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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호모 사피엔스의 '...'

by 발비(發飛) 2018. 4. 18.

1.

말 사이에 유난히 여운이 긴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학교에서 영화음악 강의를 했는데 

그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저 남자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저렇게 긴 여운을 어떻게 견딜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의 긴 여운을 늘 좋아했다. 

그는 문자를 포함한 메신저를 하지 않았고 늘 대면을 하고 이야기를 하거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통화를 했었다. 

대체로 말의 시작은 그였다. 

영화, 영화음악, 소리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은 말이 되어 한 단어, 한 단어 아주 천천히 그의 입밖으로 나왔다. 

그가 단어를 뱉고 긴 텀의 숨 쉬는 사이, 나는 먼 곳을 여행하듯 그의 낯선 단어들 사이에서 경이로웠다.   

또 그의 단어들 사이사이에 내 생각과 말을 이어붙여, 

내 말도 그의 말도 아닌 주인없는 말이 되었고, 그것은 늘 새로웠다.  

내가 시작한 말과는 분명 달랐다.  

나는 그 말들을 꼭 기억하려고 했고, 기억 속에 남은 것들은 기록하였다.  

그 기록은 하나의 문장으로 가다듬어 내가 쓴 시, 혹은 소설의 처음이 되기도 하고 끝이 되기도 했다. 

그의 여운이 만들어낸 마법이었다. 

그는 지난 해 어느 여름밤 와인과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  


2.


메시지 대화를 할 때 ...,을 많이 쓰는 그는 대면할 일이 거의 없다. 

만나지도 않고, 통화를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대부분 카톡메시지를 통해서 대화한다. 


깜빡이는 카톡대화방을 열면, 말풍선마다 ..., 이 있다. 


네...

미세먼지가 ...

다음에 저녁이라도 ...

끝까지 ...


그의 말 사이에는 늘 '...'이 있다. 


..., 은 침묵 혹은 생각이 필요한 긴 호흡의 시간일 가능성이 높다. 

..., 은 체념의 시간일 가능성도 있다. 


오늘 아침 그의 ...,을 보며, 지난 해 하늘나라로 간 그를 생각한다. 

어쩌면 모래알처럼 흩어진 저 ...은 사라진 나의 뮤즈를 살려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찰나에 했다.  


편집자는 '...'을 어떤 말로 드러내지 못한, 드러낼 필요가 없다고 속단한 저자의 감정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문장력이 약한 사람이, 혹은 단어가 부족한 사람이 쉽게 대체하여 쓰는 것이 '...' 이라고도 생각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은 원고에서 잘라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은 여물지 않아 어차피 독자에게 도달할 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난히 ..., 을 많이 쓰는 저자의 경우, Ctrl+F의 바꾸기 기능으로 '...'을 쉼표로 대체해 놓고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냥 숨 쉼일 수도 있으니까. 

쉼표를 바꿔놓고,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말이 부족한 경우라면, 

작가에게 무슨 상황인건지 상상하거나 무슨 이야기인건지 작가에게 질문을 한다.  


'...'을 많이 쓰는 그는 작자가 아니다. 

그런데, 가끔 대화창에 흩어져 있는 '...'을 지우고 싶다. 쉼표로 바꾸고 싶다. 

그리고 그의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하고 싶다. 


"''', 이 무슨 뜻이세요?"

혹시 내게 어찌 표현하지 못할 경계가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의미없는 대화가 나의 '...' 강박때문에 의미를 만들고 만다. 


"왜 그렇게 ...,을 많이 쓰세요?"

"..." 


그게 대체 무슨 질문이냐는 뜻이거나, 왜 그런 것이 궁금하냐거나, 나도 모르겠다거나 뭐 그런 뜻이겠지.


그와 나 사이도 '...'이 된다. 

시작도 끝도 의미도 무의미도 아닌, 몸에 붙은 바닷가 모래알처럼 성가시게 되고 만다.


지난 해 여름밤 와인과 함께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말은 글자로 되었고, 

생각은 기호로 되었고,

그를 마지막으로 21세기의 호모사피엔스들은 말을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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