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히는대로 詩

[백석]흰 바람벽이 있어

by 발비(發飛) 2016. 10. 12.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싸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면 앞에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난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읽히는대로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춘수] 꽃을 위한 서시  (0) 2016.11.07
[김형수] 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  (0) 2016.11.02
[허연] 그날의 삽화  (0) 2016.10.07
멋진 시가 없을까?  (0) 2016.09.06
[박상천] 낮술 한 잔을 권하다  (0) 2016.05.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