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사람과 행동하는 사람 중 성공할 확률이 높은 쪽은 행동하는 사람이다.
'성공'이라는 말이 이상하다. 다른 말로 대체를 한다면 'GOAL IN'
다시 말하면, 'GOAL IN'할 확률이 높다.
목표를 만들고 그 목표에 맞는 프로세스를 구성하기 위해, 서치를 하고, 서치한 자료 중 벤치마킹을 설정하고, 벤치마킹한 대상을 분석해서 나의 프로세스를 구성하고, 또 완성된 프로세스 중 각 단계별로 나에게 적합한 것인지 검증하고...., 그러다가 목표에 적합한 프로세스인가? 의심하고, 혹은 목표의 성공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프로세스인가 궁리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들로 나는 완벽주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이분법적 사고의 폐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공 아니면 실패
세상이 어떻게 성공 아니면 실패인가?
이런 행동은 세상이 성공 아니면 실패라고 생각하고, 실패할 수 없으므로 성공을 해야한다는 강박에 쌓여 일이 주어질 때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때 나의 합리화는 나는 궁리에 시간이 걸리지만 그래서 승률이 높다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선후배에게 공공연하게 그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
행동하기 전에 사고 프로세스를 작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선 행동부터 해야 하는 것이라고,
다만 걷기라고, 뛰기라도, 현관문을 들락거리기라도 해야 한다고,
그것은 적어도 걷는 무엇인지 내게 남을 것이고, 뛰는 것이 걷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몸으로 체득했을 것이고,
현관문 앞에 무엇이 있는지 눈으로 보기라고 했을 것이다. 현실 눈이 되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를 만들어 바늘틈이 들어오지 못할 만큼 견고한 프로세스를 만들었다고해서
그것이 무엇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PPT안에서 완벽했다.
수많은 행동들에게서 나온 결과는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이 있을테고, 그것들의 수많은 반복을 통해 체득되는 것, 체득이 쌓이면서 마치 본능적인 움직임인 것처럼 절로 움직여지는 것이여야 말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지금의 이 생각들조차 프로세스를 쌓는 일에 속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몸에 무엇인가를 체득하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하는 중에 무엇인가 되는 것이다.
똑똑하다는 것, 성공했다는 것, 잘한다는 것들의 정의가 바뀌고 있다.
이제 똑똑하다는 것은 머리를 잘 돌아간다는 것이 아니라 체득된 것들이 많아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몸이 반응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공한다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수많은 과정을 경험한 사람이 성공한 것이 될 것이며, 잘한다는 것은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도 그 성공과 실패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단단히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안동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엄마가 불편한 채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미친 선택이 나를 점점 유연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생각이 아닌 움직임이 만들어준 중요한 경험이다.
귀향이 성공이지는 않지만, 나는 이런 과정들이 언젠가는 멋진 데이터로 작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는 모르지만, 어느 구간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성공적이었다, 실패였다고 규정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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