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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정채봉] 그 분의 5주기에

by 발비(發飛) 2006. 1. 10.

[눈동자속으로 흐르는 강물]

 

정채봉 문학아카데미 1997

 

어른을 위한 동화?

정채봉선생님의 5주기... 어떤 동화 한 편을 옮겨놓고 싶은 생각에  가지고 있는

[눈동자속으로 흐르는 강물]을 후루룩 넘겼다. 참 고운 결을 가진 이야기들이다.

 

결국 내가 고른 것은 그 분이 쓴 머릿말 '이 책을 읽는 분들께'이다. 옮겨본다

 

-이 책을 읽는 분들께-

 

나의 친구 가운데 '과학자'가 있습니다.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늘 별난 연구에 몰두해 있는 사람입니다.

친구끼리 모이면 간혹 묻습니다.

"과학자. 요즈음 발명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늘 청소기일세."

"하늘 청소기라니?"

"하늘을 그을러 놓은 매연, 그리고......"

그러면 친구들은 과학자의 입을 얼른 막습니다. 그 다음에 쏟아질 질책을 여러분들은 아시겠지요?

그렇습니다. 과학자는 이웃들로부터 '미친 사람' 이라는 소리를 종종 듣습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공상일랑 집어치우고 하루 밥 세끼 빌어 먹을 궁리나 하라고 야단을 맞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다락방의 작은 책상앞에서 날마다 밤 늦도록 전구에 불을 물리고 있습니다.

한 달 전 일입니다

과학자를 만났더니 그는 모처럼 얼굴이 밝아서 나한테 살짝 말했습니다.

"요즈음 하늘은 늘 지저분한네. 별 해괴한  소리들이 날아다니는가 하면 별 희한한 사진들이 날앋니지 않는가. 그것들은 대개 라디오나 텔레비젼의 안테나에 걸려서 우리한테로 들어오지. 그러나 나는 지난해부터 어른들이 만든 그런 지저분한 것이 걸리는 안테나가 아닌 살맛나는 동심의 이야기를 들어볼 안테나를 만들 수 없을까. 그걸 연구하고 있네."

"아, 그래 이번에는 작품이 완성될 것 같은가?"

"될 것 같아. 오래 쓰지는 못하더라도 단 한 번 쓸 수 있는 것은 만들 것 같아."

그런데 어젯밤 갑자기 과학자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얼마 전에 말했던 그 안테나를 만들었네."

"아, 그래 어떤 것인지 궁금하네."

"흰구름 안테나일세. 그러니까 이걸 세워 텔레비젼에 연결하면 화면에 흰구름이 나타나서 이야기할 걸세."

"흰구름이 이야기를 한다고? 그거 재미있겠는데."

"그래, 자네는 동화를 쓰니까 이해가 남다르군. 그러니까 내가 이 안테나를 자네한테 줄려고 가져온 거야."

"나한테 주다니?"

"자네는 작가이지 않는가. 그러니 이 흰구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잘 듣고, 받아 적을 수 있을 거야.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 안테나는 한 번밖에 쓸 수 없다는 걸일세."

이렇게 해서 나는 친구인 과학자로부터 '흰구름안테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나는 은빛 거미줄로 감은 것 같은 안테나를 지붕 위에 세우고 텔레비젼에 전기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과학자가 가르쳐 준 대로 0에 채널을 맞추자 아, 화면에 흰구름이 두둥실 나타나는 게 아니겠어요.

그것은 한 시간용 비디오 테이프를 넣은 것이나 다름 없는 흰구름이 들려주는 이야기 시리즈 였습니다.

내가 차분히 받아쓰는 실력이 부족하여 다소 읽기에 어색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이야기들은

"흰구름이 이야기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정말 그 분은 흰구름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받아적은 듯 합니다. 읽다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린 참 아름다운 사람이 옆에 있는 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신 분만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도 우리 곁에 그런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워하기보다는  지금 혹 옆에 계실 지 모르는 아름다운 분을 사랑해야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움보다는 어색한 사랑이라도 사랑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은 두런 두런 옆을 살피는 날이 될 듯 합니다.

날은 궂지만, 사람이 뿜는 빛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환한 것이라 믿고 싶은 아침입니다.

 

그리워하기보다는 사랑하는 쪽을 택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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