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는 이는 나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내 삶에 대해 훈수를 둔다.
어려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누군가가 늘 나를 코치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글을 일찍 깨쳤다는 이유로, 사회성으로보면 덜 떨어진 7살에 학교를 들어가 말귀도 알아들을 수 없이 왕왕거리기만 했던 교실풍경으로부터 역경은 시작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늘 무엇인가를 이야기했다.
이래라. 저래라.
멍했던 나는 질질 끌리듯 그 말들을 근근이 따라하며 티나지 않게 살아갔다.
아마 고1때까지,
그 이후에는 나름 나로서의 기억이 있다.
최근 1년 정도 집에 있으면서, 친구들을 비롯한 사람들이 내게 이러면 되지 않느냐. 저러면 되지 않느냐. 각자의 말을 많이 한다. 수많은 말들이 멍하게, 초등학교 1학년 처음 교실에 들어섰을 때처럼 왕왕거린다.
성가셔서 그냥 듣는다.
아님, 그 말이 '맞을 지도 몰라 하며 듣는다.
그러면서 생각을 한다.
'그들이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구나. '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한다.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고, 고기도 꼭 먹어야 한다.
나는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멍하고,
세끼를 먹으면 속이 거북하고, 고기를 먹으면 소화제를 꼭 먹어야 한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고, 각각이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이가 '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장 잘 아는 이도 '나'라는 것,
그래서 나를 극복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라는 것,
나를 넘어 성취해가는 것도 '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추운 겨울이라 초목이 모두 죽은 듯이 하지만 저 땅속 깊은 곳에서는 '나'라는 생명이 살아있고,
찬 바람속에도 '나'를 향한 봄기운은 여지없이 알아채는 걸 보면,
미미해도 결국 살아있는 것이 주가 되는 것, 천지의 이치가 그렇다는 채근담의 말이
설이 막지난 지금 계절을 말하고, 나를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아주 작은 生生이라도, 땅속 깊이 묻혀있는 生生이라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生生이라도
내가 알고있는 生生이며, 그것이 나의 근원이라는 것을, 내가 살아있는 한 主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수가 듣기 싫다는 것은,
반갑게도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다.
ps: 채근담 마지막에 한 줄을 더 넣고 싶다.
草木은 해마다, 여지없이 제 모습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초록잎을 만든다.
草木이 纔零落하면 便露萌穎於根柢하고
時序가 雖凝寒이나 終回陽氣於飛灰라.
肅殺之中에 生生之意가 常爲之主하니
卽是可以見天地之이라.
풀과 나무는 시들었는가 하면 다시 뿌리 곁에 새싹이 돋고,
계절인 비록 얼어 붙는 겨울이라 하여도 마침내 날아오는 재 속에 봄 기운이 돌아온다.
만물을 죽이는 기운 속에서도 자라나게 하는 뜻이 언제나 주가 되니
문득 이로서 천지의 마음을 볼 수 있다.
-현암사 <채근담> 도의 마음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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