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딴 소리부터-
지난 한달간에 읽은 소설들을 나열해본다.
백영옥의 스타일/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천명관의 고래...
소설에게 흥미를 잃었다고 해야 맞다.
농담처럼 삶을 디테일하게 소소하게 말하는 소설이 이제 더는 내게 자극적이지 않다고 말했지만,
사실이다.
내 삶이 소설보다 더 소설같기 때문에 왠만한 소재들은 마치 은행에서 읽는 잡지 정도의 느낌이랄까..
물론 내 주위에 있는 소설들이 문제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다 지난 한 달은 소설을 읽고 싶어졌다.
타인의 삶에 대해 궁금해졌다.
알 필요가 생겼다.
(시라는 쟝르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사유를 하게 하지만, 소설이라는 쟝르는 관계의 쟝르라고 개인적으로 규정한다)
백영옥의 <스타일>은 술술 넘어갔다.
이 책은 내게 어쩌면 보람찼다.
이미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내게 지금 내게 함께 일하는 나의 다음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뭘 먹고... 뭘 입고 사는 지를 공부?하게 되었으니...
책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후배들이 이해가 되었다!
... 그러니 보람차다.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여행의 기술>에서 감동받았던 그 필로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행복의 건축> <불안>에 이어
<우리는 사랑일까>를 읽으면서 한동안 아듀를 외쳐야 할 것 같다.
처음에는 그처럼 지적인 사고를 하고 살 수만 있다면 했었는데...
이제 그가 곁에 올까봐 두렵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결코 논리적인 존재는 아닌 것 같다. 특히 나는...
난 그런 투로 말하고 살고 만나고 싶지 않다.
천명관의 <고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아주 오래전에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충격.
책을 읽는 사람의 호흡, 그러니까 나의 호흡이 활자를 가지고서도 내가 이런 호흡을 할 수 있구나 생각했던....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호흡, 남성적인 호흡,
오직 검은 색 활자를 사용하고서도 3D 입체영상을 볼 때와 같은 호흡을 하는 나를 발견했었던...
주제나 소재?... 난 뭘? 하는 것을 떠나서
난 <고래>를 읽으면서 누군가를 기다렸는데...기다리는 시간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잊게 해 주었었다.
-잠시 딴 소리 끝-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에 이문열, 이청준, 박경리, 박완서, 김원일... 아마 그 정도의 소설가들의 장편들을 묶어서 한국문학전집이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중의 한 권이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
너무 더운 여름날이었지만, 난 내 생애 처음으로 연애소설을 읽느라 더운 줄도 모르고,,, 온 몸을 후끈거리며 꼬박 스물 몇 시간을 읽었었다. 자세히 생각이 나지 않지만, 연애라는 것은 간단치가 않구나.... 무거움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연애라는 것은 깨어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임과 동시에 어두움이라고...
박범신의 소설들을 간간히 읽으며 쉬운 듯 읽지만, 읽고나면 꼭 돌덩어리 하나를 몸에 매어 놓은 듯 무거워지는 묘한 느낌.
그 당시 많이 읽었던 박경리, 조정래, 황석영, 이상문, 이문열까지 ... 그들과는 다른 가벼움, 그 후에 따라오는 어두움.
그리고 아주 오래간만에 <촐라체>를 읽었다.
금요일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인쇄소에서 인쇄감리를 보면서...
감리가 끝나 한 판의 인쇄를 돌리는 30분의 시간마다 꼬박... 인쇄감리를 마치고 올 때 난 촐라체 한 권을 다 읽었다.
1. 쓰는 것
2. 오르는 것
3. 기다리는 것
4. 구별되는 것
5. 산다는 것
단 며칠의 이야기 안에 참 많은 눈(目)들이 있다.
쓰는 것에 관한 눈/ 오르는 것에 관한 눈/ 기다리는 것에 관한 눈/ 구별되는 것에 관한 눈/ 산다는 것에 관한 눈
나의 이 눈들이 그들의 7일을 본다.
1. 쓰는 것
참 좋다.
아주 오래된 작가가 쓴다는 것에 대해서 떨고 있다는 사실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다.
그는 주인공을 통해서 지금 자신이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너 이용해 뭘 하려고 하고 있냐?
내가 하려는 것이 맞냐?
나 떨고 있냐? 하면서 말이지.
상상한다.
마르고 늙은 한 초로의 남성이 자판 앞에서 들이 쉬고 내 쉬는 긴장된 호흡!
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참 좋았다.
2. 오르는 것
산에 통해 이야기를 했다.
몇 년 전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산을 올랐다. 정상 밑에 어느 산에나 있는 깔딱고개를 지날 때면 난 어김없이 전인권의 '새야'라는 노래를 들었었다.
"새야 이제 날아가라... 너의 하늘로..."
이 노래 가사를 들으면 좀 만 더 올라가면 보일 하늘을 향해 남은 힘을 다해 한 걸음씩 떼었다.
물론 올라가면 하늘 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곳을 올라가지만, 하늘을 향해 더 날아 올라갈 수는 없었다.
내가 존재하는 한... 난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는 한... 한 발을 디딜 땅이 필요한 것이지 드 넓은 하늘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절박함을 안고 산을 내려오곤 했었다.
절박함은 사람을 내몰기도 하지만, 내달리게도 한다.
머리로 굴리는 생각을 멈추게 하고 온 몸의 감각들을 곤두세워 그 촉수에만 다음의 삶을 의지하게 된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산을 내려온다는 것은 인간이 동물이 되어 자연 안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감각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그 자리를 좁힌다.
최소한의 존재를 확보했을 때 하늘로 날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3. 기다리는 것
기다리는 것을 달리 말하면 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
주인공 상민, 영교 그리고 베이스캠프.
그들은 왜 거기 있는가?
상민은 사랑하는 아내와 이혼을 하고... 지금도 사랑하는데..
영교는 빚쟁이를 칼로 찌르고 형에게 도망왔고... 죄를 지었는데...
캠프지기는 어린 아들이 중이 되겠다고 절로 갔는데... 꿈과 바꾸었던 아들인데..
서류로 치면 모두 미결!
베이스캠프에서 상민과 영교를 기다리듯이 우리는 이 복잡한 상황이 풀리기를 기다려야 한다.
'결자해지'라는 말과는 반대로 풀려고 하지말고 그 자리를 피해 기다린다.
문제는 엉킨 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이 엉키게 된 연유에 있으니까...
그 자리에서 풀 수 있는 문제는 인생에서 얼마나 될까?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풀 수있는 인생의 문제... 그건 삶의 문제가 아니라 삶 이후의 단조로움이다.
존재, 혹은 실존
그것은 현재라는 곳에서 가능하다.
존재 혹은 실존을 고집하는 동안 난 감옥에 갇힌 것과 같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삶의 문제에 있어서는...
난 떠난다.
몇 번에 걸친 나의 여행은 현재에서는 어찌 할 수 없는...
내가 실존하는 한, 내 실존의 영역은 점점 커져가고 내 실존의 영역이 커지면 커질수록 삶은 내게 아니꼬운 눈길을 멈추지 않는다.
나도 이제는 안다.
삶은 내가 눈을 부릅뜨고 맞장을 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슴푸레한 저녁에 깊은 산속에서 달빛에 서서히 몸을 드러내는 늑대처럼... 삶은 늑대다.
현재가 아닌 곳으로 피한다.
그리고 내가 있었던 곳을 본다.
내 실존의 범위가 명확히 보인다.
빈자리라는 이름으로...
기다리는 것은 그 상황을 피하는 것이고, 피하는 것들은 촉수를 도망나온 곳을 향해 세운다.
4. 구별되는 것
촐라체에 있는 그들과 서울에 있는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이제 손가락 발가락 스무개 중에 손가락 두개가 남은 그들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촐라체를 넘은 그들과
촐라체를 보고 있는 우리와
혹은 촐라체를 찾고 있는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어쩌면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눈을 감을 때마다 비치는 검은 거울 안에 나의 얼굴이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촐라체는 감은 눈에 나를 비추는 검은 거울이다.
5. 산다는 것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어렵고 힘들거든 빙벽에서 차라리 손을 놓았으며 하던 상민과 영교를 생각하라고 말한다.
카라바스에 떨어지며 죽음의 시간을 맞이했던 영교는 슬픔이나 고통이 아닌 자유와 행복에 가까운 감정이었다고 말한다.
사람은 빙벽을 올라야 하는 고통만큼이나 힘들지만 죽음은 차라리 더 가벼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며 죽음이라고 불리는 최악의 상태를 우리가 연연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는 듯 한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고통-죽음은 촐라체를 품고 있었냐 아니야에 따라 다른 것이다.
죽음 그 후의 것이...
촐라체 너머 카르바스에서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 산악인처럼...
산다는 것은 죽음 이후의 얼굴을 확보하기 위한 시간일런지도 모른다.
6. 나는
잠시 딴 소리에서 지난 한 달 동안 시간을 내어 읽었던 소설을 언급했었다.
그 소설에 대해 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난 지금 내 안에서 밀려나오는 수많은 말들을 꿀꺽 참고 있는 중이다.
문학에서 좋은 작품은 무엇일까? 하는 다소 학구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시나 소설... 아니 예술이라고 하자.
이것들을 읽은 뒤에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
너는?
그럼 나도?
그러니?
난 아냐?
왜?
그렇게?
난 간만에 나의 실존을 내 삶에서 인식하게 되었다.
실존의 크기와 나의 실존의 영역을 계획하는 것은 어떨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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