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11층까지 마른 땅냄새가 올라온다.
햇빛 향을 머금은 땅냄새가 코를 찌른다.
비가 베란다창으로 들이치지만 문을 그대로 열어두었다.
몇날 며칠을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더니, 눈치 한 번 주지 않고 소나기가 내린다.
굵은 비가 땅으로 땅으로 무겁게 내리꽂힌다.
결국, 비가 끓어올린 햇빛냄새는 종이처럼 가볍게 날리다 어느새 다시 땅속으로 가라앉는다.
빗소리가 반갑다.
며칠만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 버텨보자 하고 있던 참이라 더 반갑다.
버티는 자에게 비는 어떤 것일까?
뙤약볕 아래 밭을 일구고 있는 사람에게는 단비일 것이고,
깊고 어두운 산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 것이고,
뜨거운 아스팔트를 맨발로 걷던 사람에게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내게 오늘처럼 예고도 없이 큰 비가 내린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혹은 서 있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가,
오늘 같이 큰 비가 오면, 내 발밑이 어디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게 비는 무엇일까?
창밖에 무섭게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내가 사라져버려서 큰 일이다며
사라진 나를 되찾는 길은 일기라도 써는 것이 아닐까 하고 벼르던 몇 달 끝에
소나기에 기대어 질문을 던진다.
내게 오늘과 같이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면,
바람이 있다면,
반가웠으면, 그 비에 기대갈 수 있었으면 한다.
.
.
.
아마 십몇 년전, 어느 여름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썼던 시가 생각나서 함께 올려본다.
당신은 내게 그러하다
여름 소나기 억세게 내리던 날
당신이 비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이 여름 소나기로 세차게 내린다면
우산 따위로 당신을 피하지 않을테야.
그저 회색 하늘 아래 술잔 하나 들고 서 있을테야.
비로 내리는 당신을 술잔으로 가득 받아
당신이 한 잔 한 잔 채워질 때마다 단숨에 마실테야.
내 속으로 흘러들어간 당신이
식도를 긁더라도
위벽을 두 주먹으로 쳐대더라도
애를 끓이더라도
내 속에다 그냥 담아둘거야.
당신이 쿨럭거리며
내 속을 빠져나오려 한다해도
난 두 손으로 내 입을 막고서라도,
당신을 개워내지 않고 내 안에다 둘거야.
여름 소나기 억세게 내리는 날
당신은 내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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