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탕자'는 어릴적 들은 성경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이다.
돈이 많은 집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상속분 재산을 미리 받아서
그 돈을 모두 탕진하고 돼지치기를 하며... 또 무슨 일을 하며 고생하다가 아버지에게로 돌아온다는, 그런 아들을 아버지는 용서하고 새옷을 갈아입혀 준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그때는 이렇게 받아들였다.
1.아버지에게 제 욕심을 부려서 돈을 받아낸 나쁜 아들.
2.그 돈을 함부로 낭비한 아들
3.대책없이 산 댓가로 고생을 지질이도 하는 아들
4.그럼에도 용서하는 아버지의 정
뭘 그런 것으로 .... 그 중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다음 이 이야기를 인상깊게 들은 것은 고등학교때였다.
램브란트의 그림으로 "돌아온 탕자'를 본 것이다.
성탄자정미사 전에 슬라이드로 램브란트의 이 그림을 보여 주었었다.
잔잔한 성가와 나래이터의 목소리로 아래의 그림처럼 그림을 잘게 잘게 보여주었었다.
그때의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의 주제는 용서하는 아버지였던 것 같다.
어떤 죄를 짓고 와서도 아버지는 따뜻하게 아들을 맞아주신다. 그것을 이야기 했었던 것 같다.
물론 램브란트의 그림때문에 그 이야기는 목이 뻣뻣해질만큼 감동적이었다.
내게 죄가 있다면, 하느님은 나의 죄를 인자하게도 사하여 줄 것이라는 생각에 감사했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뻔 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그랬었다.
단발머리 고등학생이 자신의 죄사함에 감사하며 눈물 짓고 있었다.
이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를 본다.
(결코 자랑일 순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제이다. 멋대로 주절거려야 함으로... 좀 슬프게도, 신앙밖에서 멋대로 주절거릴 것이다. 내 손이 시키는대로 ...)
-잠시 딴 소리-
이런 일은 참 드문 일이다.
새벽 3시 30분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아예 일어났다.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이 새벽에 무엇을 할까 생각을 했지. 아까운 시간!
블로그에 수다나 한 판 떨어야지 하고 시 한 편을 생각했다. 아니, 오늘 새벽은 그림을 만나자.
갖고 있는 그림파일들 중, 누구의 그림을 볼까.... 램브란트의 탕자그림이 딱 걸린 것이다.
탕자 이야기가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내 손이.... 내 마음... 난 나에게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어 탕자의 그림을 보았을까? 난 내가 하는 나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돌아온 탕자-
기다려 주는 사람
또
돌아오는 사람
그런 믿음.
꼭 그런 믿음
나를 기다려 줄 사람
내가 기다리는 사람
꼭
그런 믿음
난 이 그림을 믿는다.
내가 탕자가 되고 아버지가 되기도 하는 감히 그런 믿음
내가 위로받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할 것이라는 감히 그런 믿음
아비 뒤에 흐리게 가려진 수많은 증인들 따윈 필요없다
의식할 필요없이
빛이 보이는대로 딱 보이는 사람만큼
그 사람앞에서
기대어 우는 나
내가 남루한 옷에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통곡할 수 있는 그런 만남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 온갖 상처를 묻히고 와 울다가 갈 그런 만남
꼭
그런 만남
그렇게 만나서 갈, 만나기 위해 살, 그런 우리의 삶
그는 저렇게 울고 또 떠날 것이다.
나처럼, 그처럼 상처를 안고 와 상처를 보듬어 치료받고 또 떠나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공평하지 않은가?
나도 그도. 누구나 모두 다 그런 거.
아비의 가늘고 긴 손이 다 떨어진 아들의 옷에 얹혀져있다.
아들의 깡마른 얼굴이 아비의 가슴에 기대어있다.
아들은 눈을 꼭 감고,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이 그림 중 내게는 가장 밝게 보이는 곳이다.
아비의 얼굴과 아들의 등 그리고 발 부분이 밝지만, 램브란트는 빛으로 생각을 표현했다는데...
난 아들의 등을 가장 밝게 보고 싶다.
아들의 등
누군가의 등
상처를 가진 사람의 등
인생을 살아온 사람의 등
그리고, 아이들의 등
등은 사람의 이야기를 가장 진솔하게 담고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한다.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삶이 묻어난다.
온갖 세파를 겪은 아들의 등,
나 이 아들의 등에서 아직은 힘을 본다.
그림을 올려보고 다시 보아도 아들의 등에서 힘이 보인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돌아온 아들은 아니다. 선악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모험을 이야기한다.
아직은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아들의 등이 보인다.
잠시 쉬어가는 것!
그럼 아비가 불쌍한 것인가?
아니!
아들은 남은 에너지에 싹을 틔워 또 떠날 것이다.
기름진 밥과 부드러운 옷이 있는 곳을 다시 떠날 것이다.
떠나 본 자들은 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 곳인지를 안다.
난 아들의 등에서 삶의 끝이 아닌 중간자를 본다.
어쩌면 그렇게 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은 멈출 때가 아닙니다. 잠시 쉬어가게 해 주세요. 아버지!'
내가 좋아하는 발이 나왔다.
발!
연민이 절로 생기는 발!
어디를 가든 발을 찍는 나로서는 저 발도 감동이다.
다 떨어진 밑창도 없는 신발을 신고, 아니 끌고 아비에게 까지 온 아들이전에 발이다.
만남에서는 가장 뒷자리다.
발이 뒤로 물러나있다.
온 몸이 앞으로 아비를 향해 쏠릴 때 발은 다시 뒤로 물러나있다.
발! 발은 그런 것이다.
사람도 발과 같은 사람이 있다.
우리가 말하는 희생 봉사자. 그런 것 말고. 의지해서 발이 되는 사람이 아닌,
업을 가지고 태어나 발의 모습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가장 밑바닥이면서 가장 뒷 자리이면서 끊임없이 움직이여만 하는 그런 사람.
그리고 다른 사람을 지탱해주어야하는 그런 사람.
어쩌면 내가 발을 연민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발도 개별적인 유기체라고 본다면 불공평하니까
그래서 불쌍하니까.... 난 사랑해주고 싶은 것이다. 단 한 번 이라도 셔터를 더 눌러 주고 싶은 것이다.
아들의 발이 뒤로 향했다.
아들의 험한 길에 가장 밑바닥을 디뎠을 발이 정작 아비를 만났을 때 뒤로 물러나 있다.
그런 사람이 있다.
꼭 그런 사람이 있다.
세상의 뒤에 숨어있는 사람이 있다.
난 발을 좋아하는데, 발이 되고 싶지 않다. 업을 가진 발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버지, 용서를 하는 사람이다.
용서라고 말하지 말자. 그저 기다리고 받아주는 사람이라고 말하도록 하자.
그럼 나와 가까와 지니까...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용서는 신의 영역같으니까...
아버지의 표정이 인자한가?
아니다. 내가 보기엔 인자하지 않다. 아마 알 것이다.
불안하다. 아들은 다시 떠날 것임을 알고 있다. 난 저 아버지의 얼굴에서 준비를 읽어본다.
진정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준비를 보고 싶다.
다시 떠나보낼 아들이라면,
그 아들이 내게 있는 동안 무엇을 해주어야 할런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읽는다.
아버지의 눈동자를 본다.
램브란트는 고생 끝에 돌아온 아버지의 눈물을 그려넣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 옆으로 보는 눈을 그렸다.
생각하는 눈이다.
아들의 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덮어주고 붙들어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인생이 가야할 길을 가게 하는 것이다.
길이 아닌 곳으로 가는 사람은 당연히 힘이 든다.
어떤 이는 기차의 모습이며, 어떤 이는 승용차의 모습이며, 어떤 이는 짚차의 모습이며,
자전거, 말, 수레, ..... 온갖 탈 것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교통수단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누구나 고속도로가 좋을 수는 없다.
기차는 철로로 가야하며,,, 자전거는 좁은 논둑길을 갈 때 가장 아름답다. 짚차는 험한 산을 올라갈 때 가장 멋지다.
가야할 길이 다른 사람들이다.
아버지는 이 아들이 어떤 교통수단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일까 생각할 것이며,
이 아들에겐 어느 길을 가르쳐줘야 할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라도 창고에 그냥 둔다면 녹이 슬고 말 것이다.
그럼 난,
갑자기 내가 생각난다. 그럼 난?
난 어떤 종류의 수단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내가 어느 길을 가야 가장 빛이 날 수 있을까? 그럼 난? 난?
저 앞에 엎드린 아들이 나인 것 같다.
주변인들이 있기마련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당연 아버지와 아들이다.
그 옆에 세사람이 보인다.
어둠 속에 누군가 더 있을 듯 하지만, 일단은 세사람이 보인다.
통밥을 짚어본다면. 바로 위의 그림에는 나오지 않지만,
전체 그림에서 보이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왠지 집사쯤으로 보인다.
그리고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는 사람은 형이려려나?
뒤에 기둥옆에 있는 사람은 하인?
아무튼 그렇다치고(이럴 땐 문외한인 것이 편하다... 맘껏 지껄일 수 있어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상대라고 말하는 사람이 항상 있다.
상대.... 상대라는 것은 내가 직접 대하는 사람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생각하는 사람.....내가 주이고 바로 객이 될 수 있는 상대가 있다.
나와 상대를 빼고 나면 모두 주변인이다,
램브란트가 그린 주변인들을 살펴보고 싶어진다.
-형-
바로 옆에 팔짱을 끼고 있는 형을 본다. 무표정이다. 딱 무표정이다. 표정에서는 아무 것도 읽을 수없다. 그렇지만 저 팔짱 낀 손은 방어의 자세이다.
난 그런다.
누군가가 내 밥그릇을 뺐을 것 같으면,
아니지 내 밥그릇이 아니라 그의 밥그릇을 그가 가져가는 것인데도
왠지 내 밥그릇을 뺐기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난 아닌 척 한다. 속 상하지 않은 척 한다. 그리고는 되도록이면 침묵한다.
속에서는 나의 할당분을 생각하게 된다.
그런 내가 싫지만, 누구의 것도 아닌데, 나의 것도 아닌데 꼭 세상의 것들이 내 것인것처럼 내 것을 빼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럼 억울해진다. 누군가에게 나의 속내를 이야기하면 난 당연 나쁜 사람이 된다.
가장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는 행복이라는 것이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행복에 빠져있으면, 난 무표정한 얼굴로 팔짱을 끼게 된다.
나의 행복을 가로채기라도 한 것처럼 한 그들을 무표정하게 관찰한다. 그런 것 같다.
어떤 돈이나, 물건보다도 행복의 경우가 가장 심한 것 같다.
마치 내 것인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상실감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볼 때인 것 같다. 솔직히 그렇다... 나쁘다.
-하녀-
그냥 하녀라고 부르자.
얼마나 부러울까? 하녀에게 원래 그렇게 태어나서 도대체 돌아갈 부자 아버지도 가지지 못했다.
지금 거지꼴로 나타난 저 아들에게 보내는 부러운 눈을 보라.
그런 것이 아닐까?
우리는 부자집 아들이 세상 고생을 하고 온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런데 원래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 저 떨어진 신발과 옷은 차라리 부러움일 수도 있다.
저 아버지가 나의 아버지였으면 하는 생각을 몇 번이나 하고 살았을까?
저 아들이 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몇 번이나 하고 살았을까?
바보 같다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건 너무 슬프다.
그런 생각을 하면 괴로우니까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런 그렇지만,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부러울 것 같다.
내일이면, 저 거지같은 아들은 비단옷에 황금장식을 하고 가죽 신을 신고 저 하녀의 수발을 받을 것이다.
나에게도 주변인인 있을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주변인에게는 어떤 모습일까?
주변인은 나의 환경이기도 하지만, 나 또한 주변인들의 환경이 될 것이다.
나와 주변인이 모두 상대가 될 수는 없는건가? 그럴 수는 없는 건가?
어느 책에서 읽은 것 같다.
"배려는 남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려고 하는 것이며, 교양이란 남이 좋다고 하는 가치를 학습하고,성실이란 남이 실망하지 않도록 기대대로 해내는 것이라고.."
나도 내 주위의 모든 사람도 여기서 말하는 그런 '남'이 아니었으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 주변인이 나를 두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침 아니지 새벽부터 너무 많이 주절거린다.
이렇게 추운날 보일러는 왜 트는 걸 잊었는지, 정신을 놓고 사는 것이 분명하다.
이 새벽 덜덜 떨면서 램브란트의 그림을 보았다.
난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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