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見聞錄

주왕산

by 발비(發飛) 2005. 9. 13.
 
새벽 4시가 넘어서 주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는다.
3폭포에서 내원마을까지 거의 트래킹수준이다
자! 이제부터 즐기는 산행 시작이다.
너무나 이른 새벽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새벽, 회색여명, 하얀 아침
 
난 이 곳을 오르면서 수많은 추억이 있는 나의 주왕산을 생각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말
 
-주왕산 장아찌-
 
 
 
 
어둡다
 
7살에 학교를 들어갔다. 또래에 비해서 많이 어리고 작았다.
물론 정신연령도 무지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금도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는 무지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점점 벌어지는 친구들과의 간격... 에고 난 외톨이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14살 처음으로  타인과 여행을 떠난다.
중학교 2학년 옆 반 담임선생님이신데, 25살 국어선생님. 너무 이쁜 여자 선생님이셨다.
대구가 고향이신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때 주왕산을 가자고 하셨다.
 
어떻게 거기에 끼인지는 몰랐다.
다만 선생님이 나더러 타잔에 나오는 "자이"같다고 귀여워하시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때 난 작고 마르고, 까무짭짭한 것이 자이와 좀 닮기도 한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세명의 친구,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과의 첫 개인여행은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 후 난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아마 한동안..
 
"덤비지 마! 나 선생님과 주왕산 갔었어!"
 
그렇게 4명이 버스를 타고,,, 걷고... ... 참 멀었던 주왕산으로 여행을 갔다.
그 때 선생님께선 계곡 건너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우리에게 카레를 만들어주셨고
난 지금도 그렇게 맛난 카레를 먹어본 적이 없다.
마치 쑥 자라 대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계곡가에 자리를 잡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것도 처음이다.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그렇게 오래도록 본 것이 처음이다.
안동이 고향이긴 하지만, 그런 한가로운 풍경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었는데..
하늘이 나에게 쏟아지는 느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뜨고
감고 뜨고
그렇게 팔베개를 하고 누웠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 처음 시간인 듯 싶다.
그냥 살아있다던가, 아니면 숨을 쉬고 있다던가, 내가 하늘아래 살고 있다던가
도무지 그런 생각은 없다가
하늘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 시간 동안
'내가 하늘아래 어느 곳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눈은 너무 부신데
뭔가 좀 슬프기도 한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가슴 뻑뻑해지는 기쁨 같은 것
 
난 그 날 내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듯 하다.
 
그 날 주왕산은 새벽처럼 내게 왔었다.

 

 


 

밝아오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청소년연맹 한별단에서  MT를 주왕산으로 갔다.
 
고 2때 첫 남자친구 악돌이!
남자친구와 만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즈음인데, 일요일에 주왕산을 가야한다.
그땐 주왕산보다 그 친구가 더 만나고 싶었던 것 같은데...ㅎㅎ
괜히 미안한 맘으로 붕 뜬 마음으로 주왕산을 오르락 내리락...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왕산 초입에는 나무에 인두로 그림을 그리는 털보아저씨가 계셨다.
그 아저씨에게 그림 하나를 샀다.
그 친구를 주려고...
내가 처음으로 내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산 곳이다.
그 나무그림을 들고 얼마나 설레었던지...
어찌 줘야 하나 하고....
너무나 주고 싶었던, 그래서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던....
 
그 그림을 받은 악돌이는 참 좋아했었다.
그 친구와는 금방, 정말 금방 헤어졌지만, 그래서 별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첫 남자친구임에는 ..,.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선물을 사 준 친구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 친구을 기억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처음이라는 것 때문에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방법을 모르면서
어떤 과정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섭기만 한데. 떨리기만 한데도, 조건없이 주고 싶었던 그 마음
참 이뻤던 마음이다.
어떤 애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친구의 모습으로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은 심히 떨렸다
그 떨림을 즐겼던 시간이었다
난 내공이 부족했으므로 그 떨림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는 없었지만서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 참 좋다.
별로 좋은 애같지는 않았지만, 내겐 참 좋은 애였다.
나를 조금은 어른으로 만들어 준 아이다.
 
지금 잘 지내고 있겠지?
그리운 것은 아닌데 궁금하군!!!
 
 
 아침이 되니, 세상이 보인다.
 
대학교 몇 학년인지는 모르겠다.
친구들과 주왕산엘 갔다.
 
계곡 옆 허름한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민박집에서 잔 첫 밤!
밤새 계곡 물소리는 요란하고, 아이들과 어울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고민이 많던 시기다.
뭔가 좀 알게 된 시기이다.
이젠 치기로 살 수 없다는 것도, 엄마 아빠 그러면서 부르면 안된다는 것도
선생님이라는 빽이 필요없다는 것도
아무 것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떤 역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왜 있을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시간들
 
차라리 아무도 없었더라면,
내가 뭔가 하지 않았을까 하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시간들
그런 생각을 갈등의 시간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리 만무하다.
뭔가 좀 달랐어야 했을 시기라고 반성모드...
 
딱 이 시기가 나의 반성모드가 작동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 밤 목소리만 크게 하면 계곡 물소리쯤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 물소리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간이다.
 
 
계곡 물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결국 계곡이 이긴거네....
 
이겨야 할 상대와 같이 가야 할 상대를 모르는 바보!
지금은 아니?
 
 
참 많이 떠들었던 계곡 옆 민박집
 
 
환하다.
 
또 남자친구(그러고보니, 카사노바?)
이제 남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친구이야기는 싫으니까...
 
그래도
계곡을 건너면서 그 친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을 잡고 계곡을 건너는 것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키는지 처음 알았다.
난 계곡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면
내 삶에서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의타적인 삶
 
자~ 지금부터는 고백시간이다.
-주왕산에 다녀와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될 지어다-
 
내가 나를 알아가던 그 시기에 좀 더 고민을 했더라면,
의타적인 모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공이 부족하다
난 나를 놓아버리고, 나에게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내 힘으로 가지 않고 타인의 힘으로 계곡을 건넜다.
참 쉬운 일이었다
그 계곡 딱 하나만 내 인생에 있는 줄 알았다.
계곡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
 
계곡이 나타날 때마다 손을 내미는 너! 그래 바로 나!
혼자 건너보니까 건너지는데, 건너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해는 떴고, 이제 사방이 잘 보인다.
계곡이 너무나 잘 보여서
그 깊이를 알 수 있어 무섭고
그 아래 놓인 미끄러운 돌때문에 무섭고..
모두 환하게 보이는 계곡을 건너야 한다.
사방이 잘 보이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냥 잘 보고 잘 디디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잘 보고 그러고 건너면 되지...
 
한 두 번은 이제 건넌 것 같기도 하다.
건너니까 꼭 빠지는 것만은 아니다.
빠져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주왕산을 많이도 가보았지만,
이번처럼 폭포에 계곡에 물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어느 계곡을 가던지 물은 흘러넘쳤고
폭포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 앞에 있으면 물방울들이 나의 얼굴에 와 닿았다.
 
많은 비가 내렸나보다.
비가 많이 내린 후라 계곡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계곡물을 보면서 차라리 확 밀려들어라 싶었다
비 세차게 내리면, 세차게 흘러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산을 올라 산을 내려오고도 한 낮이 되지 않았다.
이번 주왕산은 웃고 떠들고 만끽했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된 것일까...
 
주왕산 장아찌를 담는다.
오지 항아리에다 담아 둔
오래 오래 묵혀 곰삭은 장아찌를 꺼내먹으며,
또 한 켠에서 장아찌 한 켜 한 켜 빼곡이 담고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은 나의 주왕산
 
주왕산을 돌아보면서
딱 장아찌다.
 
태어난 나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냄새를 나의 기질을 세상에다
내어주고 난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극약 처방을 받아 긴 생명을 유지한다.
그렇게 살아 남아
언젠가 내가 입맛이 없어 찬 물에 하얀 밥 말아먹을 날에
한 켜 꺼내  밥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우고 다시 힘을 낼 ,,,, 그런 장아찌
 
또 장아찌 담은 날.
 
주왕산은 나에게 장아찌이다.
 
여행은 나를 숨 쉬게 한다.
숨이 쉬어진다.... 한동안 숨을 참아도 살 수 있게 깊이 숨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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