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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by 발비(發飛) 2018. 1. 2.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뜨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초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흙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 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영화 [1987]을 보았던 연말 연휴가 지났다. 

영화 [1987]에게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선물로 보낸다. 


새해 첫 출근을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출근 길 커피를 사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리에 앉기 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를 듣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지난 해 카톡의 프로필 메인 텍스트였던 '쥐약'을 '무중력'으로 바꿨다. 


쥐약: घरमा मुसा मार्ने औषधी हालेपछि मुसा खतम भए '집에 쥐약을 놓은 후 쥐가 죽었다.'


지난해 동안 내 안에 들어온 각종 사사망념의 쥐들은 내가 놓은 쥐약으로 모두 소탕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쥐약'을 철수했다. 


연말에 머릿속을 뱅뱅 돌았던 '그냥 저냥'은 신정 연휴동안 '무중력無重力'이라는 단어로 진화했다. 

'무중력'이라는 단어 뒤에 박노해 시인의 결연한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의 제목이자 마지막 구절인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이었다. 


무중력無重力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한참 보다가, 시 바로 앞 구절인 '그래,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까지 더 붙여 보았다. 



무중력無重力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완성된 느낌이 든다. 

나는 한동안 '무중력'이라는 단어와 감정적으로 반대편에 있을지도 모르는 박노해 시인의 시를 나란히 붙여 놓을 것이다. 


어울리지 않은 한 단어와 한 구절 사이의 그 허허로운 공간이 

아마도 2018년 내게 던지는 질문이자, 지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움직일 공간이 될 것이다. 


나는 무중력 상태처럼 어떤 것의 중력에도 끌리지 않고, 원래의 곳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무중력은 나의 힘이다. 힘을 쓸 수 없는 공간에 힘을 쓸 자가 나 뿐이라면 나는 힘을 써야 한다. 떠있거나, 

-무중력은 군자불기처럼 고정된 틀이 없어 유연한 것이다. 

-무중력은 진정한 자유이다. 

-중력은 쉬운 것이다. 끄는 힘에 끌려가서 중력을 중심으로 내가 측정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무중력은 다시 한 번 용기를 내는 것이다. 


나는 내가 원래 어디에 있었는지, 어디서 왔는지, 원래의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무중력이 나를 그곳으로 안내할 것이라고 믿어본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시가 내게로 온 것이다. 

그냥 저냥에 이은 무중력을 놓고, 멍해 있는 내게 시가 내게로 온 것이다. 

나는 시를 따라 간다. 


희미한 불빛이 아직 내게 살아있고, 

나는 그 불빛을 의식할 것이다. 

내가 불빛을 찾아 살살 부채질을 할 때까지,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누구의 중력에도 지배받지 않고, 

나는 희미하게 살아있는 자존을 찾아 가 보려한다. 


2018년 첫날에,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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