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겨듣는 曰(왈)

손가락

by 발비(發飛) 2012. 1. 30.

아주 이상한 방법으로, 그는 늘 끼고 다니는 두 켤레의 장갑을 벗은 후 방 안에 피아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끝으로 허공에 대고 연주했다. 방안을 걸어 다니고 오케스트라를 턱으로 지휘하고 두 개의 악장을 목청을 다해 노래 부르면서.

 

-김경주는, 미셀 슈나이더 <글렌굴드, 피아노 솔로> 중에서 인용, 나는, 김경주의 <밀어, 몸에 관한 명상> 중에서 인용

 

허공, 손가락

 

지난밤, 어두워서 검은, 검어서 깊은 허공에다 타이핑을 했다.

내게 떠오른 말들이 허공 자판에 한 글자씩 한 글자씩 새겨진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앞 말에 뒷말을 이어 나갈 뿐이다.

말이 말이 이어져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그는 나의 물잔을 들었다.

      그가 알아챘다. 그의 잔이 아님을...

      왼손으로 그의 물잔을 들었다.

      하지만, 오른 손에 든 나의 물잔을 놓지는 않았다.

 

      나의 물잔이 그의 오른손에,

      그의 물잔이 그의 왼손에,

 

      그는 그의 물잔에 담긴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다. 그의 목젖이 꼴깍하고 아래 위로 오르내린다.

      나의 잔은 여전히 그의 오른 손에 들려 있었다.

      물이 차서, 하얀 김이 서렸다.

 

 

말을 잇고 싶었지만,

어두워서 검은 허공, 깊은 허공은 말을 빨아들인다.

말의 꼬리는 틈을 주지 않고 사라졌다.

잇지 못한 말이 사라진다.

없었던 말처럼, 없어진 말.

 

피아노가 있었음에도 허공에다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피아노를 위한 연주라고 시인은 첨언을 했다.

다른 세상과의 조우, 예술가는 조우를 즐긴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그 너머, 그 너머 어디를 향한...좀 다른 연주.

 

나는 어두워서 검은 밤, 깊은 밤에 언어를 묻어두고, 언젠가 파헤쳐질 언어를 묻어두고....말의 꼬리 찾기를 그만둔다.

나는 곁에 누운 누군가의 가슴, 그 가슴은 뛰고 있었다...나는 뛰고 있는 가슴을 끌어안았다.

손이 멈추었다. 말이 멈추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말을 영원히 잊었을 것이다.

 

 

나는 손가락,

허공....虛空에 손가락.

 

 

 

 

 

 

 

 

'새겨듣는 曰(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무현 문재인 지지 나서다  (0) 2012.12.07
[알베르 카뮈] 여행의 가치  (0) 2012.05.15
[유안진] 침묵하는 연습  (0) 2012.01.06
[한용운] 책임  (0) 2012.01.06
알베르 까뮈 진실은 어디에  (0) 2011.12.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