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내 영화 파일 중에 [프리다 칼로]가 있은지는 꽤 오래되었으나,
내가 본 프리다의 그림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난 비겁해서 너무 센 것들을 보면 지례 겁을 먹고 뒤로 피한다.
그리고 몰래 그것을 관찰한다.
감히 내가 넘볼만한 것인지 아닌지 탐색을 하는 것이지.
프리다 칼로가 그랬다.
그러다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르 클레지오의 작품들을 검색하다가
(내가 좋아하는) 다빈치출판사의 아트시리즈 중에 프리다와 그의 남편인 디에고에 대한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얼른 그 책을 주문했다.
영화로는 나중에...
우선 내게 정보가 더 입수되기 전에 노벨상을 받은 사람의 시각으로 그녀을 만나고 싶었다.
아름다운 눈으로, 고급스러운 눈으로, 넓고 깊은 눈으로 프리다를 만나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는 내가 무섭게 느꼈던 프리다를 르 클레지오는 왜 주목했을까? 그만한 이유가 있을거야... 멋진 인간일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읽어나갔다.
생각보다 책을 읽는데 꽤 오랜 시간인 듯 싶었다.
한 일주일쯤.
왜?
물론 회사일도 바빴지만, 그보다 페이지마다 있는 프리다의 그림을 쳐다보느라... 시간이 꽤나 걸렸다.
그저 지나갈 수 없는 그림들이었다.
전철안에서 한 장 한 장을 멍하니, 쓰리고 아프게 봤던 기억들이 지금도 선명하다.
잠깐 영화로 넘어간다.
책을 읽던 중 영화를 봤기 때문에... 영화 이야기도 해야 한다.
영화는 프리다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로부터 시작한다.
침대의 지붕(?)에 거울이 달린... 그 아래 프리다는 누워있고, 침대는 트럭에 실려 전시회장으로 간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프리다는 괴로워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프리다가 자신의 전시회에 가기 위해 옮겨지고 있었다. 본인의 의지로...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프리다가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를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다.
발칙한 여고생 프리다는 이미 멕시코의 유명한 벽화 화가인 디에고를 추앙하고 있었다.
전철사고가 나고 척추 손상을 입어 불구가 되고, 재활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디에고를 찾아가고 그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결혼을 한다.
거침없는 프리다로 그려지고 있다.
선이 굵은 여자로 그려지고 있다.
디에고의 여성편력, 즉흥적인 성격으로 프리다가 겪는 심리적 고통, 그렇지만 영화에서는 그에 만만찮게 프리다에게도 남성력과 동성애에 대한 냄새도 흘렸다.
영화에서 프리다의 삶은 그럴만 했다.
[프리다]라는 영화에서 프리다는 대단한 여자였다.
영화를 본 뒤에도 책은 계속 읽었다.
그림도 봤다.
비슷한 시기에 그린 디에고의 그림도 같이 봤다.
영화를 본 뒤, 책으로 만난 그들...
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눈으로 만난 프리다와 디에고는 실로 환상적이었다.
눈과 귀로 보여준 영화보다 더 사실적으로 그들 동선까지도 모두 따라갈 수 있도록 그려준 작가의 필력에 감사하다고 몇 번을 생각하며
르 클레지오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체감할 수 있었다.
프리다와 디에고는 애증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관계이다.
둘은 서로때문에 행복하고 서로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럴 경우 타자가 보는 시각은 딱 두 개 뿐이다.
그들을 행복으로 묶을 경우와 불행으로 묶을 경우.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르 클레지오는 그들 둘을 두가지의 분류로 나누지 않았다.
디에고를 촘촘히 살피며 그의 이야기를 다 들어주고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주고
프리다의 이야기를 하나 빠짐없이 다 들어주고 또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주는 듯 했다.
프리다를 사랑하면 디에고를 미워해야 하는 것인데
난 분명 프리다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디에고도 이해하게 되었다. 감사하게 되었다.
프리다는 디에고때문에 그녀의 독특한 그림들을 그릴 수 있었다.
디에고와 결혼을 하기 전, 소아마비와 사고 인해 거의 집안에만 있었던 프리다의 그림 소재는 가족이거나 친척이거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그림은 프리다의 그림에서 많이 사용되는 빨강과 초록의 대비로 강한 느낌이었지만, 대체로 평화롭다.
침대거울을 통해 그림을 그린 자신의 모습조차에도 평화가 보였다.
그렇지만 디에고를 사랑하여 결혼을 하고, 디에고와 더불어 사는 동안 새로운 눈이 생긴다.
처음에는 프리다 자신이 두 개인 그림을 그리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두 눈 사이에 또 다른 눈을 하나 더 그리기 시작한다.
난 그것을 프리다의 '제 3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티벳불교사원에 가면 제 3의 눈이 있다.
이 눈은 우리가 가진 보통 두 개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 볼 수 있는 눈이다. 말하자면 영적인 눈이다.
간혹 그런 경험을 한다.
무엇인가를 똑바로 보면서 몰입하는데, 두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희미하게 사라지면서 또 다른 장면이 보이는 경우 말이다.
우리는 쉽게 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난 그 시점에 우리 두 눈 사이에 제 3의 눈이 생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눈에 너무 몰입하면 두 눈은 멀어지고 제 3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면 큰일이지만, 이런 경우 도통했다고 하거나 아니면 돌았다고 하거나...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불교문화권에서 눈 사이에 바르는 안료도 제 3의 눈을 밝게 하려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통 두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 제3의 눈으로 보는 진실이 정말 진실이라는...
다시 돌아가면,
프리다에게 제 3의 눈이 생긴것이라고 난 생각했다.
그 눈은 디에고를 위한 눈이다.
프리다는 작품의 대부분이 자신과의 갈등에서 오는 결론점을 그렸다. 그리고 그 안에 디에고가 있었다.
영화에서 그린 센 여자, 강한 여자가 무엇을 보았던가를 생각해본다.
결국 프리다가 그린 것은
온몸을 못이 박힌 몸이거나,
침대위에서 피를 질질 흘리고 있는 여자이거나,
자신과 또 다른 자신의 심장을 서로 연결해야만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여자이거나,
디에고를 두 눈 가운데 새겨둔 여자이거나,
죽음을 기다리며 침대 위에 누워 해골을 품거나 마시는 여자이거나,
엄마의 자궁을 그리워하는 여자이거나,
온 몸에 화살을 맞은 여자이거나...
그 그림을 보는 내내 아픔이 깊었다.
두 눈썹이 서로 맞닺아 있어, 프리다의 눈이 더욱 강해 보이는 그림 속의 프리다를 보면서
가슴이 뻐근해지는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프리다의 그림이 너무 강해서 도망가며 두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던 나는 그녀에게 위로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여자. 상처받은 사슴...라고 프리다를 이야기한다.
나도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강한 그림을 그렸을 프리다가 내게 박힌다.
프리다에게 완전 몰입한 시간이 두 주일정도?
그리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뭔가 보거나 읽으면 바로 피드백을 하지만, 프리다에게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시간을 보내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프리다는 내게 어떤 맛일까... 어떤 냄새일까... 어떤 색일까....
내게 들어온 프리다가 적절히 잘 묵어, 내가 기억할 단 한 가지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남아있길 바라면서...
그녀가 제 3의 눈으로 본 디에고를 인정하며 그 고통의 세상에서 자신을 이뤄낸 것을 보면서
내게 간혹 보이는, 제 3의 눈으로 보이는 세상.
난 그것을 인정하고 사는걸까?
영화와 책 한 권을 붙들고 몇 주를 보낸 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라틴아메리카 거장전에서 디에고와 프리다의 그림 몇 점을 보았었다.
그들은 예술가였다.
삶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함께 주는.....
예술가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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