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
너무 잘 읽혀서 좀 당혹스러웠다.
퇴근할 즈음 동료 직원에게 책을 빌려 읽기 시작하여 출근길 전철에서 마무리를 했다.
영화 <에쥬케이션> <나쁜교육> <엘리펀드> 가 연달아 생각났다.
그래서 눈치챘다.
이건 성장소설이구나.
그런데 작가가 어른이 된 뒤 돌이켜 그 성장통을 앓던 시절로 회상한 것이 아니라,
성장통을 앓고 있던 어떤 아이가 자신의 성장통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스스로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 중이었다.
_ 안단테 Andante: 치매에 걸린 과거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아버지를 보는 아들
_ 쉿 Counting Pulses: 가수였지만 지금은 암투병중인 엄마를 곧 떠나야 하는 아들_ 담배, 마약
_ 휴식 Break: 수업시간 사이 쉬는 시간
_ 쥐 The Rat: 여배우를 캐스팅 하려는 캐스팅감독의 침실에 침입한 커다란 쥐
_ 성냥갑 Matchbox: 십대전, 십대초반, 십대후반, 그리고 이십대. 흡연경험
_ 승리의 유리잔 A Glass of Victory: 학창시절 학생장을 만난, 같은 선거에서 패배한 이가 성인이 되어 학교 파티장에서 다시 만난 일
_ 우리들 세상의 벽 The Walls of Our World: 정신과 의사의 진료실에서 환자와 의사의 대화
_ 증오 범죄 Hate Crime: 살해당한 아시안의 기사를 보면 미안해하는 백인여자 옆의 아시안
_ 최후의 일격 Coup de Grace: 자신은 복싱챔피언, 자신의 아버지는 전쟁영웅이라는 착각하는 아버지와 천재소설가 아들
_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 Strawberry Fields Forever: 계속...
위와 같은 여러편의 단편들로 <당신의 조각들> 은 이루어져있다.
작은 이야기속에는 많은 사람도 나오지 않으면서 분위기는 정적이다. 그리고 전체적인 톤은 짙은 회색빛.
새벽에 가까운 밤의 어둠이라기 보다 아직은 자정이 가까운 그런 밤이다. 간혹 달이 비치는 이야기도 있다. 별이 비치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더라도 여기 이야기들은 짙은 회색빛의 어둠이다.
스무살의 이야기라고 했다.
그리고 난 이것을 일기라고 생각했다.
일기는 참 여러가지 형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춘'
청춘, 이 오래되어 이제는 우리들의 단어열에서 사라지고 있는 청춘!이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이미 사라져서 쓰지 않는 단어지.
청춘!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같이 힘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얼음에 싸인 만물은 죽음이 있을 뿐이다.
민태원 '청춘예찬'이라는 교과서에 나오는 수필이다.
과연 이 책을 읽고 청춘을 듣기만 해도 설레이는 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靑春 푸를 청, 봄 춘
푸른 봄? 이건 뭔가 어긋남이다. 이것은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봄이 아니라 퍼런 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햇빛은 밝게 빛나는 데, 그것이 뻔히 보이는 데 난 퍼렇게 얼어 떨고 있는 것, 그것이 청춘이 아니었을까?
내 스무살의 소원은 빨리 마흔이 되는 것이었다.
불혹의 나이 마흔이 되면 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은, 삶의 모든 답을 알아 고민하지 않고 평화로움이 절정인 상태가 되어 날마다 고즈넉한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스무살 이후 이십년을 마흔이 되길 손꼽아 기다렸다.
<당신의 조각들>을 읽고 생각했다.
늦은 퇴근길 지금 나는 청춘은 듣기만 해도 설레이는 때라고 말할 수 있다고 불현듯 생각했다.
문제는 청춘을 생각하면 설레이는 이유이다.
위에 나온 이 소설집, 각 편의 소재가 되는 것들을 살펴보면 알게 된다.
아버지, 어머니, 담배, 마약, 섹스, 학교이후 동창생, 일과 일을 통해 만나는 이성, 신경정신과, 이방인, 도구로서의 자식
청춘, 이것들이 이들의 화두였다.
이런 것들로 벗어나서 자유로울 수 있는 때를 나는 불혹의 나이 마흔이라고 생각한 것일거다.
그럼 이 때가 지난 마흔은 이러한 문제들로 부터 자유로운가를 나자신에게 되물어본다.
그렇지 않다!
단연코 그렇지 않을 뿐더러 이보다 더 많은 악재들이 즐비하다.
난 청춘이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이는 이유를 타블로의 소설집을 덮고서야 감이 왔다.
그것은,
청춘은 덮개를 가지고 있으나, 성근발이다.
그 썩은 냄새, 아우성치는 소리도 간간히, 아비규환인 삶의 모습도 간간히 혹은 전부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불혹의 나이 마흔이 되면 그 썩은 냄새, 아우성치는 소리만 막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까지 불투명 장막에 꼭꼭 덮어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은폐를 시키는 법을 터득해 버린다.
그리고 멀쩡하다 한다.
그리고 청춘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인다고 말한다. 좋은거지 하고 말한다.
자신만 알고 있다.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신의 조각들> 목차를 써 두고 보니, 타블로라는 작가가 옆에 두고 고민했거나,
앞으로 올 일이라며 미리 당겨 서툴게 고민하고 있는 주제들을 보니,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옆에 두고 고민하고 있거나 혹 앞으로 그런 일이 올까 미리 당겨 고민하고 있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같다!
다시 말하지만 청춘이 설레이는 이유는 절대 덮어두지 않는 것이다.
타블로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이 리스트에서 해방되었니? 설레이는 청춘에서 출발한 너는 지금 어디니?"
갑자기 생뚱 맞은 말,
소설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시 딴 소리-
왜 타블로의 <당신의 조각들>을 읽었지?
출판사에서 근무하면서 생긴 좋은 습관(?) 중의 하나는 베스트셀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사실 전에는 많이 팔리는 책과 많이 읽히는 책, 뭐 그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필이 꽂히면 읽고 보고 듣고... 그것이 때론 자부심이 되기도 했었던 듯 싶다.
하지만, 책을 만들게 되면서부터
이건 책을 팔게 되면서부터라고 해야 맞을지도 모른다.
책을 팔게 되면서부터 내가 읽는 책이 아니라 사람들이 읽는 책에 대해서 보게 되었고, 사람들이 사는 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트랜드를 읽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인터넷 서점으로 들어가 어떤 신간들이 나왔는지, 어떤 책이 많이 팔리는지를 살펴본다.
책을 사지는 않더라도 목차, 출판사 서평, 작가소개 정도의 기본정보를 보려고 여기저기 헤맨다.
다 파악하고 싶은 것은 욕심이지만, 사실 내가 하루에 볼 수 있는 것은 두 세권정도,
책을 찾아들어가 읽는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리므로 언제나 두 세권 정도이다.
그럼 주목해야 할 책들이라고 내가 판단하는 기준은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어본다면,
일단, 저자, 출판사, 쟝르의 순인듯 싶다.
새로운 저자가 나타나면 누군지 뭐하던 사람인지와 기성작가라면 이 사람이 요즘은 어디에 필이 꽂혔나 보고,
출판사를 본다는 것은 출판사의 오너나 편집자의 취향에 따라 책을 기획하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좋아하는 출판사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나의 취향과 맞으니, 그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을 고르면 적어도 기본은 한다는 믿음이 있다.
또 쟝르는 시대의 대세가 어디인지 보는 나름의 자연스런 기준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다시 베스트셀러라는 지점으로 돌아가면,
지금 말하고자 하는 타블로의 책과 같은 경우는 학벌이 멋진 연예인이므로 서점에서나 출판사에서 곳곳에 노출하기 좋았을 것이고,
또 문학동네라는 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책이 기본적으로 어느 선이 안되면 내지 않는다는 신뢰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기에 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출판사는 뭐가 있는 것을 쫓는다.
작품성이 있던, 대중성이 있던, 역사 혹은 시대적으로 가치가 있던 그 중 어느 것이든 뭔가 있는 것을 책으로 담는다.
베스트셀러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나 출판사나 쟝르가 아니더라도 그 안에는 뭔가가 있는 것이다.
검색하다 걸린 몇 권의 베스트셀러라고 불리는 것들의 공통점.
1. 이게 뭐야! 행간읽기는 없는 듯 눈과 뇌와 가슴의 단계가 아닌 그 중 어떤 것을 뛰어넘어 빠르게 읽힌다.
2. 이렇게! 살라고 혹은 이렇게! 생각하라고 나에게 뭔가 지시한다.
3. 이런! 하는 말을 하게 만들며, 이런!은 좋은 감탄사이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의 감탄사이기도 하고 아무튼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당신의 조각들> 뭐가? 있을까?했다.
-마지막으로 잠시 딴 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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