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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겨듣는 曰(왈)

[싸르트르] 벽 중에서

by 발비(發飛) 2008. 9. 18.

냉소의 최소값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못된다.

죽음을 눈앞에 놓고 보니 저 석탄더미도, 이 벤치도, 페드로의 더러운 얼굴도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톰과 마찬가지 생각을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나는 5분쯤 사이를 두고 밤새도록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땀을 흘리면서 두려워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곁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은 말이 아니었다. 얼굴에는 죽음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24시간 동안 톰의 곁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게 말을 걸고 하면서도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함께 죽는다는 이유로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을 띠고 있었다.

 

 (......)

 

나는 자려고만 하면 잠시 잘 수도 있을 것 같았다.

58시간 동안이나 눈 한번 붙여 보지 못해 기진맥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남아있는 두 시간의 여행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잠들면 놈들은 새벽녘에 와서 나를 두들겨 깨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졸린 얼굴을 하고 놈들의 뒤를 따라가서 영락없이 쓰러져 버릴 것이다.

그건 질색이다.

나는 동물처럼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싫었다.

나는 일어나 돌아다녔다. 그리고 기분 전환을 위해 내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추억이 뒤죽박죽 되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름다운 추억도 있고 흉측한 추억도 있다.

아니 적어도 전에 나는 그렇게 말해왔다.

거기에는 사람의 얼굴도 있고, 여러 가지 사건들도 있었다.

축제일에 발렌시아에서 투우의 뿔에 쓰러진 소년 투우사의 얼굴이며, 백부의 얼굴, 라몽 등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여러 가지 사건도 회상되었다.

그 해 석달 동안 직장을 잃었던 일이며, 굶어서 죽을 뻔한 일들, 그라나다에서 밤을 밝히던 일도 생각났다,

사흘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였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도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을 생각하니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얼마나 행복과 여자와 자유를 갈망하였던가!

나는 스페인을 해방시키고 싶었다.

나는 피 이 마르갈에 심취하여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해서 군중대회에 나가 연설했다.

나는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모든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자신의 일생을 눈앞에 삼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건 새빨간 거짓이다.' 하고 생각했다. 내 생애는 이미 끝장이 났으니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내가 여자들과 어떻게 놀러 다니기도 하고 희롱하기도 했던가를 생각해 보았다.

미리부터 죽을 줄 알았더라면 나는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일생이 붙잡아맨 자루 속에 들어가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가 미완성품들이었다.

나는 한동안 내 인생을 비판해보려고 했다.

아름다운 일생이었다고 스스로 타일러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미완성품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영원을 위한 수표를 끊으면서 일생을 보내 왔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제는 아무 미련도 없다.

하긴 매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산더미 같이 있기는 있다.

망사리니아의 맛과 여름 카딕스 근처의 바닷물에서 즐기던 해수욕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 모든 매력을 앗아 가버린 것이다. 의사는 엉뚱한 생각을 하였다.

“나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유언이나 유물을 전해 드리겠어요. 군사정부의 승인만 있다면...”

그러자 톰이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소.”

나는 잠자코 있었다.

톰은 나를 이상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콘차에게 전할 말이라도 없나?”

“없네.”

나는 제법 친한 사이라도 되는 체하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했다.

어젯밤 그에게 콘차의 얘기를 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런 얘기는 참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콘차와는 1년동안 함께 지냈다.

나는 어제까지만 해도, 그 여자와 1분 동안이나마 만날 수 있다면 팔 하나쯤 도끼로 잘리더라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얘기를 그에게 하였던 것이다.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만나고 싶지도 않고 또 전할 말도 없었다.

팔로 껴안고 싶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온 몸이 잿빛이 되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내 꼬락서니가 너무나 끔찍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육체를 보아도 역시 무서운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으면 그녀는 울부짖을 것이다.

몇 달 동안은 살고 싶은 의욕조차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죽는 건 여기 있는 나 자신이다.

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을 생각해 보았다.

나를 지그시 바라볼 때면, 그 무엇이 내 속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끝장이 난 것이다,

아마 그녀가 나를 보려고 하여도 시선이 얼어붙어 내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고독하다.

톰도 고독하지만 사정이 나와는 다르다.

그는 말 탄 자세로 걸터앉아서 씁쓸하게 웃으면서 벤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나무를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마치 무엇을 망가뜨리는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가 얼른 손을 떼고 부르르 떨었다.

내가 만약 톰이라면 그런 장난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아일랜드인의 수작임이 분명했다,

그나 나에게도 모든 물건이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다.

물건들은 여느 때보다 형태가 분명치 않고 밀도도 엷은 것 같았다.

벤치나 등불이나 석탄더미를 보기만해도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물론 죽음을 분명히 목격할 수는 없지만, 내가 죽는다는 것은 모든 사물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죽어가는 환자의 머리맡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를 말하는 사람처럼 물건들이 뒤로 물러나 멀리 얌전히 서 있는 사물을 보더라도 죽음을 알 수가 있었다.

아까 톰이 벤치에서 만진 것은 실상 제 자신의 죽음이었던 것이다.

아마 나는 현재와 같은 상태로는 설사 목숨을 살려 집으로 돌려보내준다고 하더라도 나는 냉담했을 것이다.

영원히 살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진 이상, 몇 시간을 더 살든 몇 해를 더 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애착을 느끼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을 뿐더러 어느 의미에서는 차라리 마음이 평온했다.

그러나 내 육체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무서운 평온이었다.

나는 그런 육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나 자신은 아니었다.

육체는 혼자서 땀을 흘리고, 혼자서 부들부들 떨었다.

나로서는 이미 알 수 없는 육체일 뿐 그것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알아보려면 마치 남의 육체나 되는 것처럼 만져보고, 바라보아야 했다.

나는 때때로 몸에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육체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 이상하고 애매했다.

대체로 육체는 묵묵히 얌전을 빼고 있었다.

나는 나를 누르는 중압감 밖에는 느끼지 못했다.

마치 어떤 커다란 벌레라도 붙어 있는 성 싶었다.

그리고 바지에 손을 대어보니 축축했다.

땀에 젖었는지 오줌에 젖었는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사방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제 정신이 들어서보니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눈물이 나도록 웃고 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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