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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세필(細筆) 두 자루를 샀다

by 발비(發飛) 2022. 2. 9.

세필을 샀다. 

요즘 작은 붓으로 필사를 하는 재미에 빠졌다. 

멈추려고 애를 써야 멈출 수 있을 정도로 세필필사는 무념무상 힐링 그 자체이다. 

그동안 쓰고 있던 붓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다이소에서 언젠가 샀던, 그냥 있어서 그것으로 썼다. 

알고 보니, 채색붓이었고, 그나마 닳아서인지 붓 끝이 더 이상 모아지지 않게 되었다. 

이제는 사도 되지 않을까? 

인터넷을 뒤져서 두 개의 세필을 샀다. 

하나는 황모(족제비털) 100%로 이만원이 넘고, 하나는 인조모와 황모가 섞여 만원이 좀 넘었다.

아직 써 보지 않았으므로 리뷰가 아니다. 

 

 

좋아서 그냥 좀 보고 있는 중이다. 

어떨까? 

그리고 이젠 왠지 장난이 아니라 제대로 써야 할 것 같아 떨린다. 떨리는 기분을 좀 더 느끼고 싶어 보는 중이다. 

 

설날에 엄마한테 다녀왔는데,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줄곧,

저녁식사 후 한 시간 동안 성경을 필사하신다. 

 

아버지가 쓰시던 책상에 놓여있던 컴퓨터와 여러 전자제품들을 모두 치우시고, 

아버지의 사진과 가족 사진 몇 장, 볼펜, 성경, 필사노트, 초콜릿 접시로 재배치 하시고는,

아버지가 앉아계시던 그 모습 딱 그대로 앉아,

30센티 자로 성경의 횡 바꿈을 표시하면서 꼼지락꼼지락 성경을 옮겨 쓴다. 

 

사실, 나는 엄마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을 한번도 똑바로 보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은 자리

아버지는 교장으로 퇴임하신 후 20년간 마치 나무처럼 그 자리에만 계셨었다. 

 

이번 설날에 처음으로 그 책상으로 다가가 엄마가 필사한 노트를 보았고, 

성경에 올려진 아마 다이소에서 사셨을 깨끗한 자도 보았다.

 

엄마는 쑥쓰러운 듯 아닌 듯 뭔가 좀 다른 표정으로 곁에 선 나를 힐끗 보았다. 

나는 불쑥 스마트폰을 열어 그동안 세필로 필사한 헤세의 글귀나 자크 프레베르의 시와 논어의 어떤 구절 같은 것들을 아주 빠르게 넘겨 보여주었다. 

엄마는 돋보기를 고쳐쓰고는 내가 휙휙 넘기고 있는 스마트폰에 온통 집중했다. 

 

엄마의 성격상, 나의 성격상 서로에게 칭찬은 없다. 지나친 관심도 없다. 

 

다만, 

 

"이런 거 하면서 그냥 살아. 별 생각말고 그냥 편안하게."

 

이게 전부였다. 

 

나는 그 말에는 대답도 않고, 

 

"쓰는 게 재미있어."

 

둘의 대화는 끝이었다. 

.

.

.

며칠전 참여하고 있는 어느 프로그램의 오리엔테이션에서 아이스브레이킹을 하면서

"죽을 때 마지막에 용서하고 싶은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나는, '엄마'

나는 놀랐다. 

눈물이 났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나는 엄마를 용서하고 싶구나.

그제야 알아챘다. 

 

안동을 다녀와서 새로 산 두 자루의 세필과 어제 서점에서 사온 [채근담]을 나란히 놓고 오늘밤을 기대한다. 

엄마가 말한 '이런거 하면서 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은 이렇게 살 수 있으니 괜찮네 하는 마음이 든다.

 

그 시간이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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