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가 넘어서 주왕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까지 가지는 않는다.
3폭포에서 내원마을까지 거의 트래킹수준이다
자! 이제부터 즐기는 산행 시작이다.
너무나 이른 새벽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새벽, 회색여명, 하얀 아침
난 이 곳을 오르면서 수많은 추억이 있는 나의 주왕산을
생각했다.
그리고 떠오르는 말
-주왕산 장아찌-
어둡다
7살에 학교를 들어갔다. 또래에 비해서 많이 어리고
작았다.
물론 정신연령도 무지 심각한 수준이었다.
지금도 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그때는 무지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자,점점 벌어지는 친구들과의 간격... 에고 난
외톨이였다.
그런데, 그런 내가
14살 처음으로 타인과 여행을
떠난다.
중학교 2학년 옆 반 담임선생님이신데, 25살 국어선생님. 너무
이쁜 여자 선생님이셨다.
대구가 고향이신 그 선생님께서 여름방학때 주왕산을 가자고
하셨다.
어떻게 거기에 끼인지는 몰랐다.
다만 선생님이 나더러 타잔에 나오는 "자이"같다고 귀여워하시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 때 난 작고 마르고, 까무짭짭한 것이 자이와 좀 닮기도 한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세명의 친구, 그리고 선생님
선생님과의 첫 개인여행은 내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 후 난 내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아마
한동안..
"덤비지 마! 나 선생님과 주왕산 갔었어!"
그렇게 4명이 버스를 타고,,, 걷고... ... 참 멀었던 주왕산으로
여행을 갔다.
그 때 선생님께선 계곡 건너에 자리를 잡으시고는 우리에게 카레를
만들어주셨고
난 지금도 그렇게 맛난 카레를 먹어본 적이 없다.
마치 쑥 자라 대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계곡가에 자리를 잡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하늘을 보았다
그것도 처음이다.
팔베개를 하고 하늘을 그렇게 오래도록 본 것이
처음이다.
안동이 고향이긴 하지만, 그런 한가로운 풍경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했었는데..
하늘이 나에게 쏟아지는 느낌.
나도 모르게 자꾸만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뜨고
감고 뜨고
그렇게 팔베개를 하고 누웠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한 처음 시간인 듯 싶다.
그냥 살아있다던가, 아니면 숨을 쉬고 있다던가, 내가 하늘아래 살고
있다던가
도무지 그런 생각은 없다가
하늘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 시간 동안
'내가 하늘아래 어느 곳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눈은 너무 부신데
뭔가 좀 슬프기도 한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가슴 뻑뻑해지는 기쁨 같은 것
난 그 날 내가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 듯
하다.
그 날 주왕산은 새벽처럼 내게 왔었다.
밝아오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2학년 청소년연맹 한별단에서 MT를 주왕산으로
갔다.
고 2때 첫 남자친구 악돌이!
남자친구와 만난 지 얼마되지 않았을 즈음인데, 일요일에 주왕산을
가야한다.
그땐 주왕산보다 그 친구가 더 만나고 싶었던 것
같은데...ㅎㅎ
괜히 미안한 맘으로 붕 뜬 마음으로 주왕산을 오르락
내리락...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왕산 초입에는 나무에 인두로 그림을 그리는 털보아저씨가
계셨다.
그 아저씨에게 그림 하나를 샀다.
그 친구를 주려고...
내가 처음으로 내 남자친구에게 선물을 산 곳이다.
그 나무그림을 들고 얼마나 설레었던지...
어찌 줘야 하나 하고....
너무나 주고 싶었던, 그래서 고르기가 너무
힘들었던....
그 그림을 받은 악돌이는 참 좋아했었다.
그 친구와는 금방, 정말 금방 헤어졌지만, 그래서 별 기억도
없지만,
그래도 첫 남자친구임에는 ..,.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선물을 사 준
친구임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 친구을 기억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처음이라는 것 때문에 기억한다.
어린 시절에 누구를 좋아한다는 것은 방법을 모르면서
어떤 과정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섭기만 한데. 떨리기만 한데도, 조건없이 주고 싶었던 그
마음
참 이뻤던 마음이다.
어떤 애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은 관심이
없었다
다만, 친구의 모습으로 남자가 옆에 있다는 것은 심히
떨렸다
그 떨림을 즐겼던 시간이었다
난 내공이 부족했으므로 그 떨림을 오래도록 지속시킬 수는
없었지만서도..
그런 기억이 있어서 참 좋다.
별로 좋은 애같지는 않았지만, 내겐 참 좋은 애였다.
나를 조금은 어른으로 만들어 준 아이다.
지금 잘 지내고 있겠지?
그리운 것은 아닌데 궁금하군!!!
아침이 되니, 세상이 보인다.
대학교 몇 학년인지는 모르겠다.
친구들과 주왕산엘 갔다.
계곡 옆 허름한 민박집에서 하룻밤을 잤다.
민박집에서 잔 첫 밤!
밤새 계곡 물소리는 요란하고, 아이들과 어울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고민이 많던 시기다.
뭔가 좀 알게 된 시기이다.
이젠 치기로 살 수 없다는 것도, 엄마 아빠 그러면서 부르면 안된다는
것도
선생님이라는 빽이 필요없다는 것도
아무 것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어떤 역학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시기이다.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왜 있을까 생각하게 만들었던
시간들
차라리 아무도 없었더라면,
내가 뭔가 하지 않았을까 하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던
시간들
그런 생각을 갈등의 시간들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리
만무하다.
뭔가 좀 달랐어야 했을 시기라고 반성모드...
딱 이 시기가 나의 반성모드가 작동해야 하는
시간이다.
그 밤 목소리만 크게 하면 계곡 물소리쯤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내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 물소리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간이다.
계곡 물소리가 지금도 쟁쟁하다.
결국 계곡이 이긴거네....
이겨야 할 상대와 같이 가야 할 상대를 모르는 바보!
지금은 아니?
참 많이 떠들었던 계곡 옆 민박집
환하다.
또 남자친구(그러고보니, 카사노바?)
이제 남들이 말하는 어른이 되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그 친구이야기는
싫으니까...
그래도
계곡을 건너면서 그 친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손을 잡고 계곡을 건너는 것이 얼마나 나를 안심시키는지 처음
알았다.
난 계곡에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면
내 삶에서도 손을 잡아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의타적인 삶
자~ 지금부터는 고백시간이다.
-주왕산에 다녀와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 같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될
지어다-
내가 나를 알아가던 그 시기에 좀 더 고민을 했더라면,
의타적인 모습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공이 부족하다
난 나를 놓아버리고, 나에게 손을 내미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내 힘으로 가지 않고 타인의 힘으로 계곡을 건넜다.
참 쉬운 일이었다
그 계곡 딱 하나만 내 인생에 있는 줄 알았다.
계곡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라고는 .....
계곡이 나타날 때마다 손을 내미는 너! 그래 바로
나!
혼자 건너보니까 건너지는데, 건너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해는 떴고, 이제 사방이 잘 보인다.
계곡이 너무나 잘 보여서
그 깊이를 알 수 있어 무섭고
그 아래 놓인 미끄러운 돌때문에 무섭고..
모두 환하게 보이는 계곡을 건너야 한다.
사방이 잘 보이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냥 잘 보고 잘 디디고,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나 잘 보고 그러고 건너면
되지...
한 두 번은 이제 건넌 것 같기도 하다.
건너니까 꼭 빠지는 것만은 아니다.
빠져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며칠 전 내린 비로 주왕산을 많이도 가보았지만,
이번처럼 폭포에 계곡에 물이 많았던 적은 없었다.
어느 계곡을 가던지 물은 흘러넘쳤고
폭포는 시원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 앞에 있으면 물방울들이 나의 얼굴에 와 닿았다.
많은 비가 내렸나보다.
비가 많이 내린 후라 계곡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난
계곡물을 보면서 차라리 확 밀려들어라 싶었다
비 세차게 내리면, 세차게 흘러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른 새벽부터 산을 올라 산을 내려오고도 한 낮이 되지
않았다.
이번 주왕산은 웃고 떠들고 만끽했다.
이제 그럴 나이가 된 것일까...
주왕산 장아찌를 담는다.
오지 항아리에다 담아 둔
오래 오래 묵혀 곰삭은 장아찌를 꺼내먹으며,
또 한 켠에서 장아찌 한 켜 한 켜 빼곡이 담고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은 나의 주왕산
주왕산을 돌아보면서
딱 장아찌다.
태어난 나의 모습을 그리고 나의 냄새를 나의 기질을 세상에다
내어주고 난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극약 처방을 받아 긴 생명을
유지한다.
그렇게 살아 남아
언젠가 내가 입맛이 없어 찬 물에 하얀 밥 말아먹을
날에
한 켜 꺼내 밥 한 그릇 뚝딱 먹어치우고 다시 힘을 낼 ,,,,
그런 장아찌
또 장아찌 담은 날.
주왕산은 나에게 장아찌이다.
여행은 나를 숨 쉬게 한다.
숨이 쉬어진다.... 한동안 숨을 참아도 살 수 있게 깊이 숨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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