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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남덕유산 산행기

by 발비(發飛) 2006. 2. 7.

주절거리 전 잠시 이대로 둬 봅니다.

 

 

 

지난 가을, 두타산을 산행한 후로 어찌 어찌 산행 한 번 하지 못하고 해를 넘겼다.

지난 해는 겨울 눈 산행을 지겹도록 다녔었는데,

겨울 산행!

언 바람을 맞으며 얼어버린 몸을 끌고 올라가는 한마디로 고통스러움이다.

겨울 산행을 한 번 하고 나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겨울산행을 하는 이유이다.

 

 

 

전날 두시간 잤다.

그리고 밤 11시에 서울을 출발해서 새벽 3시에 도착.

 

육십령 → 북능선 → 할미봉 → 서봉 → 남덕유산 →영각사

 

바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 달이 없다.

별이 수천 수만개가 하얗게 뿌려져 있었다.

달이 없어서 더 많이 빛나는 별... 그리고 어둠때문에 더 많이 빛나는 별.

 

캄캄한 길

아이젠을 찬 신발

눈길, 얼음길

그리고 바위타기.

 

눈 위로 걸쳐진 로프에 몸을 싣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발끝으로만 감각을 느끼며

바위를 딛으며 내려간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볼 수도 없다.

로프에 몸을 의지하고 믿어야 한다.

아이젠에 몸을 의지하고 믿어야 한다.

그렇게 맘을 놓고 가장 동물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나를 완전히 던져버리고 태초에 생산된 동물의 모습으로 로프를 타고 내려오면,

두 발이 편편한 곳에 도착하면 느끼는 안도와 기쁨.

아마 , 완전히 내가 없었던 시간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만히 볼 산이 절대 아니다.

 

 

어둠 속에서 바위를 오르고 내리고, 가파르고 미끄러운  눈길을 4시간을 걸은 뒤에 올라선

육십령.

 

여명이 비친다.

사진보다 더 어둔 여명이 서서히 몰려오더니, 붉게 번지기 시작했다.

아직 오르지 않는 해의 기운이 산 위로 넘치고 있었다.

떠날 수가 없었다.

 

일행들이 가야한다고 보챈다.

해는 어디에는 있는 것이지.

 

 

육십령을 뒤로 하고 북능선을 타고 할미봉을 지나면서 이제 밝아지기 시작했다.

후레쉬이 필요없게 되었다.

난 사실 후레쉬을 가지고 가지 않았었고, 뒤에서 조명감독이 나를 비춰주었었다.

난 그를 후레쉬맨이라 칭했다.

날이 밝아지자 후레쉬맨은 제 할 일이 끝났는지 그 이후론 같이 하지 못했다.

묵묵함.

 

후레쉬없이 바닥을 걷을 수 있다는 것은 무지 편안한 일이다.

앞이 보이는 산을 오르는 순간 고통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해는 아주 천천히 올랐다.

할미봉을 지난 서봉으로 가는 능선에서 만난 해이다.

이제 산위로 쑥 올라왔다.

바위 사이로 붉게 올라오는 해를 보며 행운이야. 이건 행운이야 하고 생각했다.

아주 오래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아름다운 일출이었다.

어둠이 그만큼 깊었다.

 

 

해가 완전히 떠올라 사방이 환했다.

아쉽다.

어둠이 나를 그리 힘들게 했음에도 어둠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드러나는 환함이 아쉬웠다.

인위적으로 연장시켜본다.

카메라의 노출을 죽이고 최대한 어둠모드로 끌어내렸다.

빛이 사라졌다.

해는 하늘 가운데로 향하는데, 카메라 앵글안의 빛은 사라졌다.

변덕스러움

빛과 어둠 그 사이를 맘대로 건너다니고 싶은 이중인격자.

 

 

 

남덕유의 정상이다.

사방이 툭 틔였다.

산의 골격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노란 등산복을 입으신 분이 자리에서 떠나질 않으신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에라 그냥 찍고 집에 가서 편집기에서 자르기를 해야겠다 싶었다.

그리고 사진을 올리면서 저 분을 잘라내었었다.

그런데 산에 사람이 없으니, 산이 허전했다.

할 수 없이 다시 초기화.

뉘신지 모르지만, 초상권 침해가 분명하다.

 

겨울산은 창피할 것 같다.

 

 

하늘은 얼마나 높은 곳일까?

구름에서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린다지만, 아닐 것 같다.

구름보다 더 높은 곳에서 천천히 내려오느라 힘들었을 눈이다.

내려오다 내려오다 결국 땅에까지 스미지 못하고 산죽에 몸을 뉘였다.

 

"쉬고 싶어."

"잠깐만 쉴께."

"땅에 닿으면 또 가야 할거야."

스미고 스미고 스며들어 물길을 따라 또 가게 될거야."

"여기서 좀만 쉴께."

 

눈은 잠이 든 듯 기척도 없다.

산죽 얇은 이파리가 뭐라지도 못하고, 그저 무게에 얇은 이파리가 기우뚱 기우뚱 거린다.

기우뚱 하지 않으려 몸이 몸을 잡고 있다.

 

 

 

10시간의 산행을 했다.

같이 간 일행들 이야기는 빠졌지만,

그들이 있었기에 이틀동안 총 3시간반 밖에 자지 못한 멍함으로도 산행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 하산길.

다리가 풀려서 일곱번 반이나 넘어지면서

그런 나를 모두 기막혀하면서......

 

모르는 등산객들도 기가 막혀하면서. "그런데 어떻게 산을 다녀요?" 그러더라.

 

속으로 이야기했지. "그런데도 다녀요."

 

지금도 엉덩이가 아파서 잘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건 내가 본 일출과 바위타기와 얼음길 걷기와 정상에서의 맛난 점심에 비한다면

게임이 안된다.

 

열 번을 넘어지더라도, 스무 번을넘어지더라도

항상 빨딱 빨딱 일어나는 것이

언제나 숨쉬려고 할딱거리는 것이 나이니까...

 

오랜만에 한 산행이 힘든 산행이라 좋았다.

다양한 산길이라 좋았다

빛과 어둠을 함께 한 산행이라 좋았다.

복잡하던 머리가 가벼워져서 돌아왔다.

 

딱 좋았다!

 

다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 같고, 다시 주절거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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