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다.
걸으려고 오대산에온 것이다.
지난 주 오대산을 오르면서 산 아래 있었던 계곡 낀 길이 날 당겼다.
가는 버스안에서,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던 길을 걷고 싶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산행을 하는 동호회,
이번 일요일엔 또 오대산으로 간단다. 지난 번엔 토요일에 갔었는데,, 너무 잘 됐다.
일요일에 오대산 또 간다니깐,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연신 리플을 단다.
"또 가요?"
"네 또 가요."
"또 가?"
"응 또 가."
그 말은 나에게 정신없군 하는 그런 투였다. 걷고 싶었다.
오대산 전나무처럼 쭉 뻗어있는 길
그 옆으로 흐르는 계곡
계곡을 끼고 솟아있는 울긋불긋 산 걸으면서 느껴보고 싶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빛바랜 초록으로만 보이는 저 길. 걸으면 다르다.
그 길을 걸으면,
먼지는 쌓였지만, 그래도 미모 그대로 간직한 들꽃들이 피어 있고,
다람쥐는 뒷다리로 땅을 받치고, 앞 다리로 흙을 파 찾은 도토리를
긴 앞 이빨로 까선 입 마래 목젖 옆에 볼록하게 물고 다시 도토리를 찾아 나서고 있었다.
또 산비둘기는 내가 가는 길 옆, 그 날은 말라있던 작은 물길을 따라
마치 나는 사람도 아닌 것처럼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옆 길에서 저도 그 길을 걷는다.
그리곤 어느새 나무 위로 날아간다.
낙엽은 어떤가?
간간히 부는 바람에 낙엽은 나에게 말하는 듯하다.
"잘 됐다. 나 이제 내 몫은 끝났어. 가볍게 떨어질래. 그리고 난 돌아가는거야. 잘 있어."
떨어지는 낙엽이 슬프다기 보다는 편안해 보인다.
다 살면, 다 보여주면 가벼워 날 수 있다. 아프지 않고 내려앉을 수 있다.
낙엽?
(사진을 또 올려야 한다. 보여주고 싶은 사진을 잊었다)
낙엽은 마침 내린 비로 부드럽게 살 풀어진 흙에 몸을 맡긴다. 채 부서지기도 전에
젖은 흙이 낙엽위로 내려왔다. 흙으로 코팅된 낙엽!
문구점에서 보는 한지로 만든 A4 용지같다. 그 길에 흙으로 코팅된 낙엽들이 밟아도 모양도 자리도 바뀌지 않고 길 위에 그려져 있었다.
내가 그 위를 걸으며 마치 편지를 쓰는 듯 했다.
하늘이 볼 수 있는 것이겠지?
" 나 잘 지내고 있어. 오빠도 잘 지내지?
오늘은 오대산 길을 걸어보려고 여기 왔네, 잘 지내지? 나도 잘 지내.
그럼 잘 지내지. 잘 지내야해."
내 발은 잘 지내라, 잘 지낸다는 그 말밖에 할 줄 몰랐다.
-잠시 딴 소리-
사실,
월정사에 갔을 적에도 하늘로 잠시 올라갔다 왔는데...
9층석탑은 유난히 뾰족하고 층마다 달린 동그란 물고기 풍경,
귀를 세우고 들으면 딸랑 딸랑 겨우 들리는 소리를 따라
맨 꼭대기로 올라가면 구름이 다리가 되고 곧 파란 하늘을 만나게 된다.
하늘이 가을 하늘 같은 곳이라면, 그 곳은 아름다운 곳일 것이다.
하늘나라가 가을 하늘이라면, 그 곳에 있는 이들은 평안할 것이다.
9층석탑 아래서 몇 번을 하늘을 오르락 내리락거리며,
그 하늘 참 좋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게 좀 전에 만났던 하늘에게 내가 내 발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좀 전에 올랐던 그 하늘에게.
그 하늘에게 떨어진 낙엽, 얇은 흙으로 코팅된 길에서 말을 거는 것이다.
얼굴은 보지 못하면서 그저 편지를 쓰며 걷는다.
그 날, 길은 나에게 긴 편지지였다.
모두들 산에 올라갔다.
그리고 나의 트래킹에 동반한 다섯명의 일행들이 앞으로 간다.
난 뒤에서 따라간다.
뭘하냐고?
엄청 괴로운 디카로 꽃을 찍는다.
어떤 꽃이 여기에 피어있을까?
꽃을 찾으며, 또 앞에 가는 일행을 찾으며 길을 걷는다.
동행이라는 것!
작년 이맘때쯤 난 동행없이 혼자서 이 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사실 좀 무서웠다.
공포가 아니라, 그저 내가 버스시간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가려고 했던 길 맞나?
그러면서 내가 내린 , 걷고 싶어서 내렸던 차가 오나 살피게 되었다.
난 걷고 싶은데, 내가 나도 모르게 마음의 반쪽은 내가 내렸던 차로 향한다.
하지만, 동행이 있다는 것은 버스를 찾지 않는 것이다.
난 그런 일은 동행과 나누었다. 그저 꽃을 찾고 동행의 뒷모습을 보며 걷기만 하면 되었다.
동행!
그건 현재에 몰두하게 하는 힘같은 것이다.
동행이 없는 길에는 몰두할 수 없다. 앞과 뒤를 살피게 된다. 자꾸 살피게 된다.
저 산길이 아니라,
서울바닥에 살고 있는 지금의 나처럼 동행이 없는 길은 자꾸 눈 돌리게 한다.
얼마나 왔을까? 어디쯤 왔을까? 얼마나 남았을까?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까지 13킬로는 동행이 있어서
난 그저 내 생각만 하며 걸을 수 있었다.
그런 동행이 이쁘지 않을 수 없다.
첨 만난 사람, 조금 익숙한 사람, 많이 익숙한 사람.. 그렇지만, 난 그들 모두가 이뻤다.
나와 동행이 되어주어, 내가 앞뒤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휴식을 주어
난 그들 모두가 좋았다.
그리고 고마웠다.
꽃 찾느라, 사진 찍느라, 정신을 판 사이 모두들 보이지 않는다.
"어디갔지?"
그 순간 전화가 온다.
"어디야? 왜 안 보여? 얼른 와. 기다릴께."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전화를 했다. 기다린단다. 나를 기다린단다. 기다려준단다.
뛰기 시작한다.
그들이 보일때까지 뛰기 시작한다.
멀리 나의 일행이 보이자, 나도 모르게 입이 찢어져라 웃게 된다.
달려오는 나를 보자, 나에게 카메라를 댄다. 기다렸으리라.
그러면서 생각했으리라.
'아유~ 저 꼴통..."
나를 보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뛰어가는 것.
뛰어서 숨이 차고, 그 눈길때문에 숨이 찬다.
기다리는 사람,
그렇지. 그건 지금쯤이면, 그리고 지금처럼 가을이면 누구든 상관이 없다.
귀여운 아이여도 좋고, 나이드신 어른이어도 좋고, 아님 그동안 대면대면했던 친구여도 좋고
그저 지금쯤으면,
지금 같이 가을이면 기다려주는 사람이 누구든 무슨 볼일이든 그런 것은 상관없다.
기다리는 사람을 향해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다만 그런 것이다.
나 이 가을에 누군가를 기다려주고 싶다.
오늘 아니 내일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날 오대산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가는 그 길에서
나의 동행이 나를 기다려주었듯이
나도 누군가를 카메라 렌즈 맞춰놓고 기다리며 그를 반겨주고 싶다.
가을이니까....
시원한 바람이 나를 밀어주는 가을이니까.
서늘함으로 나를 천천히 말려주는 가을이니까.
그런 가을에 기다리는 사람 앞으로 난 웃으며 뛰고 있다.
"기다렸어?"
난 그들 옆으로 가서 이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래, 기다렸어. 으이그, 좀 빨리 빨리 다녀."
그리고 같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난 또 쳐졌고, 그들은 또 기다렸다. 뛰었다. 만났다. 걸었다. 또 기다렸다. 뛰었다...
그렇게 상원사까지 12.5킬로미터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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