다,
-잠시 딴 소리 끝-
성철스님의 사리탑.
1년전 겨울 성철스님의 흔적을 따라 이 곳에 온 적이 있었다.(그 때의 기록은 맨 아래 있다)
일년이 지나 다시 보아도, 저 사리탑은 성철스님이 별로 좋아하시지 않을 듯하다.
성철 스님의 거대한 사리탑 아래 이 곳 해인사에서 입적하신 다른 스님들의 사리탑이 나란히 있었다. 난 이 곳에 나란히 있으신 성철스님이 참 아름다우실 것 같은데...
유언도 그리 하셨다는데...
성철스님 사리탑 맞은 편에 커다란 고사목에 잔가지 몸 붙여올라가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
고사목에 나무들이 붙어 봄이고 여름이면 고사목은 보이지도 않을 듯한
사리탑을 책망하는 듯이 맞은편에 서있었다.
해인사 입구.
설날 해인사는 아주 조용했고,
우리 가족들은 조용한 해인사를 오르며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했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사촌오빠들과 이야기를 하고, 새언니들과 이야기를 하고,
아버지, 엄마와 이야기를 하며 얕은 경사길을 올랐다.
발자국소리와 이야기소리가 같은 톤이었고, 바람소리 또한 같이
모든 움직임의 높이가 찬찬했다.
지난번에 해인사를 왔을 때도 유난히 풍경들이 눈에 많이 띄었더랬다.
그때 팔만대장경이 잠들지 않도록 풍경이 쉼없이 잠을 깨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풍경소리... 높지 않으면서 깨우는, 나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깨우는 왠지 풍경이 바람에 딸랑거릴때마다 작은 솜털이 일어났다. 잠들지 않도록 지키는 보초병이다.
파란 하늘아래 나무가지에 앉은 까치 또한 풍경이다.
깍깍!!! 그렇게 울어대는 또 다른 풍경
난 해인사하면 풍경이 떠오른다.
팔만대장경이 빼곡히 정리되어있다.
매달려 녹슬고 있는 열쇠, 한때 막중한 업무 수행한 열쇠이다.
쓰임에 대해...
한때 꼭 필요한, 지금은 아닌
한때 쓸모없던, 지금은 중요한
한때 움직이던, 지금은 움직이지 않는
그 리듬을 타고 있는 우리 그리고 나.
열쇠를 열쇠주머니에서 꺼내 손으로 만지작 거리다 넣어놓았다.
몇 번의 손길에도 반짝거린다.
사람의 손보다 빨리 따뜻해지는 열쇠였다.
네모문 사이로 동그란 문이 뚫려있다.
똥그랗지 않아서 더 이쁜, 세계문화유산을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있지만,
똥그랗지 않고, 대충 둥근 모양으로 가까이 있는 문틀이 좋다.
나도 똥그랗지 말아야지.
사람들이 똥그랗지 않다고 웃더라도, 똥드랗지 말고 대충 둥글러야지..
웃을 수 있게...
저 문을 보면서 난 웃음이 나왔다. 이뻐서... 나도 딱 저렇게 이쁜 사람이고 싶다.
나의 조카와 나의 아버지..
조카와 나의 나이차 ... 근접이다.
우리 아버지는 저 조카들때문에 마흔쯤에 아니면 더 어렸을때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고.
난 초등학교때 고모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모는 고모지..
조카와 간만에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면서... 흑! 난 좀 상심했다.
이젠 묻기에 급급하다.
너 저금 얼마하니?
많이 했구나?
벌써 그런 계획을 세웠어?
아 상심이다. 맘을 다쳤다. 세상에 어두운 고모가 얼마나 웃길까?
참 단단한 조카다...
그리고 참 멋진 조카다...
드디어 백련암!
작년에 이 곳을 찾았을때는 준비를 했었다.
정찬주님의 소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소설을 읽고,
성철스님이 출가한 길을 기록해두고, 그 분의 움직임을 따라 나도 움직여봐야지 하면서...
그리고 따님인 불필스님이 성철 스님을 찾아갔던 그 길을 같이 움직여 봐야지 하면서...
아주 찬 날씨의 겨울이라 더욱 더 실감이 났었다.
그 때 길을 잃어서 잠시 아찔했지만, 그렇게 꼼꼼히 해인사와 백련암을 혼자 걸어서 움직였다.
참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백련암을 혼자서 걷던 길.
딱따구리의 나무 쫓는 소리며, 길에서 만난 할머니며..
하지만 이번에는 차로 움직였다.
일년만에 다시 찾은 백련암은 포장되어있다.
기운이 다름을 느낀다.
성철스님이 묵으시던 방의 아궁이다.
이제 이 아궁이는 사용하지 않는가보다.
1년 전의 그곳이 아니다.
참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모두 지워버렸다.
백련암...
작년의 백련암도 그 분이 계셨을 때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지만,
일 년 뒤의 백련암은 완전히 변했다
모두 저 아래 성철스님의 사리탑과 닮았다.
몇 개의 건물이 붙어 자라고 있는 듯 싶다.
원래 있었던 건물에 축을 만들고 지붕을 잇고, 앞 계단을 만들고 옆 길을 만들고.. 기생하는 건물이다. 원래의 몸을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12월에 난 백련암 마당에서 언 장미를 보았었다.
혼자서 헐떡이며 올라간 그 곳에 빨간 장미가 파란하늘을 배경으로 핀 채로 얼어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이.
물론 그 장미가 오늘도 기다리고 있을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이건 너무 하다.
큰 법당이 하나 거의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부처님이 아니라 성철스님이 거기 앉아계셨다.
그리고 그 분의 다비식 장면 그림을 옆에 놓아두었다.
난 왜 김일성동상이 생각난거지?
어쩌면 김일성 동상이 생각난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성철스님은 갓 스무살의 나이에 출가하셨다.
그러면서 출가시 한 편을 쓰셨다.
彌 天 大 業 紅 爐 雪
跨 海 雄 基 赫 日 露
誰 人 甘 死 片 時 夢
超 然 獨 步 萬 古 眞
하늘을 두루 덮는 큰뜻도 붉은 화로불의 한점 눈이요
과히 바다를 걸터 넘을 영웅의 틀인들 밝은날 아침의 이슬인것을
누군들 죽는것을 답갑게 여길건가? 모두가 한때의 꿈인것을
홀로 이 만고의 진리를 찾아 외로이 가리다..
-성철큰스님20세에 쓴 출가시
그 분은 이 출가시의 약속을 평생 지키셨고, 영원히 지키고 싶으셨을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좀 많이 화가 났다.
이 출가시는 성철스님의 상이 세워진 법당 옆의 게시판에 작게 인쇄물로 붙어있었다.
1년전 백련암에서 받았던 감동
찬 바람을 맞으며 홀로 올라갔던 백련암의 고적함에서 그 분을 만났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난 참 충만했다.
멋진 기억이었다.
이 곳을 다시 찾지 않았으면 하는 맘이 컸다.
올라가면서 조카에게 1년전 내가 받았던 감동을 이야기 해 주었었는데,
내려올 때는 아무말도 못했다.
그 분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교육(?) 시키는 곳이다.
작년 내가 길을 잘 못 들어 금녀의 구역으로 침투했던... 그 곳에서 공부하고 계신 스님들.
그 분들이 부처과 가까워져 해탈의 경지에 이르시기를
그리고 그 분들을 스쳐 지나갔던 우리들이 그 분들의 발자국을 따라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참 21세기는 수도하기에도 너무 열악하다.
풍부해서 열악하다.
해인사를 가기전에 만났던 사과무지(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흠이 있어서일까? 아님 썩어서 였을까?
아무튼 보기에도 상당히 큰 사과들이었지만, 사과나무 아래서 푹푹 썪고 있었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썩은 내가 나지 않는 썩은 사과들이다.
비록 썩더라도 그 쓰임의 목적에 따라 구리기도 하고 달기도 한다.
썩어문드러져도 달디 단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내가 썩을 것은 분명하다.
누구나 썩을 것은 분명하다.
썩어도 썩은 내가 나지 않기 위해 죽어도 죽음이 끝이 아니기 위해
지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죽어서도
언제 죽더라도
어떤 모습으로 죽더라도
썩은 내는 풍기지 말아야 겠다.
설날, 해인사를 다녀오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하고 나쁜 것이 좋은 열매를 맺기도 한다.
저 사과처럼...
저 사과같은 짧은 여행이었다.
아래는 작년 해인사를 다녀온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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