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의 나날
허연
강물은 무심하게 이 지지부진한 보호구역을 지나쳐 갑니다. 강물에게 묻습니다.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상소 한 통 써놓고 목을 내민 유생들이나, 신념 때문에 기꺼이 화형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장마의 미덕이 있습니다. 사연은 경전만큼이나 많지만 구구하게 말하지 않는 미덕, 지나간 일을 품평하지 않는 미덕, 흘러간 일을 그리워하지도 저주하지도 않는 미덕, 핑계 대지 않는 미덕, 오늘 이 강물은 많은 것을 섞고, 많은 것을 안고 가지만, 아무것도 토해내지 않았습니다. 쓸어 안고 그저 평소보다 황급히. 쇠락한 영역 한가운데를 모르핀처럼 지나왔을 뿐입니다. 뭔가 쓸려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치료 같은 거죠.
강물에게 기록 같은 건 없습니다.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어제는 그동안 써두었던 이별의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만남보다 더 긴 이별의 편지를 받은 사람은 어려울 것입니다.
이별의 편지 덕에 제게 이번 이별은 좀 특별한 이별이 되었습니다.
시인의 강처럼 '구구하지 말하지 않는 미덕'을 가졌어야 하는데, 그 편지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해에는 오랜 친구였던 사람과 절교를 하였더랬습니다.
오래된 사람은 좋은 거라는데, 늘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불편함의 이유를 찾았고, 그 불편함으로 다퉜습니다.
어른이 되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그냥 싸웠습니다.
그리고 더는 함께 놀지 말자고 말하고 더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늘 만나던 친구였지만 만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아주 어렸을 때 친구를 만들기 시작했을 즈음 엄마는 말했습니다.
사이좋게 잘 지내라고,
그때는 그것이 필요할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라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더라도 나와 맞지 않아 불편하면 굳이 친구가 아니어도 되고,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그리고 만나지 않는 것에 대해 스스로 어른스럽지 않다고 자책에 빠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남들이 요즘은 왜 안 만나냐고 물었을 때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만나지 않아서 훨씬 나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지난 해에 알았습니다.
그건..., 나는 나를 포함해서 옆 사람까지니까요.
나와 다른 사람이 내 옆에 있다면,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일테니까요.
-잠시 딴 소리-
말을 높이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가 저를 이렇게 말하게 합니다.
시가 나에게 높임말을 쓰니, 시에 대한 댓구도 높임말로 쓰네요.
재미있습니다.
-잠시 딴 소리 끝-
"사랑했던 거 맞죠?"
"네"
"그런데 사랑이 식었죠?"
"네"
아마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를 만날 때마다 이별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게 이상했지만, 참지 못하는 말들이 많아 편지가 되어 쌓여갔습니다.
편지가 쌓여가는 것을 보며, 이 편지를 전할 타이밍은 언제일까? 생각했습니다.
어제 이 시 '장마의 나날'을 읽었습니다.
시인은, 강물에는 기록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별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매 순간을 기록했습니다.
기록들을 그의 손에 모두 건넸습니다.
기록과 함께 그가 흘러갔습니다.
사실, 이별의 편지를 전하는 것이 망설여졌습니다.
아직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좋아하는 것과 맞는 것은 다릅니다.
그를 좋아하지만 늘 함께 있을 때 갈 곳 잃은 말을 혼자 너무 많이 합니다.
시인은, 뭔가 쓸려가서 더는 볼 일이 없다는 건, 결과적으로 다행스러운 일이고 말합니다. 치료라고 덧붙였습니다.
혼자의 생각과 말을 모아 썼던 이별의 편지, 그 시간을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시인은, 사랑은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나가는 것이, 그저 지나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면 지나가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저절로 살아가게 될 것이고, 살아가는 동안 또 누군가와 마음을 나눌 것입니다.
지난해 절교를 한 친구를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웃으며 잘 지냈느냐고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어색한, 그 어색함이 좋았습니다.
아마도 그와도 어색하게 만나겠지요.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럼 묻겠습니다. "잘 지내시죠?"
아마 그 어색함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까지 드는 걸 보면, 이별의 편지를 잘 전한 것 같습니다.
지금 제 앞에 흐르는 강물은 어떤 말도, 생각도 섞이지 않은 채, 그 속이 맑게 드러나 보입니다.
친구와 싸우지 않고 잘 지내야 한다는 말은,
유치원생에게만 해당하는 말입니다.
나와 맞는 친구와 잘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잣말을 않고, 가슴에 많은 말들을 담지 않고, 맑은 강물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친구를 포기하지 않고 찾겠습니다.
만약, 찾을 수 없다면 나와 친구를 하겠습니다.
지나간 것은 그 무게 때문에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저는 오늘 아주 천천히 흘러 가는 중입니다.
.
.
.
그리고
마음이 뻐근하다
이제부터는 쓸쓸할 줄 뻔히 알고 살아야 한다. -[허연], 일요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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