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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최승호] 낙타가 죽으면

by 발비(發飛) 2017. 1. 23.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그가 떠난 뒤 꽤 오래, 그가 분명 잊혀지긴 하였으나 하루에 한 두번쯤? 아니 일주일에 한 두 번쯤은 문득 떠오른다. 그것을 그리움이라 하기도 어렵고, 감정이라 하기도 어렵다. '사랑'하는 감정이라고 하기는 더 어렵다. 다만 너무 고요하니 그를 떠올릴 뿐이다. 바로 그런 시간, 주말 내내 잠만 잔 일요일 늦은 오후, 찬 바람이 창에 스며든 베란다에 등을 기대고 앉아 높은 아파트 사이로 빗장이 쳐진 하늘을 본다. 등이 시리도록 차가운데, 손가락 끝에 아주 얇게 스며드는 온기 같은 것, 햇살 자락이었다. 시인은 낙엽 한 장인가 보았나 본데 나는 햇살 한 자락이다. 손 등 위로 아른거리는 아지랭이의 흔들림을 본다. 호흡을 멈추고 본다. 가만히 본다. 숨을 크게 쉬던가, 움직이면 슬며시 보이던 아지랭이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사라질 것이다. 차가운 바람이 스며든 창에 기댄 나와 햇살의 아지랑이, 둘이 그렇게 나란히 있는 것이다. 그래,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그가 떠난 뒤 나는 아주 조용해졌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낙타가 죽으면


최승호


낙타가 죽으면 

낙타가 죽었다고 말하지말고

사막의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해주기 바란다


낙타가 앞으로 꽤 오래 살겠지만

영원히 살 수 없으므로

언젠가 낙타가 죽으면

죽었다고 말하지 말고

낙타가 태어나기 전에 달빛 속으로 

들어갔다고 

말해주기 바란다


달빛 환한

그곳은 그곳이라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그곳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 곳에서

낙타는 몸뚱이를 벗고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누워있을 수 없다

서 있을 수도 없다

물론 성큼성큼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나의 현재이자 미래이다. 사막을 건너 황금도시로 가고자 하였다.  

내가 본 것은 황금도시였으나, 사실 달빛이었다. 

달빛 가까이에 오자, 황금도시나 달빛이나 마찬가지다, 

붉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그 곳은 황금도시이기도 하고 달 속이기도 하고,

나는 여전히 가고 있는 것이다. 

사막을 건너는 거대한 무리의 말없는 상꾼들처럼 가고 싶었으나, 

언제인지도 모르게 무리는 흩어져 홀로 고요 속을 걷고 있다. 

사방이 황금빛, 황금길을 걷고 있다. 

이미 황금도시다. 그러나 

누워있을 수 없다. 서 있을 수도 없다. 물론 성큼성큼 걸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아주 가끔 생각이라는 것을 한다면, 출발지였던 사막 끝 오아시스,  

그 초록을 기억할 뿐, 그곳에 함께 있었던 그를 기억하지는 않았다. 

그는 혹은 그들은 내가 죽은 줄 알 것이다. 무리를 지어 애도할런지도 모른다. 

낙타가 태어나기 전에 달빛 속으로 들어갔을 뿐이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놓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도착. 이곳은 그곳과 달라.

이곳은 그곳이 잘 보여, 

보일 뿐 소리는 들리지 않아.

보일 뿐 냄새를 맡을 수는 없어.


고요해, 아지랑이가 소리없이 손등에 내려앉아 움직이는 것이 이 곳 생명의 모두이지.  

아파트 베란다에서 일렬 주차를 하고 있는 마티즈를 본 적이 있어. 

반복해서 앞으로 뒤로, 앞차와 뒷차 사이에 몸을 끼워넣지. 나란하게 되지. 

나란한 차들을 볼 수 있는 곳,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던 우리를 볼 수 있는 곳,

그 손, 사실 마음까지는 아니었다는 것,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

손 등에 올라앉은 아지랑이 같은 것.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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