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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대로 小說

[오정희] 중국인의 거리

by 발비(發飛) 2009. 4. 18.

시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려졌다. 석탄을 싣고 온 화자는 자칫 바다에 빠뜨릴 듯한 머리를 위태롭게 사리며 깜짝 놀라 멎고 그 서슬에 밑구멍으로 주르르 석탄 가루를 흘려 보냈다.

 

집에 가봐야 노루꼬리만큼 짧다는 겨울해에 점심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어서 우리들은 학교가 파하는 대로 책가방만 던져둔 채 떼를 지어 선창을 지나 항만의 북쪽 끝에 있는 제분 고장에 갔다.

 

제분 공장 볕 잘드는 마당 가득 깔린 멍석에는 늘 덜 건조된 밀이 널려 있었다. 우리는 수위가 잠깐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마당에 들어가 멍석의 귀퉁이를 밟으며 한 웅큼씩 밀을 입 안에 털어 넣고는 다시 걸었다. 올올이 흩어져 대글대글 이빨에 부딪치던 밀알들이 달고 따뜻한 침에 의해 딱딱한 껍질을 불리고 속살을 풀어 입안 가득 풀처럼 달라붙다가 제법 고무질의 질긴 맛을 낼 때쯤이면 철로에 닿게 마련이었다.

 

우리는 밀껌으로 푸우푸우 풍선을 만들거나 침목사이에 깔린 잔돌로 비사치기를 하거나 전날 자석을 만들기 위해 선로 위에 얹어 놓았던 못을 뒤지면서 화차가 닿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화차가 오고 몇 번의 덜컹거림으로 완전히 숨을 놓으면 우리들은 재빨리 바퀴사이로 기어들어가 석탄가루를 훑고 이가 벌어진 문짝 틈에 갈퀴처럼 팡를 들이밀어 조개탄을 후벼내었다. 철도 건너 저탄장에서 밀차를 밀며 나오는 인부들이 시커멓게 모습을 나타낼 즈음이면 우리는 대개 신발 주머니에, 보다 크고 몸놀림이 잽싼 아이들은 시멘트 부대에 가득 석탄을 팔에 안고 낮은 철조망을 깨금발로 뛰어넘었다.

 

  선창의 간이 음식점 문을 밀고 들어가 구석 자리의 테이블을 와글와글 점거하고 앉으면 그날의 노획량에 따라 가락국수, 만두, 찐빵, 등이 날라져 왔다.

 

  석탄은 때로 군고구마, 딱지, 사탕 따위가 되기도 했다. 어쨌든 겨우내 북풍이 실어나르는 탄가루로 그늘지고, 거무죽죽한 공기속에 해는 낮달처럼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짚수세미에 아궁이에서 긁어낸 고운 재를 묻혀 번쩍 광이 날 만큼 대야를 닦았다. 아버지의 와이셔츠만을 따로 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바람을 들이지 않는 차양 안쪽 깊숙이 넌 와이셔츠는 몇 번이고 다시 헹구어 푸새를 새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망할 놈의 탄가루들, 못 살 동네야.

 

  할머니가 혀를 차면 나는 으례 나올 뒤엣말을 받았다.

 

  광석천이라는 냇물에서는 말이다. 물론 난리가 나기 전 이북에서지. 빨래를 하면 희다 못해 시퍼랬지. 어느 독이 그렇게 퍼렇겠니.

 

  겨울 방학이 끝나면 담임인 여선생은 중국인 거리에 사는 아이들을 불러 학교 숙직실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숙직실 부엌 바닥에 웃통을 벗겨 엎드리게 하고는 미지근한 물을 사정없이 끼얹었다. 귀 뒤, 목덜미, 발가락, 손톱 사이까지 탄가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왕소름이 듣은 등어리를 찰싹찰싹 때리는 것으로 검사를 끝냈다. 우리는 낄낄대며 살비듬이 푸르르떨어지는 내의를 머리부터 뒤집어썼다.

 

  봄이 되자 나는 3학년이 되었다. 오전반이었기 때문에 한낮인 거리를 치옥이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천천히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커서 미용사가 될거야.

 

  삼거리의 미장원을 지날 때마다 치옥이가 노오란 목소리로 말했다.

 

  회충약을 먹는 날이니 아침을 굶고 와야 해요. 선생의 지시대로 치옥이도 나도 빈 속이었다.

 

  공복감때문일까, 산토닌을 먹었기 때문일까, 해인초 끓이는 냄새 때문일까, 햇빛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얼굴도, 치마 밑으로 펄럭이며 기어드는 사나온 봄바람도 모두 노오랬다.

 

  길의 양켠은 가건물인 상점들을 빼고는 거의 빈터였다. 드문드문 포격에 무너진 건물의 형해가 썩은 이빨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제일 큰 극장이었대.

 

  조명판처럼, 혹은 무대의 휘장처럼 희게 회칠이 된 한쪽 벽만 고스란히 남아 서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치옥이가 소근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곧 무너질 것이다. 나란히 늘어선 인부들이 곡괭이의 첫날을 댈 위치를 가늠하고 잇었다. 어느 순간 희고 거대한 벽은 굉음으로 주저앉으리라.

 

  한쪽에서는 이미 헐어버린 벽에서 상하지 않은 벽돌과 철근을 발라내고 있는 중이었다.

 

  아주 쑥밭을 만들어 버렸다니까.

 

  치옥이는 어른들의 말투를 흉내내어 몇 번이고 쑥밭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람들은 개미처럼, 열심히 집을 지어 빈터를 다스렸다. 반 자른 드럼통마다 조개탄을 듬뿍 써서 해인초를 끓였다.

 

  치옥이와 나는 자주 멈춰서서 찍찍 침을 뱉아냈다.

 

  회충이 약을 먹고 지랄하나 봐.

 

  아냐, 회충이 오줌을 싸는 거야.

 

  그래도 메시꺼움은 가라앉지 않았다. 끓어오르는 해인초의 거품도, 조개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해초와 뒤섞이는 석회의 냄새도 온통 노란빛의 해오리였다.

 

  왜 사람들은 집을 지을 때 해인초를 쓰지? 난 저 냄새만 맡으면 머리털 뿌리까지 뽑히는 것처럼 골치가 아파.

 

  치옥이는 내 어깨에 엇걸린 팔을 무겁게 내려뜨렸다. 그러나 나는 마냥 늑장을 부리며 천천히 걸어 해인초 냄새, 내가 이 시와 나는 최초의 악수였으며 공감이었던 그 노란 빛의 냄새를 들이 마셨다.

 

  우리 가족이 이 도시로 이사를 온 것은 지난해 봄이었다.

 

  늬 아버지가 취직만 되면...... 어머니는 차곡차곡 쌓은 담배잎에 눌러 담은 부대에 멜빵을 해서 메고 첫새벽에 나가는 어머니는 이틀이나 사흘 후 초죽음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간이 열이라도 담배 장사는 이제 못 해먹겠다. 단속이 여간 심해야지. 늬 아버지가 취직만 되면....

 

  미리 월남해서 자리를 잡았거나 전쟁을 재빨리 벗어난 친구,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취직 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석유 소매업소의 소방직으로 취직을 하고, 우리를 실어갈 트럭이 온다는 날 우리는 새벽밥을 지어 먹고 이불 보따리를 노끈으로 엉글레 동인 살림도구들을 찻길에 내다 놓았다, 점심때가 되어도 트럭은 오지 않았다. 한 없이 길게 되풀이되는 동네 사람들과의 작별 인사도 끝났다.

 

  해질 무렵이 되자 어머니는 땅뺏기놀이나 사방치기에도 진력이 나 멍청히 땅바닥에 주저앉은 우리들을 일으켜 세워 읍내의 국수집에서 구구수를 한 그릇 씩 사먹였다. 집을 나서기 전 갈아 입은 옷이건만 한없이 흐르는 콧물로 오빠와 나 그리고 동생은 소매와 손등이 반들반들하게 길이 들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어머니는 젖먹이를 안고 이불 보따리 위에 올라 앉은 채 트럭이 나타날 다릿목께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트럭이 나타난 것은 저물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헤드라이트를 밝힌 트럭이 요란한 엔진소리와 함께 다릿목에 모습을 드러내자 어머니는 차가 왔다, 라고 비명을 질렀다. 저마다 보따리 하나씩을 타고 앉았던 우리 형제들은 공처럼 튀어 일어났다. 트럭은 신작로에 잠시 멎고, 달려간 어머니에게 창으로 고개만 내민 조수가 무어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되돌아오고 트럭은 다시 떠났다. 우리는 어리둥절해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난간을 높이 세운 짐간에 검은 윤곽으로 우뚝우뚝 서 있던 것은 소였다. 날카롭게 구부러진 뿔들과 어둠 속에서 흐르듯 눅눅하게 들려오던 되새김질 소리도 역력했다.

소를 내려놓고 올 거예요. 짐을 부려놓고 빈 차로 올라가는 걸 이용하면 운임이 절반이니까 아범이 그렇게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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