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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보는대로 책 & 그림

[김훈] 바다의 기별

by 발비(發飛) 2008. 12. 6.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이거다 싶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면 책을 읽는 것을 꽤 즐기는 사람으로서 참 좋은 몫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충실히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지난 주에 <바다의 기별>을 구입하였다.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책을 사면 하는 일이 한 줄이라도 읽기가 아니라 장정을 보는 것이 되었다.

 

그래서 첫번째, 여러가지 후가공을 보고 잘했군.. 아니군... 이런 짓을 하며... 좋다. 맘에 들어!

두번째로 원고량을 체크한다... 이건 급조된 양이잖아... 거기다가 뒷부분에 있는 발간한 책들의 서문들이 쭈욱! 그 뒤에 화가 오치균의 그림까지.....이분이 이 원고량으로 스스로 책을 내실분일까? 하고 생각하며... 아닐거야 ! 출판사에서 무지하게 졸랐겠군!

 

혼자서 일단 맘이 상한다.

개인적으로는 김훈작가의 소설보다는 에세이류의 글을 더 좋아하는데...

최대한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며... 일단 김부터 새며... 읽었다.

 

본격적으로 책 이야기를 한다.

 

이 책은 네개의 챕터로 나누어졌다.

 

1. 바다의 기별

- 작가의 단상 모음일 것이다. 짧게 떠오른 생각들의 메모 같은 느낌. 내가 왜 이런 단상이 떠올랐을까? 하며 스스로 생각을 추적해놓은 듯하다. 그래서 글들의 주제는 과거기억들. 현재 자신에 대한 탐구... 역사적인 것에 대한 생각들을 실었다.

이때 이 책에 대한 내 감정의 희노애락전선이 크게 파도를 쳤었다. 너무 감동적이었던 해금이야기...와 내겐 너무 건조했던 충렬사 이야기...

이건 억지조합이야! 하고 결론을 내렸지. 그리고 책을 잠시 덮어두게 만들었었다.

 

2.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작가의 옛날이야기들이다. 챕터의 제목으로서..'기다려라 우리가 간다'(이게 재미있다) 과거는 과거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현재에서 출발했을 때만이 과거의 진정하고도 가치있는 해석이 가능하는... 생각 정리를 하게 만들어주었다. 과거의 일을 과거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한다면 대개의 과거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현재에서 과거로 잇는 선을 따라 간다면 그것은 점이 아니라 커다란 땅이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책을 잠시 덮어두고 무시하다가 유난히 느린 컴퓨터의 창을 열때 읽었던 챕터이다.  그러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어! 하고 내게 다가왔던 희한한 글들이 모였다.

 

3. 말과 사물

-작가 김훈이 강연을 했던 원고인 듯하다. 작가이므로 작가의 자신이 쓴 글에 대한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었다.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원고가 얼마나 없었으면 강연록을 실었을까? 급조한 티가 너무 난다. 하면서 또 툴툴.... 그런데 내가 어디서 언제 김훈작-가의 강연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말과 언어의 목적, 언어를 도구로 한 글의 목적, 쓴다면 쓰는 것에 대한 목적들을 정리해 주었다. 내가 하고 있는 짓들의 오류들이 훤히 보였다.

 

4.부록-서문과 수상소감

-내가 급조라는 말을 하게도 되지 않았느냐는 말이지. 지금까지 출간한 책들의 서문들과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의 당선소감들이 실려있다. 책을 출간할 때의 마음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물리적 연혁보다는 정신적인 연혁을 느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챕터를 끝으로 책을 덮는 순간, 반성했다.

그리고 책을 만든다는 편집자로서의 삶을 살기 전과 후의 관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했다.

김훈작가가 언어를 규정하면서 소통이라는 말을 썼다.

언어는 소통이 절대절명의 전제이며 과제라는...

그럼 난?

내가 편집자가 된 후 언제나 농담처럼 말했던 편집자의 편집증을 자랑스럽게 떠벌렸던 순간들이 떠올라 부끄러웠졌다.

편집자는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유도해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일 것이며,

그 사람이 듣는 훈련이 안되어있으면 소통의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절대로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거다.

 

소설을 읽으면 자유로웠다. 마치 공중부양을 하는 사람처럼 몸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사라지고 소설안의 인물이 되어 그의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한 동안은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의 인물로 살았다. 즐거웠다. 나는 필요치 않았다.

시를 읽으면 편안했다. 시가 던져준 한 마디의 언어, 그 언어가 하루 24시간의 일상을 유색렌즈처럼 다른 세상으로 만들어주었다. 난 언제나 현실이 아닌 좀 더 아름다운 꿈속 같은 세상에서 살 수 있었다.

에세이류를 읽으면 또 어땠나. 공간을 확보한 느낌이랄까... 그건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눈으로 해독받는 느낌, 카운셀링을 받는 느낌으로 한 번씩 에세이류를 읽고 나면 난 잔잔한 바다와 같은 평화로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건 잔잔한 바다 위에는 하늘의 공간이 큰 것처럼 내 안의 공간이 넓어지는 느낌과 같다.

 

그런데 난 언젠가부터 그런 자유와 평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것은 방금 전에 덮은 <바다의 기별> 이라는 책에서 가장 크게 왔던 부분인 글과 언어의 역할에 대한 재 인식이다.

난 언어의 최악인 돌덩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언어는 불안한 존재이다.

언제나 내가 말한 것은 말로서 내게 떠나는 순간, 누군가에 의해서 묵살이 된다.

그렇게 연약한 존재가 언어라고 했다.

그런 언어가 강하디 강한 돌덩이가 되어 온전한 모습을 지킨다면, 소통은 이루어질까?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책을 읽으며 더는 그 세상으로 빠져들 수 없게 되었다면,

나처럼 불행한 책 읽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책을 읽었으나, 난 돌덩이처럼 그대로이고, 내가 읽은 책들 또한 돌덩어리로 나를 누르고 말 것이다. 책만이 아닐 것이다.

내가 싸울 대상은 책이 아닌 책에게 이런 마음이라면,

싸울 대상이 될 인간들이 내게 들려준 언어들에게 대해서는 어떻게 했을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부터 난 편집증에 빠져 소통을 거부한 채, 소통의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었을런지 모를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돌덩이가 커다란 바위가 되어 어느 세계들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는 짓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바다의 기별>

 

책은 참 여러가지의 모습이다.

그래서 책은 생명체이다.

 

이별하면서 건넨 하얀 국화는 내내 아름다움이 아니라 슬픔이며,

현재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빨간 장미는 아름다움이며 영원한 행복이다.

 

같은 경우에 다른 꽃을 받았다면,

그것은 또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유기체이며 생명체이다.

난 이 유기체이며 생명체인 것들의 말을 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내 생각이 아닌 현재의 사실에,

내 생각은 돌덩이다.

사실은 물이다. 물들이 모든 커다란 바다에서 들려주는 말들을 들을 것이다.

 

이 책을 만드신 편집자에게 감사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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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는 삶에 대한 직접성을 관능을 통해서 표현하려 했던 글입니다. 그래서 삶의 느낌, 떨림, 결핍 같은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 셈이지요. 나는 전생에 개이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관능을 통해서 심리를 헤아리려 합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를 확실히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언어를 이끌고 나갈 수 없을 때 작가는 저주받은 직업입니다. 저는 독자였을 때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작가로 불리우고 나서는 독자가 되고 싶습니다. 소파에 누워서 파이프를 물고 책을 읽는 독자가 되고 싶습니다.

 

'내세'라는 곳이 만일 있다면 책이 없고, 음악과 색깔만 있는 세상에 태어나고 싶습니다.

 

저는 '외롭다'라는 정서에 대하여 매우 둔감합니다. 저는 남들이 '외롭다'라고 말하면, 그것이 도대체 어떠한 정황을 표현하는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외롭다'라는 말은 '존재한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본래 스스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입을 열어서 말할 필요가 없는 감정입니다.

 

저는 소년시절에 <톰소여의 모험>, <미시시피강의 생활>, <암굴왕>, <허클베리핀의 모험>, <삼총사>, <15소년표류기>, <소공자>, <소공녀>, <돈키호테>, <아이반호>, <푸르타크영웅전>, <그리스신화>, <김내성>, <김동인>, <이광수>, <신지식>... 같은 작가들의 소설 등을 읽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삶의 구체성을 풍부히 확보한 소설, 또 삶과의 직접성의 관계를 확보한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세이는 1인칭의 글이고, 소설은 3인칭의 글입니다. 1인칭은 나를 드러내는 글이고, 3인칭은 대상을 드러내는 글입니다. 저는 에세이를 쓸 때 편안하고 소설을 쓸 때 고통스럽습니다.

 

삶의 구체성을 풍부히 확보한 글이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담담한 태도가 옳고 격정적인 태도가 그른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사물과 언어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눈과 귀가 어두워진다! 날이 저문다!).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가 이것만이 문제입니다.

 

디테일을 충실히 갖추는 글, 삶과의 직접성을 확보한 글이 좋은 글입니다. 저는 이제 그런 글을 쓰려고 합니다.

 

저는 현실적인 일에 늘 따지고 들면서 시비를 가립니다. 저는 현세적 가치를 경멸하고 인간들을 경멸합니다.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어내면서 한 줄씩 쓰고 있습니다.

 

그러게요. 경제가 좋아져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없이 밥벌이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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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에서 돌아온 밤에 램프 밑에 앉아서 당신의 정맥에 관하여 적는다.

 

-내 살아있는 몸 앞에서 '너'는 그렇게 가깝고 또 멀었으며, 그렇게 절박하고 또 모호했으며 희미한 저쪽에서 뚜렷했다. 

 

-'너' 가 삼인칭으로 다가오는 날엔 내가 사는 말을의 곡릉천을 보러간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관이 내려갈 때 나는 비로소 내 여동생들의 '오빠'라는 운명에 두렵고도 버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시간 속에서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 아니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장모의 초상을 치르면서 나는 그 절대적인 개별성에 경악했다.

 

-소독약은 우울성의 냄새를 풍긴다.

 

-종양의 MRI 사진은 무서웠다. 반딧불같은 종야의 불빛들이 깜박거렸다. 종야의 나라는 안개가 낀 듯싶었다. 생명 속에는 생명을 부정하고 생명에 반역하는 또 다른 생명이 서식하고 팽창한다. 이 반역은 생명현상인 것이다.

 

-생 속에 사가 있고 노가 있으며, 병 속에 사가 있는 것이다.

 

-생노병사는 경멸을 받아 마땅한 병리적 징후가 아니라 개별적인 나의 자연현상인 것이다.

 

 

-살려서 돌아오라,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라.

 

-도심을 질주하는 소방차의 대열을 향해, 나는 소방차 만세, 인간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남루한 마을 어귀에 높이 솟은 소방서 망루를 올려다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 대한 안도감을 겨우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울면서 그 소방관아저씨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었다. 그러자 무서운 밤이 덜 무서워졌고, 세상은 문득 따듯하게 느껴졌다.

 

-그때 그 여자는 길섶에 돋아난 풀한포기보다 더 무명해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러자 내 마음 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것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듯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룸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가로등 하나 없는 형무소 앞 광장은 캄캄하게 어두워졌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고향이라든지 타향이라든지 하는 그런 어휘가 아예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있다.

 

-불화하는 색들이 불화의 긴장을 견디면서, 온갖 색들을 불러모으면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오치균이 손가락으로 물감을 으깰 때 재로가 육체와 섞이는 그 확실한 행복감을 나는 짐작할 수 있다. 재료를 장악하고, 그 재료를 육체화해서 재료를 마소처럼 부릴 수 있는 자만이 예술가인 것이다.

 

-부딪히고 일그러진 것들이 일그러진 채로 강력하고 당당하다.

 

-그것들은 흔들리면서 스며들고, 끌어안고 배척하면서 미래의 시간 속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의 사북은 강원도 사북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빛과 생멸을 거듭하는 이 세상의 모든 곳이다.

 

 

-이 허약한 것이야말로 언어의 힘인 것입니다. 언어란 바로 그렇게 무너지고 수정되듯 허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소통할 수 있는 힘이 들어있는거죠. 그렇지 않고 언어가 완강한 돌덩어리처럼 굳어져 다른 언어에 의해서 절대로 부서질 수 없다면, 그것은 언어가 아니고 무기입니다.

 

-꽃이 피었다는 꽃이 핀 물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언어입니다. 꽃은 피었다는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그것들 들여다보는 자의 주관적 정서를 섞어 넣은 것이죠. "꽃이 피었다"는 사실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의견과 정서의 세계를 진술한 언어입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한 주어와 동사의 세계죠. 내가 사랑하는 주어와 동사의 세계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 분은 사실에 입각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단순성이 온갖 슬픔보다 더 거대한 슬픔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저는 요즘 이런 명석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몇 편의 소설 속에는 아무런 위안이 없습니다. 다만 독자들이 한없는 고문과 고통과 절망의 늪으로 몰고 가는 것, 그 결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이 세계의 의미와 무의미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것, 그것이 저의 글쓰기입니다.

 

-의견과 사실을 구분해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을 할 때 글을 쓸때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의견을 말하는 것인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의견인지, 혹은 아무런 사실을 바탕에 두지 않고그저 인간의 용감을 지껄이는 것인지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하면, 이런 말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에 기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언어가 존재하는 목표는 오직 하나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시나 소설들도 다 소통을 꿈꾸면서 존재하는 예술입니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면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킵니다.

 

-신념의 언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기 주변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보고 이것은 무엇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개는 나보다 200배 가까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거죠. 다만 저놈이 말을 못해서 멍멍 짖고 다닐 뿐이지 . 말 못하는 저놈의 삶의 내용을 내가 쓰겠다고 쓴 것이<개>라는 소설입니다.

 

-동어반복에 갇히면 우리는 거기서 평생 헤어나지를 못하고, 우리 인식의 영역을 넓혀나갈 길이 없는 것이죠. 이것이 말을 다루는 자가 말 앞에서 느끼는 고민입니다.

 

-말의 꿈은 소통입니다. 소통의 꿈은 무엇인가. 소통은 이 세계를 좀 더 나은 세계로 만들려는 꿈을 갖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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