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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일기] 비가 온다

by 발비(發飛) 2021. 7. 28.

아파트 11층까지 마른 땅냄새가 올라온다.

햇빛 향을 머금은 땅냄새가 코를 찌른다.

비가 베란다창으로 들이치지만 문을 그대로 열어두었다. 

몇날 며칠을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더니, 눈치 한 번 주지 않고 소나기가 내린다. 

굵은 비가 땅으로 땅으로 무겁게 내리꽂힌다. 

결국, 비가 끓어올린 햇빛냄새는 종이처럼 가볍게 날리다 어느새 다시 땅속으로 가라앉는다. 

 

빗소리가 반갑다. 

며칠만에 에어컨을 틀지 않고 버텨보자 하고 있던 참이라 더 반갑다.

버티는 자에게 비는 어떤 것일까?

뙤약볕 아래 밭을 일구고 있는 사람에게는 단비일 것이고, 

깊고 어두운 산길을 걷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 것이고, 

뜨거운 아스팔트를 맨발로 걷던 사람에게는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일 것이다. 

 

내게 오늘처럼 예고도 없이 큰 비가 내린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이, 혹은 서 있는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도 없었다가, 

오늘 같이 큰 비가 오면, 내 발밑이 어디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내게 비는 무엇일까?

 

창밖에 무섭게 내리는 소나기를 보며, 

내가 사라져버려서 큰 일이다며 

사라진 나를 되찾는 길은 일기라도 써는 것이 아닐까 하고 벼르던 몇 달 끝에 

소나기에 기대어 질문을 던진다. 

 

내게 오늘과 같이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면,

바람이 있다면, 

반가웠으면, 그 비에 기대갈 수 있었으면 한다. 

.

.

.

아마 십몇 년전, 어느 여름 오늘처럼 비가 내리던 날 썼던 시가 생각나서 함께 올려본다.

 

 

 

 

당신은 내게 그러하다

 

 

여름 소나기 억세게 내리던 날 

당신이 비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이 여름 소나기로 세차게 내린다면 

우산 따위로 당신을 피하지 않을테야. 

그저 회색 하늘 아래 술잔 하나 들고 서 있을테야.  

비로 내리는 당신을 술잔으로 가득 받아 

당신이 한 잔 한 잔 채워질 때마다 단숨에 마실테야. 

 

내 속으로 흘러들어간 당신이 

식도를 긁더라도  

위벽을 두 주먹으로 쳐대더라도

애를 끓이더라도 

내 속에다 그냥 담아둘거야.

 

당신이 쿨럭거리며 

내 속을 빠져나오려 한다해도 

난 두 손으로 내 입을 막고서라도, 

당신을 개워내지 않고 내 안에다 둘거야.  

 

여름 소나기 억세게 내리는 날 

당신은 내게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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