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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강영숙] 스쿠터활용법 중에서

by 발비(發飛) 2009. 10. 13.

스쿠터 활용법 중에서

 

강영숙

 

난 정말 괜찮은 걸까요? 얼마 전에 전신 수영복을 샀거든요. 팔과 다리가 길어보여서 입고 있으면 우주인처럼 보였어요. 그리고 조깅을 했어요. 남산 언덕을 달릴 때는 산책 나온 외국인들이 하이, 하고 인사를 했어요. 난 내가 다른 세상을 살고 있다고 느꼈어요. 그러나 어쩌나, 동네 대학 운동장에서 조깅을 하는데 어떤 할머니가 날 불러놓고 말했어요. 당신, 미쳤수? 어떻게 그런 꼴로 대로를 활보해. 난 정말 미친 거 같아요. 10월에 그런 짓을 하다니요.

 

결국 당신처럼 나도 스쿠터를 한대 샀어요. 커다란 트럭에서 내린 건 내가 주문한 대로 핑크 클래식 스쿠터였어요. 엉덩이가 닿는 검은색 안장 부분을 제외하곤 보디 전체가 핑크색으로 뒤덮여 있었죠. 밤에도 잘 달리기 위해 다리 아래쪽으로 핑크색 보호판도 붙어있었어요. 소음도, 매연도 적게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앞에 달린 할로겐 헤드라이트는 눈부신 흰색이죠. 연인들의 데이트용 스쿠터라고 하지만 난 우선 이걸 타고 이모가 살던 집에 가보려고 해요. 만일 강이 얼어 있다면 스쿠터를 타고 강을 건널지도 몰라요. 그러나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돌아오기 며칠 전, 당신과 나는 스쿠터를 타고 바다에 갔었죠. 스쿠버 다이버들이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해안가로 밀려나오던 장면을 잊을수가 없어요. 시내 한복판에서 그 바다까지 가는 동안 기진맥진했죠. 뒤에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지러웠어요. 제니는 정말 잘 달렸어요. 아니. 당신은 정말 잘 달렸어요. 우리가 올라갔던 그 전망대 위에서 당신이 나한테 말했죠. "여자친구가 이 스쿠터를 놓고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요. 스쿠터를 가지러, 한번은 올 줄 알았거든요. 먹을 때마다 음식을 흘리는 좀 이상한 여자라서."

칠천원 주유에 이백 킬로미터 주행 가능, 정말 제 스쿠터가 그럴까요? 세상의 모든 걸 책으로 내는 당신의 나라에 혹시 스쿠터를 활용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소개한 책은 없을까요. 예를 들면 스쿠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법, 스쿠터를 이용해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는 범, 스쿠터와 할 수 있는 가장 재미있는 일 등, 세상의 모든 스쿠터 활용법 같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제니 핑크랑 내가 산 핑크랑 서로 인사할 날은 오게 될까요?

지금도 통통거리며 도시의 구석구석을 달리고 있을 당신의 스쿠터 소리가 들리네요. 난 스쿠터 소리를 좋아하게 됐어요. 좀 반항적이기도 하고 예민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좀 멍청하기도 하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국도를 달리는 나처럼요. 할리 데이비슨 행렬을 따라가는 것도 괜찮네요. 그러나 당신이 스쿠터를 타고 도시 여기저기로 여자친구를 찾아다녔을 생각을 하면 조금은 숨이 막혀요. 끝내 이런 질문은 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의 여자친구는 돌아왔나요?

 

 

 

아침에 배달된 문장이다. 난 강영숙의 문장이 좋다.

 

호흡은 느리지만 힘이 강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지만 끊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마음놓고 문장을 따라 간간이 이어지는 호흡을 즐긴다.

느린 호흡만이 호흡의 힘을 강하게 할 수 있다는 듯... 트래이닝 시키는 듯 하다.

 

느리고 강한 호흡.

그래서 느리다는 느낌보다 강하다는 느낌이 뒤에 남아있는,

그런 문장.

 

 

먹을 때마다 음식을 흘리는 좀 이상한 여자...

그건 난데...

그가 기다리고 있는 스쿠터의 주인.

돌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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