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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히는대로 詩

[이병률] 새 날

by 발비(發飛) 2008. 4. 25.

새 날

 

이병률

 

가끔은 생각이 나서

가끔 그 말이 듣고서 싶다

 

아프거나

담장 바깥의 일들로 데이기라도 한 날이면

들었던 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이거나 누이들이기도 했다

누운 채로 생각이 스며 자꾸 허리가 휜다는 사실을 들킨 밤에도

얼른 자, 얼른 자

그 사실을 들키는 바람에 더 잠 못 이루는 밤에도

좁은 별들이 내 눈을 덮으며 중얼거렸다

얼른 자, 얼른 자

 

그 밤, 가끔은 호수가 사라지기도 하였다

터져 펄럭이던 살들이 꿰맨 것인지

금이 갈 것처럼 팽팽한 하늘이기도 하였다

섬광이나 아무 것이나 떨어지면 받을 접시를 옆에 두고

 

지금은 헛되어 눕기도 한다

헛되고 헛되이 이런 환청이 내려앉기도 한다

자고 일어나면 개벽을 할 거야

 

수많은 수많은 괜찮음들이 쌓일 접시를 들여다보며

잠들 수 없는 밤

조금 울기 위해 잠시만 전깃불을 끄기도 한다

 

꽤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렸었다.

5년 이상을 수면제를 먹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시간들.

그때 잠은 내게 아주 넘지 못할 벽과 같은 것이었다.

세상 모든 것들을 가능해도 스스로 잠들 수 없는...

스스로 잠들 수 없는 시간에 느꼈던 존재감이라는 것은 세상과도 넘지 못할 시간을 살고 있는 듯한 똑같은 것이었다.

잠을 잘 수 있을 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

 

수면제를 한 알 먹고 10분즈음 지나면 몽롱히 의식을 잃어가는 자신을 느끼는 것.

저 너머 세상으로 넘어가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느껴지는 것.

간혹 수면제를 먹은 시간에 누구와 통화를 하게 된다면, 수면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 속에서 나누는 말들.

그 때 나를 술에 취한 줄 알았다고 했다.

 

수면제를 완전히 끊은(?) 것은 긴 여행을 떠났을 때부터였다.

현재가 아닌 먼 곳에 내가 놓여졌을 때 그제서야 스스로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시간이 오래 오래 되자.. 현재가 멀리 멀리 갔다. 그러다 아예 내 속에 들어앉았다.

여행에서 돌아와서

난 잠을 자기 시작했고,

스스로 잠이 든다.

졸려서 어느새 잠이 든다.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난 안다.

 

요즈음, 깊은 밤 침대에 누워 스스로 잠들고 있는 나를 자각할 때면 생각한다.

이제 됐다.

이정도면 괜찮다.

잠을 자면 된거야. 더는 바랄 것이 없다.

한 때 나의 꿈이 이루어진거다. 스스륵 그냥 잠이 드는 것.

 

잠이 싫어 뒷걸음치는 나를 끌어다 그저 무의식의 상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무의식에서 의식의 세상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침이었던 날들이 지나...

나의 하루가 다 하면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륵 잠이 드는 것.

 

자라.

얼른 자라.

자고 나면 괜찮다.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아진다.

잠만 자면 된다.

 

새날이 온다.

 

난 지금 수면제없이도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을 살고 있으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난 괜찮을 것이다.

자고 나면 매일 새날이것이니까...

 

 

얼른 자야 할 것 같다.

얼른 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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