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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정환] 물 지옥 무지개-세월호 참사의 말

by 발비(發飛) 2017. 1. 23.


세월호에 관해 읽은 글 중에, 

김정환 시인의 다른 책 [음악의 세계사] 출간 간담회에서 했다는 말, 이 말 또한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지금이야말로 예술하는 사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때가 아닌가. 예술의 눈으로 보면 세상을 더 근본적으로 볼 수 있어요. (…)미래 기획은 예술의 몫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예술의 시대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문 정치면에 나쁜놈 좋은놈 있잖아요. 이것을 문학의 시각에서 보자 이거죠. 저 사람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이런 눈으로 볼 때 세상을 이해·전유한다는 것이 훨씬 더 깊어질 수 있죠." 


이 말을 보자 찌릿했다.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시, '물 지옥 무지개'가 아닐까. 


세월호를 다룬 문학작품들은 

다른 어떤 시인의 시처럼, 또 다른 어떤 소설가의 소설처럼, 그 작품들은 그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정제되어있지 않다. 


세상에는 정제될 수 있는 것과 정제될 수 없는 것이 있다. 

정제될 수 없는 것이다. 




물 지옥 무지개

-세월호 참사의 말


김정환


1. 

자식 잃은 부모들, 슬픔에 희망이 없다. 슬픔을 모르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


2. 

죽은 자 아우성으로 더욱 급구(急救). 급구, 급물살 검은 맹골수로 속 입수 3분 수색 10분 감압 귀환 17분.


3. 

시신 안고 사선 넘는 잠수부 도로에 희망이 없다. 도로(徒勞)도로라 하는 자 더욱 희망이 없다.


4. 

나라에 국상(國喪)이 있다. 5백 년 전 국상. 나라가 다할 때까지 울어야 할 국상이다. 


5.

 별도의 문상이 평소보다 더 잦았다. 죽은 자가 죽어가는 자를 추모하듯이 새벽길이 문상이고 죽음의 재탄생이고 나의 안방에 쉰내 가득했다.


6. 

죽은 어린이날이 있다. 죽은 어버이날이 있다. 죽은 스승의 날이 있다. 오 그밖에 이러고도 세상이 돌아가다니, 우리가 살아 있기는 한건가?


7. 

무엇을 했다는 사람들 무엇을 했다는 희망이 없다. 무엇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 무엇을 하고 있다는 희망이 없다. 어른들 희망이란 말에 희망이 없다. 


8. 

살아 있다는 우리는 울음의 귀신들이지. 뒤늦은 소문이 거미줄 인맥의 악마처럼 달려들어 울음의 전신(全身)을 물어뜯는다. 


9. 

여기가 퉁퉁 불은 물의 지옥이다. 실종자 숫자가 사망자 수 302*를 향해 넘어가고 또 넘어간다. 


10. 

너무나 지리한 슬픔의 미분(微分)으로 넘어간다. 왜냐면 주검들의 소문만 끝없이 이어진다. 너무나 느닷없는 충격의 적분(積分)들로 넘어간다 왜냐면 끝까지 기적을 포기할 수 없었다. 


11. 

여기가 자가용에 휘발유를 만땅 채우는 숫자로 참극의 양(量)을 잴 밖에 없는 디지털 지옥이다. 


12.

 나의 꿈은 살인이고 나의 깸의 처형이다. 떠돌고 밑도는 만신창이 슬픔의 거덜난 생이 시간보다 영영 더 길 밖에 없는 지속의 절망이다. 


13. 

이들의 죽음이 있다. 이들의 죽음에 뜻이 없다면 살아남은 생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는가, 살아온 생과 살아갈 생에 무슨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14.

 어른의 희망이었던 아이들의 그 아픈 무지개가 있을까? 있단들 우리가 볼 수 있을까, 있단들 볼 자격이 있을까?


15. 

목숨도 살도 뼈도 없고 집단으로 숨이 끊기던 

바닷속 아비규환의 고통을 

아주 먼 옛날의 아주 희미한 참혹 정도로 기억하는

어린 혼령이 있다. 

본능과 인연과 배운 지식과 쌓은 교양과 지난 덕목이

그것이 자신들을 자각하는 

골격이자 등장이자 정체였다. 

'모처럼 시원하군.'

바닷속에서 누가 말했다. 몇이 웅성거렸고 바다에 맨 먼저 떠서 그 누가 말했다.

'올라와, 들. 우린 무지개를 만들어야 한대.'

비가 내리고 그친단들 그들이 

비를 타고 올라 공중에 

물방울로 떠 있을 수 없다. 

바닷속 웅성거림이 충분히 잦아들자 그가 다시 말했다. 

'올라와, 들. 우리가 만드는 무지개가

세상 사람들 보는 무지개래.'

......

'그리고 세상 사람들 흘린 눈물이 

우리한테 내리는 비래.'

......

'그 눈물을 타고, 올라가는 건 우리가 올라가야지. 

올라와, 들. 내가 먼저 누울테니 내 위로 올라와.'

그 말이 보랏빛으로 물들며 바다 위 궁륭이 되었으나 

너무 흐려서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타고 오르며 둘째가 말했다. 

'보드랍구나 너는. 맞아 허리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미끄러지지 않고 한없이 보드랍기만 한......

만져보지 않아도 너무 짜릿했던......'

그 말이 남색으로 물들며 보라색 궁륭에 얹고 얹혔다.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꽉 채우고 꽉 채워졌다. 

그 둘을 타고 오르며 셋째가 말했다. 

'다정하구나 너희는. 맞아. 소년과 소녀라는 게 있었지, 옛날에.

터질 듯 두근대는 심장이 터지지 않고

따스한 품일 수 있다는 게

기적 같았던 나날이 있었어......

그건 어머니와 아버지가 , 누이와 오빠가, 그러니까 가족의

(맞아 그런 게 있었어.)


사랑이 있기에 가능했을까?'

그 말이 파랑으로 물들며, 자칫

하늘 파랑으로 번지려다 가까스로 응축, 얹고 얹히는 

그, 응축의 포옹이

육체 같았다. 

그 셋을 한걸음에 뛰어오르며 넷째가 말했다. 

'끈끈하구나, 너희는. 맞아, 학교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젊은 생명들이 도약하는 미래 희망의 포근한 울타리였지. 

우리는 그 도약으로 울타리 바깥을 내다 보았다. 

그 바깥세상 너무나 신기했지, 그건 도약하는 생명의 

희망이 아름다워서였나,

울타리가 포근해서였나?'

그 말이 초록으로 물들며 네번째 궁륭으로 얹고 얹혔다. 

완벽했고,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넷을 기어오르다 굴러떨어지기를 몇 번 반복하며 다섯째가 말했다. 

'알 수 없어, 그것 말고는.


옛날에 그런 것들이 있었다는 것 말고는.

울타리 밖은 우리가 나가본 적이 없어. 

나갔더라도 나가본 적이 없어. 왜냐면 우리가 어렸으니까.

우린 잘못한 게 없는데 ......

원망이라는 게 있었던 것 같아, 엣날에. 

무엇을 원망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어......''

그 말이 노랑으로 물들며 넷에게 마구 엎질러지지, 넷이 함께 말했다. 

'올라가, 올라가. 우린 무지개를 만들어야 한대.'

다섯째가 계속 흐트러지며 물었다. 

'누가, 도대체 누가, 왜, 우리가, 왜?'

넷이 순서대로 대답했다. 

'세상 사람들한테 어쩔 수 없는 일이 우리한테는 이룰 수 있는 일이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안 가본 곳과 알 수 없는 것이 우리한테는 시작이니까'

'세상 사람들한테 생명인 것이 우리한테는 죽음이니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갈 뿐 결코 완벽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다섯째가 색을 추스리며 마침내 노랑 궁륭으로 얹고 얹혔다. 


그 '마침내'가 마침내 열린

정신 같았다. 

각자의 말들이 각자의 색을 더 분명하게 하였으나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그 다섯을 성난 파도처럼 덮치며 여섯째가 포효했다. 

'아냐, 돌아갈 수 있어. 난 돌아갈 거야. 이건 아주 잘못된 거야. 

응징이라는 게 있었어, 옛날에......'

다섯이 순서대로 여섯째를 달랬다. 

'그걸 우리가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우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실종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끝내 죽음이라고 불지 않게 되었지.'

'가슴에 묻었다고 하게 되었지.'

'슬픔의 힘을 미래라고 부르게 되었지.'

......

다섯이 모두 말했다. 

'우린 무지개를 만들어야 한대.'

'그러면 나도 묻혀야겠구나, 너희 가슴에.'

여섯째의 그 말이 주황으로 물들었고 물듦이 얹음이고 얹힘이었다. 

그리고 일곱 번째

빨강은 여섯이 각자의 색을 더욱 밝히는 식이고 각자의 색이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결과였다.. 

그 식과 결과가 무지개의 말이고 보임이고 들림이었다,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맞아, 그런게 있었어. 옛날에...... 우리를 위한 

도로가 있었어....... 그 생각이 무지개의 말이지 보임이자

들림이었다, 자신의 물게를 온전히 벗고 단일로 펼쳐지기 직전

각 궁륭의 생각에.


무지개 떴다. 해가 맞은 편으로 마중 나왔다. 

해가 가장 낯익은 동네였다. 

눈에 보이는 것이 귀에 들리는 것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말하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 귀에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참극은, 참극도, 지상에서도, 결국은

다른 이들의 생을 

화사하게 하기 위해 있는 거겠지.

왜냐면 참극을 초래한 자들이 결국은 

참극의 주인공이고 가장 불쌍한 참극이다.'

그것이 가장 낯익은 동네인 태양의 말이자

들림이자 보임이자 들음이자 봄이었다,


16. 

무지개 뜨지 않았다. 옳은 소리도 진전이 없다. 그러니까 몇십 년 전 오대양 광신도 집단자살이 이제는 아이들을 집단 살해하고 있다고? 뜬소문도 진전이 없다. 


17. 

무지개 뜨지 않았다. 비명만큼 크고 날카로운 새가 통유리창을 스친다. 소조(小潮) 끝나 유속 빨라지고 비가 내릴 듯 흐린 하늘이 퉁퉁 불은 시신 같다. 


18. 

무지개 뜨지 않았다.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다름아닌 나의 영혼을 버리고도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 이리도 지지부진하다 영혼이 남아있나, 부끄러운 영혼이?


19. 

무지개 뜨지 않았다. 박제된 시간 위로 투명한 어깨들이 고개 숙이고 있다. 늦은 남편이 늦은 아내가 늦은 아이들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20 

무지개 뜨지 않았다. 떴다면 그건 무지개란, 비명을 일곱 단계로 질질 끈 가위눌림이 가위눌림으로 깨어나는 결정(結晶)이라는 소리였나?


21. 

무지개 뜨지 않았다. 비가 내렸고 평소가 돌아왔다. 그래야겠지...... 그런데 평소가 가장 음란한 프로노 같고, 가장 냄새나는 추문 같다. 


22. 

만연한 죽음 회색을 배경으로 모든 생이  그래 보였고, 그래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야만 살아 있는 것 같고, 살아 있을 것 같았다. 여보. 저기 빠져들어 허우적대로 있는 거냐, 정말?


23. 

그럴 것 같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왜냐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아닌 나의 , 다름 아닌 내 몸안의 온갖 악마들이. 이런 식으로라도, 정화(淨化)할 필요가 있다는 듯이. 


24. 

무지개 뜨지 않았다. 살아서는 너무 뒤늦었다. 죽음의 등장과 등장인물들만 보인다. 모두의, 비명횡사의 뒤늦은 등장이 비명횡사의 뒤즞은 등장을 모른다. 


25. 

살아있다는. 아비규환만 있고 살아있다는 아비규환의 뒤늦은 등장을 모른다. 이유가 있어야 하잖아, 이유가. 이유없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가 있지? 뒤늦은 이유들의 등장이 뒤늦은 등장을 모른다. 


26. 

무지개 뜨지 않았다. 열 달 품어 낳은 자식인데 열 며칠 만에 인양을 할 수는 없다.....실종 학생 부모의 절규가 절규의 뒤늦은 등장을 알 수가 없다. 


27.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 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28. 

울보들아. 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울어보자. 울음이 무지개 일곱 빛깔 찾아줄 때까지. 


29. 

내 이름은 세월호 참사. 울음이 나라의 한 몸일 때까지 울어보자.


30. 

무지개 떴다. 무지개 떴다. 여기가 물지옥, 퉁퉁 불은 무지개 떴다.


* 이 시는 2014년 5월 5일, 그러니까 참사의 수가 뒤늦게, 어처구니없이, 그러므로 더욱 지리하고 더욱 지리한 바로 그만큼 더 끔찍하게, 304로 변경 확인되기 전에 쓰였다. 그때까지 그 두 사람, 어디서 무얼하고 있었을까? 



시극(poetic drama, 詩劇) 같다. 희곡 같기도 하다. 


또 이 길고도 긴 시를 읽으며, 


오래된 영화 쿼바디스가 생각났고, 

명동예술극장에서 본 멕베스가 생각났고,

일곱시간동안 본 러시아 영화 전쟁과 평화도 생각났고, 

비디오 방에서 본 인생은 아름다워도 생각났고, 

주말의 명화에서 본 루트도 생각났고,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도 생각났고, 


그리고 그것과는 다른 것이 있다면 슬픔이 아니라, 비극이 아니라, 분노가 덧붙여있음을 생각한다. 

아름다운 생명이 생명을 다해 무지개가 되지 못한 것은 분노때문일지도 모른다. 

위의 영화들처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라면, 이 영화들처럼 분노가 정제되어 슬픔의 영역으로 내려올 수 있을까.


지금은 아니다. 


긴 시를 베끼며, 

한 편의 시극을 보는 착각을 하며, 

한 편의 시극으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가 시극이 펼쳐지는 한 마당에 둥글게 앉아 다같이 분노에 겨워 끝내 통곡을, 한 번 쯤은 통곡을 해 보았으면 하기 때문이다. 


광화문에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이슈가 될 정도의 평화시위를 하고 있다. 

그곳에 처음 갔을 때, 우리는 분노하는 법과 우는 법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분노할 줄 모르고, 울 줄 몰라 결국 평화시위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시가 감정의 정제가 되지 않아서 좋다. 

그러므로 이 시야말로 속으로 음미하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내어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리내어 읽으면 서럽게 목숨을 잃은, 까닭없이 목숨을 잃은 그들이, 

꺽꺽하고 울었을 그들이,

.

내 몸을 빌어 울 수 있으리라. 

기끼어 나의 몸을 빌려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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