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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안개의 어둠이라는 것

by 발비(發飛) 2020. 10. 19.

환한 어둠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자유로를 달렸다. 

캄캄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자동으로 설정해 둔 안개등이 켜지지 않아 수동으로 안개등을 켰다. 

그만큼 어둡지 않았다. 안 보일 뿐이었다. 

안개 속이 보이지 않는다고 어둠은 아니다. 

불투명한 밝음.

 

18년 동안 쓴 전기밥솥을 바꿨다.

새로 산 밥솥으로 밥을 했다. 

밥은 고소하고 찰졌다. 일요일이었던 어제는 그 밥을 두번이나 먹었다. 

밥이라는 것이, 밥맛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얗고 기름진 밥을 먹으니 힘이 났다. 

밥을 먹기 싫어한 것은 밥이 아니라, 밥을 잘 짓지 못하는 밥솥이던가 나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둠과 관련된 캄캄함이 아니라

환하고 확연한 것인데도 보지 못한 것이다. 

저 먼데를 보려면 보이지 않지만, 내 발밑은 환한데 말이다. 

 

비알레티 커피프레스를 샀다.

다들 모카포트를 사는데 모카포트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전에는 커피메이커에 필터를 받쳐 커피를 마시거나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마셨는데, 

언젠가부터 종이필터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환경주의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신경쓰이는 것들이 생길 때마다 하지 않거나 하기 시작했다. 

 

-잠시 딴 소리-

이제 몸에 배어 익숙한 것들 

빨대 안 쓰기 

종이컵 안 쓰기

손수건 쓰기

현관 빗자루로 쓸기

온라인 장보기 안하기 

비닐봉투 안 가지고 오기

페트 생수 대신 브리타 정수기 

옷 안 사기

다 먹기

비누 쓰기

... 대충 생각나는 것들 

-잠시 딴 소리 끝

 

그래서 궁리 끝에 산 것이 커피프레스인데, 커피맛이 늘 허전해 텀블러를 들고 편의점으로 향한다. 

해소할 수 없는 카페인 혹은 커피에 대한 갈증은 심리불안과 이어졌다.

고민과 갈등, 번뇌, 욕망이 들끓었다. 

일리 커피머신을 사면 이 번뇌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리뷰도 좋네. 디자인은 더 좋네.

모닝 커피를 잘 마셔야 일을 잘 할 수 있는 거라며 결국 샀다. 

깊은 번뇌의 시간을 보상받을 만큼은 아니지만 커피 맛은 괜찮았다. 

그런데, 머그컵에 겨우 반잔 정도의 커피를 축출해내면서,

커피를 마실 때마다 플라스틱으로 된 단단한 커피 캡슐이 하나씩 나왔다.

안에 커피찌꺼지가 있으므로 분리수거도 안된다. 일반쓰레기로 버려야 했다. 

뭔짓인지, 눈이 멀었다.

종이필터가 신경쓰인다더니, 플라스틱 커피캡슐이 분명한 것을 보고도 못보고  산거다. 

 

자욱한 안개속을 달리면서, 생각의 안개에 대해 생각한다. 

어둠은 아닌데 안 보이는 것. 못 보는 것.

 

마트에서 장을 보다 스타벅스 분쇄커피 보고, 다크버전으로 샀다. 

그리고 잠시 선반에 올려둔 커피프레스에 커피를 내렸다. 

.... 내가 원하는 진한 카페인맛이었다. 

나는 그저 프렌차이즈 커피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고,  

가지고 있던 커피가 오래되어 향이 날라간 것 뿐이다. 

안개 속의 어둠은 가짜 어둠이다. 

환한 데 보이지 않는 것은 너무 멀리 보기 때문이다. 

 

웅덩이마다 습기 찬 안개가 자욱이 끼어 있고, 그 안개는 마치 쉴 곳을 끝내 찾지 못한 악령들처럼 절망적인 배회를 고개턱까지 거듭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개는 분명히 뒤미처 밀려왔다가는 제각기 다시 퍼져 가는 잔잔한 물결 같은 흐름을 헤치고 병든 파도처럼 천천히 전진하였다. 안개가 너무나도 짙어서 마차 등불에 비치는 두어야드 앞길을 제외하고는 주위는 절벽같이 캄캄했다. 이렇게 악전고투하는 말들의 입에서 뿜어나오는 입김이 안개 속에 습기를 일으켜, 모든 안개가 다 말들의 입김인 양 보이는 것이다.  -<C.J.H. 디킨스/ 두 도시의 이야기> 중에서 

 

이렇게 악전고투하는 말들의 입에서 뿜어나오는 입김이 안개 속에 습기를 일으켜, 모든 안개가 다 말들의 입김인 양 보이는 것이다.

 

안개가 자욱하다고,  저 앞이 안 보인다 하여 맘만 급해서 헐떡거리면,

내 입김조차 '안개'와 같은 하얀 어둠이 되어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게 된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나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 새벽 안개는 내가 헐떡거리며 입김을 더 보태지 않는다면 적어도 나 자신은 보인다.

안개가 짙어 코 앞도 보이지 않는다해도

헐떡거리지말고, 헷갈리지 말고,

이때다 하고, 나에게 집중을 해 볼일이다. 

 

밥이 맛있고,

커피도 맛있다.

 

내일은 좀 나아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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