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겨듣는 曰(왈)

[발터 벤야민]'베를린의 유년시절' 중에서

by 발비(發飛) 2008. 11. 23.

 

 

내가 원하는 일은 새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새 주인이 된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되었다.

 

 -발터 벤야민,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종일 뭘 해야 할 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시간이었다.

생각들로 꽉 찬 시간을 보내다가...

늦게 걸린 화두.

발터 벤야민...

 

새 주인인 된 나!

 

나는 생산할 수 있는가?

아니다.

나는 스스로 생산력을 갖고 있지 않다.

누군가, 그러니까 나를 둘러싼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태어난 나라, 내가 자란 지역, 나를 키워낸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현재를 살고 있다.

지금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은 이들이 만들어낸 생산물이며

난 그 곳에 꽂혀 주인처럼 지키고 서 있는 것 뿐이다.

 

때가 되면 나를 둘러싼 환경들이 서서히 떠난다.

그리고 난 오로지 그들이 남긴 것들을 지키며 살게 된다.

 

그들이 만들고 사라진 것들은 뭐가 있을까?

 

출신지/ 출신학교/ 경력사항/ 성격/ 취미/ 특기..../ 좋아하는 색깔. 음식, 스타일/ 이성에 대한 취향까지...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이 나에게 생산해두고 떠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이 나의 프로필이 된다.

 

살아봐도 살아봐도, 지겨워진다.

혹은 참고 참아봐도  맘에 안든다.

내가 생산하지 않은 것이니 마땅한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나를 포함한 우리가 갈등하고 부정하고 흔들리는 것은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면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한다.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수는 없으나, 난 그것이 싫든 좋든 이미 그들이 생산하고 간 것들을 지키고 있다.

나의 숨통을 막고 있는 것들.

고철덩이든, 쓰레기더미든, 빛 바랜 것이든, 그래서 짐 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다.

 

그들에게 이 짐덩이를 생산자인 그들에게 넘겨줘버렸으면 딱 좋겠는데... 그들은 이미 떠나고 없다. 절대 돌아올 일도 없다.

어떻게 해야지?

그것에 대한 답이다.

 

"내가 원하는 일은 새것을 갖는 게 아니라 오래된 것을 새롭게 만드는 일이었다.

새 주인이 된 내가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아무리 오래된 것도 새것이 되었다."

 

새로운 생산물을 만들 능력은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나,

스스로가 변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듯하다.

 

새주인!

 

 

 

 

 

 

 

 

 

 

 

 

 

 

 


더보기

발터 벤야민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1892년 7월 15일 ~ 1940년 9월 27일)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게르숌 숄렘유대교 신비주의베르톨트 브레히트로부터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또한 비판이론프랑크푸르트 학파와도 관련이 있다.

[편집] 생애

발터 벤야민은 1892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고미술품상이었던 아버지 에밀 벤야민(Emil Benjamin, 1856-1926)과 어머니 파울리네(Pauline, 1869-1930)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일사회에 편입되어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그는 유년시절을 베를린에서 보냈는데, 그 시기의 기억은 그의 책인 <1930년경 베를린 유년시절>에 실려 있다. 청년 시절 그는 청년운동으로서의 구스타프 비네켄(Gustav Wyneken)의 그룹에 가담했고 거기서 젊은 시절 친구인 시인 하인레(Christoph Friedrich Heinle)를 만났다.

1912년 프리드리히 왕립학교를 졸업한 이후,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 독문학,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였고 베를린으로 옮겨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14년 8월 8일 그의 친구인 하인레의 자살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벤야민은 그의 죽은 친구를 위해서 시를 지어서 바치고 하인레의 유작을 출판해주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점차 높아지는 전쟁열 때문에 그는 스승이었던 비네켄과 작별하게 된다. 같은 해, 벤야민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수학도 게르스홈 숄렘(Gershom Scholem)을 알게 되고 그와 평생 친구로 남는다. 1917년 도라 켈너(Dora Kellner)와 결혼하였지만, 결혼생활은 13년만에 파경에 이르고 둘 사이에는 아들 슈테판 라파엘(Stefan Rafael, 1918-1972)이 있다. 결혼과 함께 (또한 점차 높아지는 징병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베른으로 이동, 2년후 리하르트 헤르베르츠(Richard Herbertz)의 지도 아래 그의 박사학위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을 완성한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 벤야민은 자유기고가와 독립출판가로 활동한다. 1921년 보들레르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번역가의 역할"이라는 에세이를 책 서두에 넣는다. 그가 같은해 출판한 철학 에세이인 "폭력의 비평"은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라는 잡지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1923년, 24년 교수자격 제출논문을 제출하고자 프랑크푸르트로 떠난다. 거기서 벤야민은 그보다 어린 아도르노(Theodor Adorno),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와 친분을 쌓는다. 그의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비극의 원천>은 벤야민이 기존의 학술계과 비교해서 상당히 파격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벤야민은 이 논문이 심사에서 공식적으로 탈락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1925년 스스로 교수자격 논문제출을 포기한다.

1926년에서 27년까지 벤야민은 파리에서 지내면서 프란츠 헤셀(Franz Hessel)과 함께 프루스트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을 한다. 1924년경부터 갖게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를 1926년, 27년 겨울에 모스크바로 향하게 한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 점점 동정을 하게 됨에 불구하고 벤야민은 평생동안 그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라는 위치를 고수한다.

주요 저작

  •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 1920년, 박사학위 논문
  • 《보들레르, 파리 풍경》, 1923년, 독일어 번역
  • 《괴테의 친화력》, 1924년, 에세이
  • 《독일비극의 원천》, 1928년, 교수자격 제출 논문
  • 《일방통로》, 1928년, 철학적 아포리즘
  • 《루이 아라공》, 1928년, 작가론
  • 《칼 크라우스》, 1928년, 작가론
  • 《푸르스트의 이미지》, 1929년, 평론
  • 《사진의 작은 역사》, 1931년, 연구
  • 《폴 발레리》, 1931년, 시인론.
  • 《1930년 경 베를린 유년시절》, 1933년, 자서전
  • 《유사성론》, 1933년, 평론.
  • 《미메시스 능력에 관하여》, 1933년, 평론
  • 《프란츠 카프카》, 1934년, 작가론
  • 《생산자로서의 작가》, 1934년, 평론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5년, 에세이
  • 《독일인들, 일련의 편지들》, 1936년, 서간 선집
  • 《얘기꾼. 나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1936년, 평론
  • 《수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에두라르트 푹스》, 1937년, 평론
  • 《보들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해서》, 1939년, 평론
  •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942년, 에세이
  • 《파사쥬》, 단편 모음

한국어 저작목록

  • 《현대 사회와 예술》문학과 지성사, 1980년
  •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9년
  •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92년
  •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 1992년
  •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김남시 옮김, 2005년
  • 《아케이드 프로젝트 1,2》새물결, 조형준 옮김, 2005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