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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헤르만 헤세] 위안

by 발비(發飛) 2022. 9. 5.

위안

 

헤르만 헤세

 

살아온 그 많은 날들이

이젠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았다

지니고 있을 아무 것도

즐거워 할 그 무엇도 없다

수많은 모습들을 어떤 흐름이 

나에게로 실려 왔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붙들어 둘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내게서 빠져나가도

내 마음은 이상하게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삶의 정열을 짙게 느낀다

정열이란 어떤 의미도 목표도 없는 멀고 가까운 모두를 알며

뛰노는 어린 아이처럼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신을 생각한다. 

신은 인간에게 어떤 모습으로 관여하시나. 내 삶에 어떤 모습으로 흔적을 남기시나.

 

수많은 모습들을 어떤 흐름이 

나에게로 실려 왔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붙들어 둘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수 많은 모습 혹은 일들이 내 턱밑으로 와, 찰랑거렸다. 

털컥털컥 숨이 막히고, 숨을 쉬고, 그것들이 좋은 것이었던 나쁜 것이었던 

무엇도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좋아하지 않았다.  

숨구멍을 막을 듯이 내 몸으로 들어와도 온 힘으로 되뱉았다. 내 것이 아니므로 삼키지 않았다.

그러면 잠시 숨이 쉬어졌다. 

 

내게 신은 이런 식이었다. 

턱 밑까지 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알아채기 전에 '너의 것이다' 

그런 신을 거부했다. 

내가 하리라 생각했다. 

차라리 얼굴을 뵌 적도 없는 할머니에게 의지하리라 하고,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나의 기도를 할머니에게 올렸다. 살려달라고. 

 

살아온 그 많은 날들이 이젠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았다

지니고 있을 아무 것도 즐거워 할 그 무엇도 없다

 

신에게 빌던, 신을 믿던, 할머니에게 빌던, 할머니를 더 신뢰하던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는 시간임을 느낀다.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고가 순간의 즐거움이 될 지언정 그것이 내 삶의 즐거움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한정되었다. 내일이 없으므로, 꿈꿀 수 없으므로. 

 

정열이란 어떤 의미도 목표도 없는 멀고 가까운 모두를 알며 뛰노는 어린 아이처럼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아이에서 아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서 젊은이로, 어른으로 살아가다 아이가 되는 것. 

내일과 미래가 아니라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이토록 어렵다. 

 

신은 늘 개입한다. 

신의 개입은 내 마음에 있지 않다. 외부에 있다. 

내게 행복을 줄 사람을 보내고, 시련을 줄 사람을 보내고

내게 고통을 주는 사건이나 병을 보내고, 내게 기쁨을 주는 우연한 해결책을 보낸다. 

고통을 잊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기쁨을 전하는 감사기도를 한다.

신은 외부에서 개입한다. 

내 마음에서 신을 만난 적은 없다. 

 

내 마음에서 신의 경이로움과 전지전능이 강림하여 마음이 온전한 힘을 느껴보지 못했다.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과 저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루카 14,25-27

 

이 시의 제목은 '위안'

헤세는 '내 마음은 이상하게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삶의 정열을 짙게 느낀다'고 했다. 

'정열이란 어떤 의미도 목표도 없는 멀고 가까운 모두를 알며 뛰노는 어린 아이처럼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고 했다.

 

어제 미사 때 복음을 들으며, 어깨가 떨어졌었다.

대체 어째야 하나..., 월요일 아침 헤세의 시를 읽으며 어느 정도 위안을 받았다. 

 

신은 강물처럼 내 곁을 외면하듯 흘러가기도 하고, 

때로는 파도처럼 내 앞으로 세차게 다가오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고 

어쨌듯, 온 몸이 젖고. 

 

 

-째깍째깍 순간을 의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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