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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김형수] 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

by 발비(發飛) 2016. 11. 2.

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


김형수


시를 한편 읽었으면 좋겠어

강하고 억센

기관차 같은 시를 읽었으면 좋겠어

아무도 앞에 나서서 팔 벌릴 수없는 

아무도 가로막고 안 비킬 수 없는

탱크 같은 시를

대포 같은 시를 읽었으면 좋겠어


대관절 이게 뭐란 말인가

어쩌자고 자꾸만 가라앉는단 말인가

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 

오늘도 나는 발버둥을 친다네

흙차의 정밀한 분해에 묻히는 땅강아지처럼 

파묻히면 나오고 파묻히면 또 나오는 

절망에 지친 땅강아지처럼!


바로 이거닷!

자꾸 시 한 편을 찾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강하고 억센/ 기관차 같은 시를 읽었으면 좋겠어/ 아무도 앞에 나서서 팔 벌릴 수없는/ 아무도 가로막고 안 비킬 수 없는


탱크 같은 시, 대포 같은 시,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깊고 깊은 침체에 빠져있으므로 

한 편의 시를 찾아다녔다. 결국 내가 만난 건 '한 편의 시를 찾는 한 편의 시'이지만 말이다. 

내 말이 그 말인데 하고 아, 긴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이어 쉬는 숨이 편해진다. 


대관절 이게 뭐란 말인가/ 어쩌자고 자꾸만 가라앉는단 말인가/ 길고 긴 침체의 늪에서/ 오늘도 나는 발버둥을 친다네

흙차의 정밀한 분해에 묻히는 땅강아지처럼/ 파묻히면 나오고 파묻히면 또 나오는/ 절망에 지친 땅강아지처럼!


그런 거였다. 뭘 어쩌자고 한 것도 아니고, 어쩌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마치 늪에 빠져 살려고 발버둥이라도 친 것처럼 점점 더 깊이 더 빠르게 빠지고 온 몸으로 느껴졌다.사람이 같은 걸까? 내가 같은 처지에 놓인 시인을 만난 것일까? 결국 시는, 그리고 시인은 이렇게 극단적이어야 한다. 절대절명이어야 한다. 내게 시는 서정이 아니라 절대절명의 순간에 듣는 것이며,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너무 힘이 들었다. 


김형수작가, 


오늘 아침, 자료를 찾던 중 그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몽골 칭기스칸의 이야기를 쓴 소설 [조드]의 첫 페이지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소설에서 문장을 배제하고 스토리로 읽고 있었던 요즘, 나는 그의 문장에, 문장의 템포에 표현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가 하려는 말이나 표현이 아니라 오직 그의 문장에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나는 첫 페이지를 읽으면서 판타스틱한 세상으로 순식간에 빨려들어갔다. 사건이나 인물이 아닌 오직 단어들로 이어진 문장만으로 빨려들어갔다. 어느 옛날 구전으로 내려오는 서사시가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었다. 이런 문장을 미친듯이 쓰고 싶다는 생각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첫 페이지를 읽고, 더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갈등을 하는 중이다. 혹 뒤이은 문장에 힘이 빠져 나의 판타지를 깰까봐도 걱정이다. 하지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멋지다! 간만에 멋지다! 


물의 나라에 갇힌 스물일곱 개의 섬들도 달아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웅덩이를 빠져나가는 길은 한 줄기밖에 없으니, 대부분의 물방울은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땅 위에서 가장 오래되고, 땅 위의 사람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깊고 차갑고 맑은 물이 항상 넘쳐나도 훔쳐 가거나 더럽히는 사람도 없었다. 호수를 어지럽히기에는 인간의 세상이 너무 작았다.

 

흘러가는 물의 주인들

빙빙 도는 강굽이 주인들

불어대는 바람의 주인들

누워 있는 돌의 주인들께 비나이다

 

이 같은 평화가 얼마나 갔는지 모른다. 물가에서 살았던 많은 사람들, 물에 얽힌 많은 사연들도 후세에 기억되지 못했다. 겨우 살아남은 이야기들은 전해지다 끊기고 변형되었다. 가령, 연못에는 하늘에서 하얗고 고운 백조 세 마리가 내려와 깃을 벗어놓고 목욕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어떤 사냥꾼이 훔쳐보다가 깃 하나를 감추어서 못 올라간 한 마리를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을 때 깃을 내주었더니 다섯을 데리고 날아가버렸다. 남겨진 아이가 커서 자식을 낳고,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그러다 열세 개의 부족으로 늘게 되어서…… 같은 이야기가 마을마다 부족마다 각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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