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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몫에 대하여

by 발비(發飛) 2006. 1. 24.

- 루가복음 10장 38절 ~42절-

 

예수 일행이 여행중 어떤 마을에 이르렀을 때,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그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드느라,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 데 이걸 보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라고 일러주십시요."

 

그러자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면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을 택했다. 그 몫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2005년 3월 4일

 

아마 3년 아니 4년전 이 성경말씀을 읽었다.

세상에는 참 좋은 몫을 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공존하는 곳...

예수님은 둘 다 있어야 하는 사람임을 말씀하신다,

마르타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아시는 것이겠지.

앞으로 또 3년 4년 뒤 이 성경말씀을 다시 읽을 수 있겠지?

난 마르타? 아니면 마리아?

세상엔 둘 다 필요하다

 

 

 

2006년 1월 24일

 

문득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일기에 썼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일기가 생각이 났다기보다, 다시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간 날이구나.

 

어느 날들은 내가 마르타인 줄 알았다. 좋지 않는 몫을 가지고 태어난 마르타.

그리고 어느 날은 내가 마리아인 줄 알았다. 좋은 몫을 가지고 태어난 마리아.

 

예수님은 그저 그렇게 말씀 하셨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그 몫으로 사는 것이니 빼앗지 말아라고...화가 났었다.

 

성경에서는 내세도 없다면서,

그렇다면서 그냥 몫대로 살라니 이건 너무나 불공평하다.

투덜거리는 마르타는 불평 불만을 했으므로 감점이다.

그럼 천국과는 좀 멀어진건가?

물론 다른 곳에서 점수를 얻었겠지.

 

그렇지만 한 번 생으로 끝난다는 성경안에서,

그리고 천국에 가면 부모도 형제도 아무런 관계도 의미가 없는 그런 것이 존재하고 인식되지도 않는 곳이라면서...

그래서 좋은 곳이라면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천당과 지옥 이라는 이분법, 아니 연옥을 끼어넣는다 치더라도...

그렇더라도 지금의 몫이라는 말로 덮어버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그렇게 속이 좀 상했다면 난 내가 마르타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싶다.

 

갑자기 이 성경 구절이 왜 생각났을까?

나를 심문하기로 해본다.

내 몫. 다시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

왜냐면, 지금 다시 저 위의 성경을 읽었는데 이라는 말만 눈에 끼어든다.

 

 

 

-잠시 딴 소리-

 

논어에서는 천명(天命)는 말이 나오고 품부(稟賦)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이라던가 윤회라는 말로 운명지어진 어떤 것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성경에서 말하는 몫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두들 그렇게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 혹은 인간의 간절함 때문이다.

그런 것이 없기를 바라는 간절함 때문에 모든 종교에 대해 어긋장을 놓는 것이다.

 

-잠시 딴 소리 끝-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내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야기한다,.

그 정도면 됐지! 뭐가 그리 문제가 많아! 무슨 생각이 그리 많아!

 

그저 오늘은 책을 좀 읽고 싶었다.

사진이나 그림이 아닌 책을 좀 읽고 싶었다.

남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남의 글을 읽는 것이라기보다 남의 글이라는 거울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다.

 

난 오늘 실비아 프란츠의 일기를 조금 읽었고, 황인숙시인의 시집을 조금 읽었고, 또 ...

몇 권을 산만하게 뒤적였다.

실비아 프란츠의 삶이나, 황인숙 시인의 삶이나, 혹은 그들의 글.

그것들을 보면서 사람의 삶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참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옥이 따로 없고 천국도 따로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리아와 마르타로 돌아온다면,

마르타가 몫을 인정하지 않으면 지옥이고, 인정하면 천당이 되는 것이다.

 

그저 예수님께서는 지금 마르타가 살고 있는 이 곳을 마르타 자신이 천당이라고 생각하기를 바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천당과 지옥은 객관이 아니라 지독히도 주관적이니까...

공자님도 부처님도, 모두 어쩔 수 없이 주관적인 세상에서 주관적으로 행복하길 바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몫이라는 이름으로

천명이나 품부라는 이름으로

업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는 인간에게 주관적인 행복을 주고 했음일 것이다.

그저 몇 권의 책을 읽다가, 나라는 인간을 비우지 못하고 끊임없이 끼어들었다.

나를 찾아가는 길이 참 먼데, 자꾸 쉬기만 한다.

잠시 내가 어디있는지 또 나의 발아래를 보았다. 난 지금 이 곳에 있다.

작년 3월 어느 날과 지금 나, 그만큼씩 앞으로든 뒤로든 움직이는 내가 있다.

 

- 잠시 딴 소리-

 

논어의 구절을 언급한 김에 옮겨둔다.

긍정적 결말이니,,, 해피앤딩으로 처리하고 싶고, 힘을 얻고 싶다.

논어의 어떤 구절들보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구절들이라고 생각한다.

검색해서 다시 읽어보니, 느낌이 많이 다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성인의 말씀이다.

 

 

논어 述而篇

 

1. 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군자의 이상적인 생활이란 도에다 뜻을 두고 덕을 닦으며,인을 의지하며 예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2. 暴虎氷河, 死而無悔者, 吾不與也, 必也臨事而懼, 好謀而成者也.

맨 손으로 범을 잡으려 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려는 사람은 소용이 없다. 차라리 일을 두려워하며 신중한 사람을 쓰겠다.

 

3. 子曰, 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어도 즐거움이란 그 속에 있으며(학문하는 즐거움), 의롭지 않은 부와 귀는 나에게는 하나의 뜬구름과 같다.

 

4. 發憤忘食, 樂以忘憂, 不知老之將至云爾.

학문을 좋아 하면 먹는 것도 잊고, 학문을 즐김에 걱정도 잊으며, 늙는 일조차 알지 못한다.

 

5. 子曰, 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세 사람이 같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 될 만한 사람이 있다.

그들의 착한 점을 골라서 따르고 나쁜 점은 살펴서 스스로 고쳐야 한다.

 

6. 子曰, 奢則不孫, 儉則固, 與其不孫也寧固.

사치하면 불손하기 쉽고, 검소하면 고루해지니, 거만한 것보다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낫다.

 

7.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

군자의 마음은 평탄하고 너그러우며, 소인의 마음은 항상 근심에 차 있다.

 

 

횡설수설....난리다.

시작은 루가복음으로 해서 끝은 논어.. 산만의 극치를 달하지만, 내 맘이 시키는 길로 따라왔다. 그리고 뭔지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복잡하던 맘이 좀 정리가 된 듯하다.

 

역시 내 손은 나를 위로해 주는 유일한 아군이다.

손에다 뭔가를 맡기면 정리를 좀 해준다.

내일 아침 다시 이 글을 읽으면서 할 이야기가 있을 듯 싶다. 다시 내일 아침을 기대한다.

 

자! 다시 아침

 

 

난 출근을 했고, 내가 새벽 두드렸던 이야기를 꼼꼼히 읽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비몽사몽간에 왜 저렇게 많은 논어구절을 갖다 붙여놓았는지에 관해서는 알 것 같다.

단 한 구절을 쓰기 위해 저 많은 구절을 갖다 놓은 것이다.

내가 가져다 놓으려 했던 구절

 

飯疏食飮水하고 曲肱而枕之라도 不亦樂乎아

 

뒤의 말이 틀리지만, 난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성글고 모진 밥을 먹고 물을 마시면서, 팔을 굽혀 베개를 삼고 잠을 자더라도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바로 이 구절때문에 저 많은 구절이 나왔다.

2006년을 살면서 고민 많고 갈등 많음의 근원이 학문은 아닐 것이다.

또한 명예도 아닐 것이다.

어떻게 잘 먹고 잘 사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맘 먹기에 따라서는 불역락호아도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르타가 노동의 몫을 가지고 태어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발밑에서 들을 수 있는 명예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

그런 차이가 있지만, 그 몫안에서 즐길 수 있다면,

그저 모진 밥을 먹더라도 그 안에서 그저 즐길수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의 몫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처음 내가 괜히 우울하게  짜증스러웠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그저 난 이렇게 나를 다독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

 

난 어젯밤 좀 꿀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그들은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다. 누구 못지 않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실비아 프란츠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황인숙 시집은 그 것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황인숙 시집은 세상에서 발을 딛고 살면서 구름위를 다니고 있는 그런 여자의 시이다. 시인이 구름위를 다니면서 둥둥뜨는 행복을 맛보았을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난 참 애를 쓰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때문에 즐거운 시읽기를 하면서도 실비아의 일기와 같은 묶음이 되었다)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 책을 읽으면서 난 마르타와 마리아가 생각났다.

 

길 밖을 나가면, 수백만원짜리 밍크코트에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화려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들에게 삶은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과는 다르다.

 

그리고 또 길 밖을 나가면 리어커에 갈라진 손을 하고 노점을 차리고 있는 사람들도 본다.

그들 가족이 모두 옆에 붙어 웃고 있는 모습도 본다.

그들이 감자탕 2분 14000원을 시켜놓고 네 식구가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몫이라는 것은 맞다.

 

예수님이 말하는 몫은 공자님이 말하는 품부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업이라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무늬가 아니라, 우리가 가지는 희노애락의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노애락의 잣대는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무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니까...

 

다시 다독인다.

실비아 프란츠가 그녀의 삶을 점철했던 파편조각과 열정은

또한 그녀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고통을 통해 느꼈을 카다프시스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그녀는 아무도 즐기지 못했던 고통을 최고조로 즐기고 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녀의 고통 배인 산문들이나 시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고 위로하고 그리고 자신을 대입하는 것..

그건 그녀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었을런지 모른다. 그녀가 몰랐다면 신이라도 알았을 것이다.

그냥 몫대로 산 것이리라.

 

바람이 뒤에서 불기를 ...

내 등 뒤에서 바람이 불기를....

그래서 난 그 바람에 밀려 힘을 빼고도 갈 수 있기를...

바람에 밀려 가는 길이 내 몫을 찾아가는 길이어서 쉽기를....

주체인 나도 , 객체인 그들도 , 주관자인 신도 모두 쉽기를...

모진 밥을 먹고 살더라도 꿀떡꿀떡 잘도 넘어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

마르타 처럼 누구의 시중만 들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일수 있기를....

 

바람이 등 뒤에서 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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