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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허연] 그날의 삽화

by 발비(發飛) 2016. 10. 7.

그날의 삽화


허연


1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

빗물은 점점 부담스럽게 아스팔트를 때렸고


반복되는 정체 속에서

나는 

덮어버린 것들과

그렇지 못한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조금 더 비싼 관으로 할 걸 그랬어."


삼십여 년 전

이른 나이에 상주가 됐던 우리가 

어머니에 대한 자책을 안고

그 길을 걷던 날도 

비는 내렸었다. 


2


체중이 많이 불어난 동생과 마주 앉은

입김으로 뿌연 저녁 감자탕집


빗물 흘러내리는 유리창 밖은

차갑고도 먼 나라.


늘 함께 걸었던 등굣길에 대해

나름대로 이름 지어 불렀던 잡초와 새 들에 대해

우리는 뭔가 책임지고 싶어 했다. 


묘지 이장 이야기를 하다 불콰해진 동생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날 참 비 많이 왔지, 형"


3


돌아오는 길


모욕으로 기억된 

몇 가지 아픈 과거들에 대해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은

우리의 어른스러움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지친 포유류 같은

동생의 등을 떠올리며


하루에 기차가 여덟 번쯤 지나갔던 그 둑방 길에서

우리가 함께 날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미리 딴 소리-


시의 힘은 이런 것일텐데, 나는 수업시간에 시는 화석이 되었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입 밖으로 그 말을 한 뒤, 

나는 시가 화석이 되지 않았다, 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시가 너무나 읽고 싶었다, 는 말을 다음 주 수업시간에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다. 


시가 화석이 되었다 혹은 시는 사라졌다고 말한 것은 

만약 내가 문학수업을 하고 있었다거나 글쓰기 수업을 했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판기획수업이었기에 시장에서 사라진 시집에 대해 말했다. 

팔리는 기획에 대해 말한 것이다. 출판의 가치가 그곳에만 있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지. 

말을 하고 난 뒤, 내 안에서 자연으로 구동되는 부정의 의지, 시는 죽지 않고 언어로 살아있다. 

나는 시적 언어를 여전히 그리워한다.


시집을 모두 팔아먹은 나, 감당할 수 없는 후회가 밀려온다.

회사에 있어서 살아남은 허연시인의 시집 두 권, 그가 쓴 시 에세이 한 권이 내가 읽을 수 있는 시의 전부다.

정말 다행이다.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소설이다.

시인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교직되어 무늬가 선명한 커다란 천을 짜고 있다. 

나도 그랬다. 

오빠의 죽음 20년 후에 긴 외국생활을 접고 돌아온 중년의 동생과 내가 처음으로 오빠가 뿌려진 그 강변에 섰을 때,

초록색 소주와 담배 한 대를 든 덩치 큰 동생은 온 몸을 흔들며 울었다. 

동생의 어린 아들이 그런 아빠를 낯선 모습으로 쳐다본다. 

나는 오빠와 잘 지낸 편이지만, 

오빠와 동생은 코를 맞대지 못할 만큼 싸웠고, 주먹다짐과 지금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서로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었다. 그 어린 나이에.

그 중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아 마주했다. 

나는 동생이 측은했다. 형에 대한 기억이 형에 대한 분노와 싸움이 거의 전부일 동생의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오빠에 대한 아픈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늦은 밤 죽은 형에 대한 기억으로 가슴이 아플 동생만 남았다. 


오빠의 유골이 뿌리진 아름다운 강, 강물위에 햇살이 펄떡이는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고, 그 위에 앉아있던 한 마리의 황새, 그 풍경에 안도했던 나와 눈물 범벅진 얼굴에 민망한 웃음이 서서히 돋으며 소주 한 잔이나 하자며 털썩 그 강변에 앉는 동생. 우리는 나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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