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인간은 존재를 살아간다. 지금 눈 앞의 현실을 살아간다. 존재가 어디에서 오는지 왜 걱정하는가? 그것이 어디에서 오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누가 그것을 창조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어긋난 질문이다. 그대는 이곳에서 고동치며 살아있으므로 존재와 더불어 춤추라. 살아라! 존재가 되라! 그리고 그 신비가 완전한 형태로 그대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라. -<마음으로 가는 길> 증에서, B.S 라즈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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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라는 단어)에 도착하자 마침표같은 방점이 찍히고 꼼짝할 수 없었다.
불면인지 가수면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시간 내내 '부재'에 연연했다.
'부재'라는 수렁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부재'라는 바닥을 만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깊은 수렁 밑바닥에서 지반이 솟아 오르듯 꿈들거리는 거대한 힘이 '존재'를 밀고 올라왔다.
이것은 함께 한 적이 없었던 듯한 몸과 마음이
이제야 서로를 알아차린 듯 한 힘으로 나의 무게가 되었다.
몸과 마음의 존재,
마음의 무게와 몸의 부피를 감당할 수 있을까?
부재가 끝나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존재,
존재가 끝나는 지점에서 생겨나는 부재.
이 과정, 몸과 마음의 존재를 언제 어떻게 부재화 시킬 것인가?
존재와 부재 사이에 일어날 수많은 겹.
'겹'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건이기도 하고, 감정이기도 하고, 통증이기도 하고, 관계이기도 하고, 생각이기도 하고, 셀 수 있기도 하고, 셀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뭐라고 말할 수없이 많고 조밀하게 겹쳐친 무엇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로드킬을 당한 어느 들짐승의 살과 피와 뼈 때문에 화들짝 놀라 눈을 감지만,
존재의 흔적은 검은 아스팔트 위에, 지나가는 타이어들에, 바람에, 혹은 소나기에 산산히 흩어져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것.
그곳에는 존재와 부재사이에 놓이는 고통, 보이는 고통조차도 사라진다.
두렵다. 아니 무섭다.
'소멸'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서서히 사라지는, 없어져가는 소멸.
-점심시간 산책길, 공사장 근처 콘크리트 바닥에 녹슨 못들이 흩어져 있었다.
못은 마치 개화기의 꽃잎처럼 한창 붉게 부풀고 있었다.
부재의 수순을 밟아가려는 듯 바람에 햇빛에 최대한 몸을 부풀이고 또 부풀려
산산히 흩날리는, 붉게 흩날리는 부재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마른 몸을 햇빛에 바람에 비에 놓아두면,
몸은 붉게 녹슬며 부풀어, 아까울 것 없이 한 켜 한 켜 바람에 날아가려나.
산화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존재'의 모두를 날려버리고, 딱 좋은 산소만 남기는 산화酸化.
무거울 뿐, 아까울 것 없는 존재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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